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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처음으로 피렌체를 방문했다. 두오모 성당 꼭대기에서 말로만 듣던 피렌체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던 나에게 한 커플이 사진을 찍어 달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흔쾌히 받아 든 다음 순간, 조금 놀랐다. 여느 연인과 다름없이 사랑스러운 포즈를 취한 그 커플은 둘 다 여성이었다. 동성 커플을 실제로 가까이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동성애에 대한 비이성적 혐오를 혐오하던 나였지만, 익숙하지 않은 것을 처음 접했을 때 순간적으로 드는 낯선 느낌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그 뒤로 피렌체를 방문할 때마다 한국과 달리 자연스러운 동성 커플 관광객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피렌체와 동성애

사실 피렌체는 예전부터 동성애로 유명한 곳이었다. 14세기 독일 지역에서는 '플로렌처(Florenzer)'라는 단어가 '남색'을 뜻하는 속어였을 정도다. 많은 성직자들이 남색 때문에 피렌체가 파멸할 것이라고 외쳤는데, 그것은 그만큼 피렌체에서 동성애가 생소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피렌체의 동성애는 르네상스의 발현과 연관이 있다.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철학과 예술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에 동성애가 널리 퍼졌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르네상스 초기 피렌체 지식인들은 고대 철학자 중에서도 플라톤에 열광한다.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현대에서 이 개념은 육체적인 관계를 지양하고 연인과의 정신적 교감을 중요시하는 교제 방식을 말한다. 하지만 원래 이 개념은 플라톤이 쓴 <향연(Symposium)>에서 비롯된 것으로 '성인 남자와 어린 소년 사이의 정신적 유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플라톤주의 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는 이런 플라토닉 러브가 사람들을 천국처럼 숭고한 곳으로 데려다준다고 주장했다. 신플라톤주의가 융성하면서 동성애 역시 지식인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의 동성애는 현대의 개념과 조금 달랐다. 이 시기 동성애는 주로 남자끼리, 특히 중년 남성과 젊은 청년 혹은 소년 간의 관계가 대부분이었다. 여성과의 관계는 정신을 타락시키고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반면 동성애는 고대의 순수함에 다가갈 수 있는 통로였다.

1900년대 초 한국의 문인들에게 폐병이 묘한 낭만으로 여겨졌던 적이 있었다. 피렌체에서는 동성애가 예술가들이 공유하는 독특한 정서였다. 그래서 실제 동성애자가 아니더라도 숭고한 예술과 철학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한 번쯤 거쳐야 하는 경험으로 여겨졌다.

어려서부터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했던 미켈란젤로도 마찬가지였다. 미켈란젤로는 예술에 대한 집착이 누구보다 컸다. 그 역시 여성을 자신의 정신과 예술세계를 오염시키는 존재로 봤다. 그래서 그는 여성혐오라고 보일 정도로 평생 연애와 성생활을 멀리했다. 그런 그가 1532년쯤 로마의 젊은 귀족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와의 관계에서는 동성애로 의심될 만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동성애자였다는 설이 있다. 유명한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1910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년 기억'이라는 글을 썼다. 여기에서 프로이트는 다빈치의 여러 작품들을 분석하며 다빈치가 동성애자라고 주장한다. 그는 다빈치를 가리켜 '성 에너지를 넘치는 탐구욕으로 승화시킨 수동적 동성애자'라고 말한다. 실제 다빈치는 젊었을 때 동성애자라는 고발 때문에 조사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이러다 보니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예술품들에서 동성애적 요소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서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도나텔로(Donato di Niccolò di Betto Bardi, 1386-1466)의 작품들이다.

도나텔로의 다비드상
 
과거 피렌체의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서와 감옥으로 쓰이다가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 바르젤로 미술관 과거 피렌체의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서와 감옥으로 쓰이다가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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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젤로 미술관(Museo nazionale del Bargello)은 우피치, 아카데미아, 두오모 오페라 미술관 등과 더불어 피렌체 4대 미술관이라 불린다. 시뇨리아 광장에서 북동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는 도나텔로와 미켈란젤로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데, 다른 유명 미술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붐빈다. 그래서 좀 더 여유 있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우피치 미술관이 회화 중심이라면 바르젤로 미술관은 조각 위주로 전시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회화보다 조각과 건축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 딱 들어맞는 곳이기도 하다.

바르젤로 미술관 2층에 가면 비슷한 크기의 다비드상들이 있다. 하나는 베로키오의 작품이고 다른 두 개는 도나텔로의 작품이다. 도나텔로의 다비드상 중 하나는 1408년에 대리석으로 제작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1440년에 청동으로 만든 것이다.

도나텔로의 두 작품은 세월의 차이만큼이나 그 표현 방식이 다르다. 대리석 다비드상은 전통적인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한쪽 다리에 체중을 실은 상태에서 상체를 살짝 비튼 자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승이기도 하다.
▲ 베로키오의 청동 다비드상(1475년)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승이기도 하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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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청동 다비드상의 자세는 다리의 모습과 전체적인 자세가 당당한 영웅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어딘지 요염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모자를 쓰고 신발을 신었을 뿐 나체로 서 있다. 과거 동성애로 전우애를 다지던 고대 그리스 군사들이 나체에 신발만 신은 채 무기를 들고 전투에 나서던 모습이 연상된다. 청동 다비드상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미소년의 적나라한 알몸 때문에 피렌체 시민들이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콘트라포스토 자세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조각상에 널리 쓰였다.
▲ 도나텔로의 대리석 다비드상(1408년) 콘트라포스토 자세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조각상에 널리 쓰였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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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포스토 자세이긴 하지만 다른 다비드상과 달리 상당히 여성스럽다.
▲ 도나텔로의 청동 다비드상(1440년) 콘트라포스토 자세이긴 하지만 다른 다비드상과 달리 상당히 여성스럽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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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텔로의 또 다른 청동상인 아티스(Attis, 1440)는 좀 더 적나라하다. 그리스 신화의 신으로 알려진 아티스는 다비드보다 더 어린 소년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춤을 추는 듯한 손 모양이 여성스럽다. 황홀경에 빠진 듯한 표정은 어딘지 퇴폐적인 느낌을 준다. 게다가 바지를 입고 있지만 가운데는 열려 있다.
 
  아티스는 양성애자인 아그디스티스의 아들이다.
▲ 도나텔로의 청동 아티스상(1440년)  아티스는 양성애자인 아그디스티스의 아들이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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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작품은 동성애적인 요소를 강하게 띠고 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았던 도나텔로는 대표적인 동성애자였다. 그 역시 여성을 멀리하고 미소년들을 가까이했다. 미국과 이탈리아의 합작 드라마인 '메디치 – 피렌체의 지배자들(Medici – Masters of Florence)'에서도 도나텔로가 어린 미소년과 함께 잠자리에 있는 장면이 나온다.

지식인과 예술가들 사이에서 동성애가 유행이었다고 해서 당시 대중 정서까지 동성애를 용인한 것은 아니었다. 교회가 삶의 중심이었던 피렌체에서 동성애는 분명한 범죄였고 혐오의 대상이었다. 동성애자로 고발되면 끔찍한 고문을 받고 극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피렌체 사회가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동성애자라고 모두 잡혀가는 것은 아니었다. 반드시 누군가의 '고발'이 있어야 했다. 다시 말하자면 공공연히 동성애자라고 소문이 나더라도 고발만 없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결국 뒤를 봐줄 수 있는 부자나 권력자와 친분이 있어야 했다. 동성애자로 고발당했던 다빈치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동성애 상대가 고위층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모든 동성애자가 고위층과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다. 동성애는 여전히 은밀했고 소수였다. 그리고 권력자들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동성애 혐오를 부추기기도 했다.

소도시 루카에게 당한 참패

피렌체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15세기 초 루카 전쟁은 피렌체에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안겨준다.

루카는 피렌체에서 불과 6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로 피렌체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피렌체에서 독립하기 위해 피렌체의 적국 밀라노와 손을 잡는다. 그래서 1429년 11월 피렌체는 루카를 진압하기 위해 용병 부대를 투입한다.

피렌체는 루카를 손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전쟁은 길어졌다. 용병을 썼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여기에 국내 정서도 점차 나빠졌고, 피렌체 정부는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야만 했다.

피렌체 정부는 두오모 성당의 돔 공사로 유명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를 전선으로 급파한다. 건축가가 전쟁에 자문 등의 형태로 개입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훗날 미켈란젤로 역시 피렌체 방어를 위한 성벽 관리 책임자로 일하기도 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브루넬레스키는 아주 대담한 계획을 세운다. 댐을 쌓아 루카의 젖줄인 세르키오 강을 막는 것이다. 이렇게 물줄기를 돌려 루카를 에워싸면 루카가 항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만약 항복하지 않더라도 댐을 터뜨려 루카를 공격할 수 있었다.

여러 지휘관들이 이 계획을 비판했다. 무엇보다 댐의 안전성이 문제였다. 피렌체 정부에서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본 결과, 댐은 일반인이 육안으로 보더라도 매우 허술하고 위험하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처음 두오모 성당의 돔 공사를 시작할 때도 다들 불가능하다며 반대하지 않았던가? 브루넬레스키는 반대자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머저리들은 모두 전쟁터로 쓸어 내버려야 한다고 필리포는 주장했다.(로스 킹 <브루넬레스키의 돔>, 이희재 옮김, 세미콜론, 186쪽)
 
하지만 댐 공사는 지지부진했다. 그사이 댐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루카가 돌격대를 편성해서 야간 기습을 감행했다. 이 공격으로 댐 일부가 터지고 강물이 쏟아졌다. 그런데 터진 강물은 루카가 아니라 피렌체 군대를 덮쳤다. 피렌체 군대는 허겁지겁 높은 곳으로 피신해야 했고, 브루넬레스키의 침대도 물살에 떠내려갔다.

여기에 밀라노가 루카를 돕기 위한 원군을 보내면서 전황은 더 불리해졌다. 피렌체는 밀라노의 용병대장 스포르차에게 뇌물을 주어 돌려보낸다. 하지만 이후 다시 이어진 루카와의 전투에서도 피렌체는 참패를 당한다.

권력자들을 위한 희생양이 되다

이 패전으로 피렌체 정부는 궁지에 몰린다. 용병과 댐 공사에 막대한 국고를 쏟아부었던 정부는 엄청난 재정 부담에 시달리게 된다. 또한 평소 우습게 여기던 작은 도시 루카에게 당한 패배는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정부는 시민들의 분노를 돌릴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래서 패전의 책임이 군대 내 퍼진 동성애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동성애자들이 늘어나서 군기가 문란해졌고 군인들이 무기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군 내부에 동성애가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패배의 주요 원인이라는 것은 책임 회피를 위한 군과 정부의 억지였다.

1432년 정부는 군대 내 동성애자를 색출하기 위해 우피치알리 디 노테라(야간국)라는 기관을 만든다. (노테는 '밤'이라는 뜻과 함께 '남색가'라는 뜻도 있다.) 누구라도 동성애자로 의심되면 끌려가 고초를 당해야 했다. 진짜 동성애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시민들의 눈을 돌릴 수만 있다면 소수의 희생쯤은 상관없었다. 결과적으로 시민들의 분노를 정부에서 동성애자로 옮기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동성애자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했지만 피렌체 군대의 전투력은 나아지지 않았다. 밀라노와의 전투에서 연전연패하던 피렌체는 결국 1433년 굴욕적인 휴전 협정을 맺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정치적으로 아주 훌륭한 도구인 듯하다. 피렌체의 아웃사이더 혐오는 이민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태그:#피렌체, #바르젤로 미술관, #도나텔로, #다비드,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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