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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방금 지나온 레코드점 입구 진열대에서 내 눈에 비친 것은 분명 간장통이었다. 마치 레코드점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최신곡 CD처럼 그렇게 가장 좋은 위치에 간장이 놓여 있었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 레코드점, 그런데 주인장은 나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부터 한다. 세련된 분위기의 커피숍과 의류점 사이에서 소박하게 자리 잡은 이곳의 간판에는 분명 레코드점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아유~ 말도 마, 지금은 가게 꼴이 말도 아니지만…. 한창때는 하루 매상만 50만 원도 넘었어. 정말이라니까!"

순천시청 건너편 골목,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작은 간판들을 따라가다 보면 낡은 레코드점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벌써 40년째 레코드점을 고수하고 있다는 국제레코드. 재래시장 입구에 생뚱맞게 자리 잡은 이곳에는 오늘도 칠순이 넘은 여주인이 소일거리로 나왔단다. 뭐, 그래도 손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란다.
 
  ‘트와이스, 워너원, 방탄소년단’이라는 글귀가 아니었으면 골동품 음반 전시장으로 착각할 뻔 했다.
  ‘트와이스, 워너원, 방탄소년단’이라는 글귀가 아니었으면 골동품 음반 전시장으로 착각할 뻔 했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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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씨 성을 가진 70세 할매'라고만 밝힌 주인이 40년이 넘는 레코드점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정 씨 성을 가진 70세 할매"라고만 밝힌 주인이 40년이 넘는 레코드점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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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 써 붙인 '트와이스, 워너원, 방탄소년단 있음'이라는 글귀가 아니었으면 그곳은 딱 골동품 음반 전시장 같았다. 가게 밖에 걸린 걸그룹 포스터와 브로마이드는 몇 년이나 지났는지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몇 걸음을 안으로 옮기자 벽에는 최신음반 대신 수십 년의 세월을 담은 엘피판과 카세트테이프만 빼곡하다.

그랬다. 시간이 흐르면 변한다고 하지만 이곳에는 40년을 한결같이 지켜온 아날로그 감성의 온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빛바래고 비닐이 뜯긴 수천 장의 카세트테이프, 총천연색의 표지가 아예 흰색으로 바뀐 엘피판, 20년도 넘은 듯한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DVD들은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것들이었다.

"그래도 여기 와서 신곡 CD 찾는 젊은 사람들도 있어. 또, 뽕짝 찾는 동네 할매들도 있어 굶어 죽을 정도는 아냐."
 

겨우 두서너 마디가 오갔을 뿐이었지만 의욕은 20대 청년 못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 레코드 가게를 유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걱정에 그래도 평생을 했던 일이고 지나가는 젊은 사람들이 사진도 찍고 관심을 가져 오히려 고맙단다.  
 1970년 중반부터 50년 가까이 레코드점을 운영한 정 아무개(70) 사장님. 아직도 찾는 고객이 계속 있다는 게 보람이란다.
 1970년 중반부터 50년 가까이 레코드점을 운영한 정 아무개(70) 사장님. 아직도 찾는 고객이 계속 있다는 게 보람이란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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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와 이름을 묻자 쑥스럽다며 겨우 '정씨 성을 가진 70세 할매'라고만 밝힌 주인은 추억의 곡들을 지체없이 진열장에서 바로 찾아냈다. 거의 매일 이곳으로 출근 도장을 찍어 자매보다 더 가까운 사이라는 팔순의 이웃은 "우리는 말이 필요 없는 사이"라고 운을 뗀 후 "이 집은 요즘에는 뽕짝 테이프보다 간장 맛이 최고"란다.

1970년 중반부터 50년 가까이 레코드점을 운영한 정 할머니는 요즘도 매일 같은 시간에 문을 여닫는다. 음반 파는 것이 본업이지만 수십 년 인연이 이어진 이웃들이 필요하다는 것들, 가령 간장 같은 것들도 챙겨야 한단다. 

"그래도 명색이 레코드점 사장인데 설마 내가 간장 팔려고 문을 열겠어? 이웃들이 시판 간장은 맛이 없다고 하니까 서비스 차원에서 수제 간장을 갖다 놓은 거지, 안 그래? 그래도 내가 2천 장 정도 있는 엘피판은 죽어도 안 팔아. 요즘 엘피판이 인기가 부활해서 꽤 찾아오는데, 1장에 수십만 원 줘도 안 줄 거야. 대신 진짜로 필요한 사람이 나타난다면 한꺼번에 넘기려고 생각 중이야."

아직까지 음반의 역사와 명멸을 기억하는 '시골 레코드 계의 산 증인'인 것이다. 이선희, 조용필, 전영록, 김범룡, 송골매 등으로 이어지던 1980년대 시절 가장 큰 호황을 누렸다는 국제레코드. 중고생들이 주 고객이었던 레코드점은 카세트테이프가 CD로 바뀌던 1990년대를 거쳐 디지털음원의 등장, 원도심 상권의 쇠퇴 과정을 거치며 급격하게 손님이 줄었다.
 
 그나마 손님들이 찾는 카세트 테이프들이다.
 그나마 손님들이 찾는 카세트 테이프들이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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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장의 옷이 엘피판 장식장에 걸려 있다. 요즘 엘피판 인기 부활로 찾는 사람이 꽤 있지만, 1장에 수십만 원을 줘도 팔지 않는단다.
 주인장의 옷이 엘피판 장식장에 걸려 있다. 요즘 엘피판 인기 부활로 찾는 사람이 꽤 있지만, 1장에 수십만 원을 줘도 팔지 않는단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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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곳에서만 40년 넘게 꾸준하게 자리를 지켜왔고 디지털 음원이 대세인 요즘까지 아날로그 감성의 명맥을 잇고 있다. 세월만큼 소복한 정도 쌓였다. 주인장의 20~30년 단골인 오랜 고객들은 아직도 이곳을 찾아온다. 이제는 중년이 된 고객도 나이 들어 가끔 추억을 나누려고 일부러 찾아오기도 한다. 아날로그 추억의 마지막 시그널인 셈이다.

"아직도 찾는 고객이 계속 있다는 게 보람"이라는 그녀, 그래도 가끔 들어오는 젊은이들 덕분에 재미가 있고, 그래서 매일 최선을 다한단다. 요즘의 음반 시장 추세를 묻자 그녀의 눈은 빛이 났고 답변은 거침이 없다.

"그래도 요즘은 뭐니 뭐니 해도 BTS가 최고지. 트와이스나 워너원은 이젠 좀 시들했다고 봐야제. 내가 볼 땐 아마 이 추세 오래 갈 거야, 안 그래?"

평생을 레코드와 함께 한 그녀의 소박한 삶, 앞으로도 오랫동안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길 바란다. 우연이었을까? 레코드점을 나서는 순간, 방탄소년단의 'Magic Shop'이 흘러 나오는 것은.
 
 국제레코드 입구. 순천시청 앞 골목에 있다.
 국제레코드 입구. 순천시청 앞 골목에 있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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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을 연재하며,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