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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입국한 3만 명의 탈북자 중 대다수가 청년이다. 하지만 학교, 직장 어디를 가나 따라다니는 '탈북'이라는 꼬리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청년들에게 큰 무게이다. 북한이라는 뿌리 없이 이들의 삶을 말할 수 없지만 이제는 탈북자 보다는 한국인 청년으로 불리고 싶은 7인을 만났다. 각 스토리는 <미디어눈> 에디터들이 탈북청년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기사에 사용된 이름, 나이, 지명은 북에 남겨진 가족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일부 수정이 있었음을 사전에 밝힌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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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군대 가려고..."
"안돼, 군대는 가지 마라."
"아니 그게 아니라, 나 반동분자라고 군대 못 간대. 한국 가고 싶어."
"… 너 여기 와서 살 수 있겠어?"
"거기라고 여기랑 다를 거 있어? 그냥 여기서 살듯이 살면 되는 것 아니야?"
"정말이지? 그런 마음이라면 와도 되겠다.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 말고 거기서 살듯이 아등바등 살면 여기서도 살 수 있어."


그렇게 한국행을 결정했다. 벌써부터 한국에서의 삶이 기다려졌다. 한국에 가면 뭐 하고 살까? 그날 이후로 매일 밤 한국 가서 사는 꿈을 꾸었다.

엄마는 탈북자금 500만 원을 보내왔다. 그 돈은 고스란히 국경을 넘는 데 쓰였다. 브로커에게 500만 원을 줬는데, 들어보니 자기가 200만 원을 먹고 나머지 300만 원은 군대에 준다고 한다. 두만강과 중국 사이 초소를 비워주는 대가였다. 나는 어머니가 구해준 브로커를 만나 500만 원으로 해결했지만, 보통은 여기에 300만 원이 더 들어간다. 당장 돈이 없는 사람들은 한국 가서 정착금을 받으면 나머지를 내겠다고 각서를 쓰고 오기도 한다.

국경을 넘어 중국에서 라오스로, 라오스에서 태국, 그리고 한국으로 가는 강행군이 시작됐다. 저녁 8시, 해가 지고 두만강을 건넜다. 강 건너편에는 다른 브로커가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소리를 죽이고 차로 옮겨 타서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에는 이미 탈북해서 머물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사흘을 머물다, 나흘째 되는 날 그룹을 나누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우리 그룹에는 여자만 11명이 있었다. 대부분 누나들이었다. 누나들은 내가 브로커인 줄 알고 중국말로 말을 걸었다. 그래서 나는 누나들이 중국인인 줄 알았다. 대부분 30대였는데 탈북 비용을 마련하느라 중국에서 돈을 모으던 사람도 있었고, 팔려와서 지내던 사람도 있었다. 내가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자 누나들은 그제야 담배를 건네주면서 웃음을 보였다.

북한 → 중국 → 라오스 → 태국 → 한국

 
 일러스트: 김하늘 에디터
 일러스트: 김하늘 에디터
ⓒ 미디어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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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라오스까지는 열흘이 넘게 걸렸다. 일주일은 침대 버스로, 사흘은 기차를 타고 라오스로 향했다. 긴 시간만큼 참기 힘들었던 것은 냄새다. 화장실 냄새, 발 냄새, 담배 냄새, 향신료 냄새, 사람에게서 날 수 있는 냄새란 냄새가 다 섞인 곳에서 24시간을 보내니 매일 구역질이 나왔다. 그나마 중국어를 잘하는 누나들이 사 오는 간식 먹는 재미로 버텼다.

라오스에 도착하자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다.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고, 태국으로 가기 전에 신원 조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감옥은 아니었지만, 잠은 경찰서 안에서 자야 했다. 일주일 뒤 라오스와 태국 사이 국경을 넘었다. 태국으로 가기 전에 브로커는 국경을 넘자마자 민가가 보이면 초인종을 누르라고 언질을 줬다. 일단 경찰한테 잡혀야 한국 대사관에 갈 수 있는 길이 생기기 때문이란다.

수풀을 헤치고 나가니 얼마 안 가 눈앞에 집이 보였다. 브로커가 시킨 대로 초인종을 누르고 사람이 나오자 "폴리스 폴리스!"를 외쳤다. 집주인은 너무 익숙하다는 듯이 경찰을 불러줬다. 잠시 후 수송차와 경찰이 왔다. 우리 무리가 40명 정도였는데, 트럭으로 3~4번 왔다 갔다 한 끝에 일행 모두가 교도소에 수감될 수 있었다. 불법으로 국경을 넘었기 때문에 교도소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머리가 빡빡 밀렸고, 팔다리에 쇠고랑을 찼다. 생각보다 수감 기간이 길었다. 한 달을 넘게 감옥에서 지낸 것 같다. 사람들은 왕년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무료함을 달랬다. "내가 중국에서 경찰한테 주먹 한 방을 날렸는데 3m는 날아갔다니까!" 가끔 허세를 부리는 것이 뻔히 보이는 코웃음 나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무료한 감옥생활의 재미이기도 했다.

때가 되자 방콕 한국 대사관으로 옮겨졌다. "안녕하세요!"로 시작하는 한국말이 들려왔다. 그제야 여기가 한국 대사관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살았구나 싶었다. 하지만 한 가지 관문이 더 있다. 간첩인지 아닌지, 북한 사람인지 아닌지 심사를 거친다. 탈북민 정착금을 노리고 북한 사람인 척하는 조선족들이 꽤 있다고 한다. 심지어 조선족 방언은 함경도 방언과 비슷하다. 그래도 노련한 전문가 심사관을 속일 수는 없는 모양이다.

마지막 관문, 대사관에 울린 아줌마의 울음소리

심사관들은 북한 내 고향 지도도 그려보게 하고, 유도 신문을 하면서 예리하게 북한 출신인지를 판별했다. 그때 어디선가 아줌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북한 사람이 아니라고 판정된 것 같다. 들어보니 북한에서 태어나서 세 살 때 중국으로 가서 고향에 대한 기억이 없고, 북한 출생이라는 것을 보증해줄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심사관은 냉정히 한국으로 갈 수 없다고 통보했고, 아줌마의 울음소리는 대사관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됐는지 나도 모르겠다.

북한을 떠나 긴 두 달을 보내고 드디어 고대하던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은 어떤 곳일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도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도착하자마자 몇 달의 조사 기간이 이어졌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매우 규칙적이었다. 시간표에 맞춰 움직이고, 식사하고, 혼자 있을 수도 없었다. 북한에서 이런 생활이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불편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가끔은 영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영화 보는 날은 여자들과도 만날 수 있어서 더 기다려졌다. 조사가 끝난 뒤에는 하나원으로 옮겨졌다. 하나원에서의 생활은 훨씬 자유로웠다. 축구도 할 수 있고, 밥도 맛있고, 노래방도 있고, 운동실에 탁구대도 있었다. 가끔 서울 투어도 했다. 창밖의 한국은 너무 아름다웠다. 빨리 저곳을 몸소 느껴보고 싶었다.

하나원 생활이 끝나서야 진짜 한국 생활이 시작됐다. 들뜬 마음만큼이나 처음 몇 년을 매우 신나게 보냈다. 정말 신나게. 당장 뭘 할지도 몰랐고 신기한 것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놀려면 돈이 필요했다. 친구한테 들으니 자격증을 따면 600만 원을 받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했다. 당장 인천 송내역 앞 OO 전문학교에 등록해서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학원이 끝나면 다시 피시방과 클럽으로 가서 자유를 만끽했다.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영화 속에서만 보던 그 자유였다. 그리고 자격증도 땄다. 뭔가를 이루고 보니 뿌듯했다.

"야, 우리 공장에 빨갱이가 세 놈이나 있다더라"

2년을 그렇게 놀면서 보냈는데 20살이 되니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여명학교라는 탈북자를 위한 학교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그런데 서류를 붙고 면접을 봤는데, 떨어졌다. 선생님은 내가 공부할 생각이 없는 애라고 했다. 놀던 티가 너무 많이 났나보다. 다음 날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예비 반에서 1년을 공부하면 정식 입학을 할 수 있게 해준다고 다시 와보라고 했다. 알겠다고 하고 들어갔는데 이건 영 아니었다. 그 반 학생들은 곱하기와 나누기도 할 줄 몰랐고, 심지어 어떤 친구는 한글도 쓸 줄 몰랐다. 나는 심사 기관에서 고졸 학력을 인정받은 상태였다. 반을 올려달라고 했지만, 자리가 없다고 거절당했다. 이건 아니다 싶어서 바로 때려치웠다.

공부하려는데도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싶어서 돈이라도 벌자고 결심했다. 누가 거제도에 가면 일당이 10만 원이라기에 바로 거제도로 갔다. 어떻게 해서 조선소에 일자리를 얻어서 취직한 줄 알았는데, 총무하고 면접을 봐야 하니 이력서를 준비하라고 했다. 이력서는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고 어떻게 쓰는 줄도 몰랐다. 이력서를 몇 시간 동안 쳐다봤지만 한자도 적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르겠고 보고 있으면 화가 났다. 결국 양식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다행히 총무에게 솔직히 말하니 이해한다며 일을 시켜줬다.

전기 검사하는 일이었다. 무전기와 도면을 들고다니면서 체크하는 일이다. 다행히 생각보다는 힘들지 않았다. 일이 끝나면 또 거제도의 피시방과 클럽으로 달려갔다. 돈 버는 재미는 있었지만 일을 계속하고 싶진 않았다. 2년이 채 안 됐을 때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더니 대표님이 "이 새끼 미친 소리 하고 있네. 회사가 마 애들 장난이가! 니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고"라며 엄청나게 혼쭐냈다. 욕 제대로 먹고 첫 직장을 그만뒀다.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구미 핸드폰 공장에서도 일했었다. 그곳에는 나 말고 다른 탈북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눈에 큰 상처가 있었는데 어느 날 다른 동료가 그 친구를 보며 한마디 던졌다.

"와 빨갱이 무섭게 생겼네!"

친구가 "뭐라고요?"라고 되묻자 그 직원은 "야 장난이다, 임마!" 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치고받는 싸움으로 번졌고, 결국 사장님까지 알게 되는 소란이 벌어졌다. 그 광경을 보고 온 친한 형이 내게 말을 걸었다.

"야, 우리 공장에 빨갱이가 세 놈이나 있다더라."
"... 형, 그 빨갱이 나 말하는 거예요? 쟤, 내 고향 친구예요. 나도 북한에서 왔고요."


형은 얼굴이 빨개져서 몰랐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구나, 북한에서는 나보고 반동분자라더니 여기서는 빨갱이구나.

얼마 뒤 핸드폰 공장을 그만뒀다. 빨갱이 소리 때문만은 아니다. 돈 버는 것도 좋고 노는 것도 좋은데, 내 인생의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뭐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답은 너무 간단했다. 노는 것이다. 나는 진짜 노는 것 하면 누구에게도 안 질 자신이 있다. 그런데 놀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그때 떠오른 게 영화다. 북한에서 이불 덮고 몰래 숨죽여 한국 방송을 보며 여기에 오는 꿈을 키웠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한번 만들어보면 어떨까? 대충 시나리오 쓰고 촬영하면 될 것 같은데 대학 가서 한번 배워보자. 그렇게 영화과로 진학을 결정했다.

그래, 영화다!
 
 영화 영웅본색 한 장면
 영화 영웅본색 한 장면
ⓒ 영화 영웅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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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과 대학생이 된 지금 돌아보면 그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었는지를 고백한다. 8분짜리 영상 하나 찍는데 온종일 촬영하고, 며칠에 걸려서 편집하고, 일이 장난이 아니었다. 놀고 싶어서 영화과를 왔는데, 놀기는커녕 솔직히 일이 너무 많다. 하지만 행복하다. 하고 싶은 것이 생겼고 꿈이 생겼다. 지금도 놀기 좋아하지만 이 꿈을 키워 한국에서 제대로 살고 싶다.

북한에 있을 때 한국 영화 다음으로 중국에서 들여온 주성치, 주윤발, 성룡 영화를 재밌게 봤다. <서유기>, <영웅본색> 같은 액션 영화. 특히, 주성치와 성룡의 액션은 끝내준다. 언젠가 나도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날이 올까? 사람들이 내 이름만 듣고도 "이 감독 영화는 무조건 봐야지" 하는 그날이 올까 궁금하다. 코미디와 액션, 그리고 감동이 들어간 영화. 거기에 감독 김지우 이름 석 자 적힐 그날까지 열심히 놀며 찍고 만드는 감독이 되겠다.

나한테 북한이 뭐냐고? 고향이다. 정든 추억과 가족들, 친구들이 있는 고향. 북한의 정치, 사회, 그런 건 잘 모른다. 고향 이야기가 궁금하고 영화 이야기를 함께 떠들고 싶은 사람들, 언제든지 와서 같이 놀자! 나는 영화감독을 꿈꾸는 대한민국 청년 김지우다.
 
 일러스트: 미디어눈 은성 작가
 일러스트: 미디어눈 은성 작가
ⓒ 미디어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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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미디어 눈 팀 블로그에도 연재중입니다. https://brunch.co.kr/@medianoon/16
미디어눈은 "모든 목소리에 가치를"이라는 비전으로 활동하는 청년미디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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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목소리에 가치를" 송준호 미디어 눈 에디터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사회를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