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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의 최고지대인 '겔레르트 언덕'에서 바라보는 풍광
▲ 다뉴브 강 전경 부다페스트의 최고지대인 "겔레르트 언덕"에서 바라보는 풍광
ⓒ 이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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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루미(gloomy) 헝가리, 글루미 부다페스트

"여러분, 앞쪽에 보이는 왕궁이 바로 '부다 성'(Budai Vár)입니다. 과거 헝가리 국왕들이 머물던 곳이었고, 우리나라 드라마 <아이리스>의 촬영지이기도 했죠. 그러고 보면 여기 부다페스트에서는 유독 첩보물을 많이 찍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는 <맨투맨>이란 드라마도 저쪽 강 건너편 근처의 '성 이슈트반 대성당'(Szent István-bazilika)에서 촬영을 하더라고요. 말씀 안 드려도 제목 들으니까 감이 팍 오시죠? 국정원들 얘기인데, 치고 박고 총 쏘고 누구 하나 죽어나가고 막…… "

난간에 기대어 '다뉴브'(헝가리 발음으로는 '두너') 강변을 촬영하느라 한창 열중하던 참이었는데 등 너머로 문득 귀에 익은 언어가 들려왔다. 한국에서 온 패키지 여행객들을 인솔하던 현지 가이드의 목소리였다. 그는 사뭇 거대해 보이는 한 무리를 이끌고 왕궁 쪽으로 걸어가며 말재간을 이어나갔다.

"제가 헝가리 가이드만 7년째인데, 가끔 옆 나라 체코의 가이드들이 그렇게 부럽더라고요. 사랑의 도시, 연인들의 도시, 프라하! 왜 그 <프라하의 연인>이라는 드라마도 있잖아요? 캬 …… 쩝, 저도 언젠가는 여기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낭만의 도시'로 좀 소개해드리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부다페스트의 주요 관광지들을 안내해드리고 나면 손님들이 어째 하나같이 마음이 무거워지고 기분이 서늘해진다고들 말씀하셔서요."

공교롭게도 그들이 왕궁으로 가는 길목 근처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 때문에 폐허가 되어버린 공터가 마치 개간을 포기해버린 농지처럼 적나라하게 치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성 근처에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들이 여전하다
▲ 부다 왕궁(Budai Var) 성 근처에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들이 여전하다
ⓒ 이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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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후 500년가량의 평온, 그리고 시작된 '을의 역사'

어쩌면 가이드의 푸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근대의 태동기부터 20세기 후반까지 헝가리의 역사는 그야말로 고난과 수난의 연속이었다. 물론 헝가리에도 장밋빛 시절이 있었다. 대략 1000년경부터 시작된 헝가리 왕국은 15세기 무렵에 이르러 나름 중부 유럽의 핵심 국가로 성장한다.

특히 마차시(Mátyás) 1세 왕이 통치하던 1458년에서 1490년까지의 기간은 유럽 전역에 르네상스 문화가 도진만큼, 헝가리라는 나라도 르네상스 분위기에 발맞춰 자신들만의 황금기를 꽃피운 시기였다.

그의 업적이 대단했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성군 세종대왕과 비견하여 그를 '헝가리의 세종대왕'이라며 별명처럼 부르기도 한다. 부다 왕궁 근처에 높은 첨탑을 자랑하는 고딕 양식의 건물이 바로 그의 이름을 본뜬 '마차시 성당'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성기가 무색하게도 헝가리는 16세기 중반에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받는다. 안타깝게도 헝가리는 패했고 그때부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다. 이후 헝가리가 지난하게 겪게 될 '을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100년 정도 지날 무렵 오스만 제국이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치르자, 헝가리는 졸지에 그들의 전쟁터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오스만 제국이 패했고, 그때까지 중부 유럽을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패권을 넘긴다. 중부 유럽의 주인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헝가리의 주인이 바뀌는 순간이기도 했다. 정작 주인이어야 할 헝가리 국민들은 피지배자인 채로 말이다.
 
헝가리의 세종대왕이라 불린 마차시 왕의 이름을 본뜬 성당
▲ 마차시 성당 헝가리의 세종대왕이라 불린 마차시 왕의 이름을 본뜬 성당
ⓒ 이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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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부다페스트 공방전'

물론 헝가리 사람들이 외세의 지배를 마냥 좌시하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꾸준히 저항정신을 발휘하여 오스트리아와 독립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1867년부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성립된다. 오스트리아 왕이 헝가리의 왕을 겸하는 데다 여전히 합스부르크 왕가와 협치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오스트리아 세력을 온전히 제거한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형식적이고 외견상으로나마 독립을 이뤄낸 셈이다.

하지만 헝가리의 광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반세기쯤 지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헝가리는 전시 상황을 틈 타 자신들이 독립 공화국임을 선포한다. 그러나 독립 국가로 야심차게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헝가리가 얻은 것은 패전국이라는 불명예뿐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패전국으로서 치러야 할 가혹한 희생과 혹독한 대가들이었다. 헝가리는 이때 자신들의 국토와 인구 중 약 2/3 이상을 한꺼번에 잃는다. 그리고 이것이 헝가리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에 대항하여 추축국에 가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1930-40년대의 헝가리가 작품의 주요 배경이다
▲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한 장면 1930-40년대의 헝가리가 작품의 주요 배경이다
ⓒ WARNER BROS. 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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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헝가리는 독일의 나치를 지원하며 주변국을 적지 않게 합병한다. 잃었던 영토를 일부 회복했다는 점에서 헝가리와 히틀러의 만남은 헝가리 입장에서 꽤 이득이었다. 그러나 히틀러와 연을 맺은 일은 이후 헝가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한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를 상징하는 영화들 중에 <글루미 선데이>가 있다. 한 여인과 그 여인을 사랑하는 두 남자 사이에 한 명의 나치 독일 장교가 끼어들고, 그로 인해 셋 중 누군가는 자살하고 누군가는 아우슈비츠에 끌려가고 누군가는 원한을 품은 채 여생을 산다는 내용인데, 이 영화의 주요한 시대적 배경이 바로 1930년대 이후의 헝가리다. 영화를 보면 전운이 감돌기 직전 암울한 분위기에 휩싸인 1930년대의 부다페스트를 십분 느낄 수 있다.

1944년에 이르러 추축국의 전세에 패색이 짙어지자 헝가리는 추축국으로부터 탈퇴를 결심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히틀러가 연합국과 평화 협정을 하려는 헝가리를 방해한다.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을 향해갈 무렵, 결국 연합국으로 '이적'을 하지 못한 헝가리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소련과 격전을 치른다.

특히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의 동부 전선 전투 중 손에 꼽힐 만큼 치열한 전장으로서 역사에 길이 남게 된다. 이 전투가 그 유명한 '부다페스트 공방전'이다. 이 전투로 부다페스트의 지역과 시민들은 문자 그대로 소련군에게 초토화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이 독일군을 물리친 후 '자유의 여신상'을 세운다
▲ 겔레르트 언덕의 "자유의 여신상"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이 독일군을 물리친 후 "자유의 여신상"을 세운다
ⓒ 이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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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뿐이었던 1956년 '헝가리의 봄' 

종전 이후 헝가리의 역사는 우리가 학교 세계사 시간에 익히 배운 동구권 국가들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 체코,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등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한 여느 동유럽국처럼 헝가리도 조금씩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에 편입된다.

얼마 전만 해도 '부다페스트 공방전'으로 자신들의 수도를 묵사발로 만든 장본인을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자신들의 새 주인으로 모시게 된 꼴이다. 광복 후에도 헝가리는 여전히 갑의 입장이 될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동구권 국가에 대한 소련의 지배권을 강화하는 바르샤바 조약이 체결되고 그 이듬해인 1956년, 헝가리 국민들은 자국의 공산주의 독재 정치에 반대하여 혁명 시위를 일으킨다. 이 혁명을 일명 '헝가리의 봄'이라 한다.

하지만 대부분 실패한 혁명이 그렇듯이, 부다페스트의 봄꽃은 러시아 군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인해 끝내 만개하지 못했다. 당시 소련의 잔학성과 막돼먹음은 우리나라의 시인 김춘수의 작품, <부다페스트의 소녀의 죽음>에서도 잘 비유되어 있다.

그 후 소련이 붕괴되고 동구권이 해체하는 1991년까지 헝가리는 약 반세기가량 공산주의 국가였다. 첩보물이 냉전의 산물인 것을 생각하면, 한때 소련의 위성국가로서 주요 공산국 중 하나였던 헝가리가 냉전이 종식된 지금에도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첩보물의 주 무대로 등장하는 것이 그리 신기한 일도 아니다. 일찍이 민주화를 겪은 외부 세계의 사람들이 보기에 헝가리는 무의식적으로 여전히 '미지의 위험 국가'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리라.
 
헝가리 역사의 주요 인물들 동상이 한데 자리한 곳
▲ 영웅 광장 헝가리 역사의 주요 인물들 동상이 한데 자리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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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빛 찬란한 국회의사당처럼 꽃길만 걷길

어째 헝가리의 1천년 역사를 읊고 나니 조금 서글퍼진다. 외세 중 어느 누구에게도 속 시원하게 소위 '갑질' 한번 못해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우리나라 역사와 다른 듯 닮은 것 같아서다. 고래 등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늘 강대국의 이권 싸움에 이리저리 휘둘린 처지에도 묘하게 동질감이 생긴다.

1990년대부터 민주화를 추진한 헝가리는 이제 어엿한 의원내각제 국가다. 최근에는 경제성장률도 상승 추세인데다, 현재의 여당 총리는 연속 3선에 성공했을 만큼 국민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요즘의 헝가리는 유럽연합(EU)으로부터 기금을 지원받으면서도 정작 EU가 권유하는 정책에는 반대도 할 줄 아는 당돌한 '을'이기도 하다.

다소 극우적인 성향을 띠며 '갑질'의 기미를 보이는 그들의 행보가 조금 우려되기는 하지만, 여하튼 지금의 헝가리는 결코 공산주의의 그늘에 갇혀있던 과거만큼 우울해보이지는 않는다.
 
다뉴브 강변 유람선 투어 중 야경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곳
▲ 헝가리 국회의사당 다뉴브 강변 유람선 투어 중 야경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곳
ⓒ 이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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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들은 유럽 도시의 야경 중에서 헝가리, 그 중 부다페스트의 그것을 으뜸으로 꼽는다고 한다. 의견이 분분할 수 있으나 개인적인 관광 소감으로서 부다페스트의 야경 중 제일가는 포토제닉 명소를 꼽자면, 도나우 강 옆에 위용을 떨치며 찬란히 황금빛을 자랑하는 국회의사당이 아닐까 싶다.

마치 금박을 씌운 것처럼 휘황찬란하게 밤공기를 밝히는 우아한 노란빛을 보다보니, 어쩌면 머지않아 부다페스트도 지난했던 과거의 우울한 이미지를 벗고 버젓이 로맨스를 상징하는 도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그리고 비록 이해관계가 전연 없는 서쪽의 멀고도 먼 타국이지만, 더 이상 이 땅 위에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지배하는 일도,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핍박당하는 일도 없었으면 하고 바랐다.

어쩐지 그렇게 빌어야만 남북한이 갈린 우리 한반도 위에도 무엇인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막연하고도 근거 없는 느낌, 단지 그런 기분 때문이었다.

태그:#헝가리, #부다페스트, #헝가리의역사, #여행칼럼, #역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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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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