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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고 있는 광개토대왕릉   왕릉 안에서 출토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벽돌에 새겨진 것을 근거로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여기로부터 약 300m 떨어진 곳에 광개토대왕비가 있다.
▲ 무너지고 있는 광개토대왕릉  왕릉 안에서 출토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벽돌에 새겨진 것을 근거로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여기로부터 약 300m 떨어진 곳에 광개토대왕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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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인의 오녀산성에서 시작된 기행단의 고구려 탐구는 오늘 집안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집안은 유리왕이 졸본(홀본, 忽本)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까지 400년 이상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으로 국내성, 환도산성, 광개토대왕비, 태왕릉, 장수왕릉 등등 수많은 역사 유적이 흩어져 있는 곳이다.

흡사 신라의 경주나 백제의 사비(부여)·웅진(공주)과 같은 분위기의 도시이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땅과 마주하고 있는 지형도 공주의 공산성처럼 앞으로 큰 강이 흐르고, 뒤로 높은 산이 병풍처럼 막아주고 있는 형세인 듯하였다.

특히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이 본격화된 이후 우리나라 관광객에 대한 통제가 심하게 일어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기행단이 집안에 머무는 동안에도 노골적인 중국 공안의 통제와 관리소 직원들의 감시가 내내 불편하였다.

아파트 공사에 흔적만 남은 국내성
 
국내성터  둘레길이가 2천700여 미터에 이르렀다고 하나 아파트 공사 등으로 원형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안내판에 나와 있는 (중화)민국 시기 사진으로 그 크기를 짐작해 본다.
▲ 국내성터  둘레길이가 2천700여 미터에 이르렀다고 하나 아파트 공사 등으로 원형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안내판에 나와 있는 (중화)민국 시기 사진으로 그 크기를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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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차 일정은 1일 가이드로 나선 정다경(쌘뽈여고), 유혜진(대흥고), 오은규(부여고), 권우미(서산여고) 학생들의 발제로 시작하였다. 발표를 들은 학생들은 그동안 교과서에만 보던 고구려 시대 사진이나 그림들을 실제로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하루 일정을 시작하였다.

정다경 학생은 '집안에 남겨진 고구려 유적' 유혜진 학생은 '성 축조형태를 통해서 살펴보는 동북공정' 오은규 학생은 '동방의 피라미드 장군총'이라는 주제로 발제를 하였으며 권우미 학생은 '광개토대왕인가? 광개토태왕인가?'라는 주제로 설명하였다.

국내성터는 집안시내 중심에 있다. 이른 아침 국내성 주변은 중국의 흔한 풍경인 새벽시장이 한창 열리고 있었다. 이러한 풍경을 처음 보는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남쪽 성벽을 따라 걸으며 가이드로 국내성의 역사에 대하여 들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국내성터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거의 허물어졌고 지금은 중국정부가 2004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하여 복원한 흔적을 바라볼 수만 있었다.
 
국내성터 주변  이른 아침 국내성 주변은 중국의 흔한 풍경인 새벽시장이 한창 열리고 있다. 사람들 너머로 보이는 돌담이 흔적만 남은 국내성 이다.
▲ 국내성터 주변  이른 아침 국내성 주변은 중국의 흔한 풍경인 새벽시장이 한창 열리고 있다. 사람들 너머로 보이는 돌담이 흔적만 남은 국내성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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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산성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축조한 성이다. 현재 남아 있는 남측 성벽과 망대 등을 기행단 일행이 살펴보고 내려오고 있다.
▲ 환도산성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축조한 성이다. 현재 남아 있는 남측 성벽과 망대 등을 기행단 일행이 살펴보고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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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 탐방을 마친 기행단은 이어서 환도산성으로 이동하였다. 고구려의 도성은 평시에 거주하는 평지성과 유사시에 대피하는 산성이 하나의 세트로 이루어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집안의 평지성은 국내성이고 산성은 인근 3킬로미터 후방에 만들어진 환도산성인 셈이다.

중국에서는 이 산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산성자산성으로 불렀으나 산의 이름이 환도산으로 바뀌면서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위나암성 또는 위나야성(尉那也城)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는 대부분 허물어지고 남측 성벽과 망대 등 일부만 남아있다.

30도 후반을 오르내리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기행단 일행은 망대에 올라가 멀리 보이는 집안시내와 압록강 건너 북한 땅을 바라보았다. 한편, 환도산성에서는 관리소 직원이 계속 기행단을 따라 붙으며 우리들의 행동을 감시하는 통에 아이들이 긴장하기도 하고 (몰래)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하였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그리고 귀족들
 
유리벽 속의 광개토대왕비  414년에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웠다. 1,775자의 비문 속에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고구려사의 보물창고와 같은 존재이다. 근접 사진촬영이 금지된 탓에 기행단 일행은 유리벽 밖에서 기념사진을 하였다.
▲ 유리벽 속의 광개토대왕비  414년에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웠다. 1,775자의 비문 속에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고구려사의 보물창고와 같은 존재이다. 근접 사진촬영이 금지된 탓에 기행단 일행은 유리벽 밖에서 기념사진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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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아이들이 방문한 곳은 그 유명한 광개토대왕비와 태왕릉, 오회 5호분 그리고 장수왕릉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긴장된 모습이 연출된다. 광개토대왕비 관람을 위해 입장을 대기하는 기행단 앞으로 건장한 사복차림의 중국공안 2명이 다가와 가이드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기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어제 이곳을 다년간 충남교육청의 2018 창의융합형 인문학 기행 독립운동단은 이들에게 버스 안에 보관하던 현수막을 빼앗기고, 한국어 설명금지, 사진촬영 금지 등을 통보 받았다고 한다. 그러기에 우리 기행단의 긴장감은 더해졌다.

"현수막은 없느냐,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등등 그들은 우리 기행단의 소속과 행적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환도산성에서는 관리소 직원이 따라 다니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 공안이 나와서 긴장된 분위기를 만들지는 않았다. 다행히 10여 분을 기다린 끝에 입장이 허용(?)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입장한 아이들은 광개토대왕비의 당당한 위용 앞에서 감탄했다. 그동안 교과서 사진 속에서 보아왔던 고구려 역사의 보물창고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어 그러했을 것이다. 현지 안내판에는 광개토대왕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 제19대 왕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묘비로 <해동 제일의 고비>라는 미명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기원 414년에 세워진 묘비는 호태왕의 아들인 고구려 제20대와 장수왕이 부친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높이는 6.39m이고 너비는 1.34m~2m이다. 비석의 벽에는 한자 예서체로 된 비문이 있는데 총 1,775자가 새겨져 있다. 그중에 확인된 한자가 1,590여 자이다.
 
아이들은 광개토대왕비 앞에서 가까이 다가가며 비문의 글자 흔적을 확인하며 자신들이 조사해온 내용을 비교해 보기도 하였으나 자세히 보이지 않자 안타까움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특히 저녁 세미나 시간 발표에서 유리벽 안에 갇혀 있는 현실, 사진도 찍을 수 없고 소리 내어 물어보지도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태왕릉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는 능이다. 대부분 허물어져 내려앉았는데 아직도 관광객의 출입을 허용하고 있다. 유물의 보존보다는 관광수입을 우선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 태왕릉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는 능이다. 대부분 허물어져 내려앉았는데 아직도 관광객의 출입을 허용하고 있다. 유물의 보존보다는 관광수입을 우선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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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기행단은 인근에 있는 태왕릉으로 이동하였다. 그냥 보기에도 그 규모가 대단하였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무너져 내린 모양을 보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여기에서도 현지 설명은 물론 사진 촬영은 금지였다.

능의 높이로 보아 그 크기가 잠시 후 방문하게 될 장수왕능 못지않은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기단의 돌들이 모두 없어져 버리고 흙들도 무너져 내려 잔돌이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그 능을 사람들이 아무 제제 없이 밟고 오르내리는 것이 문화 유산을 파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정부야 관광수입을 위해 개방했다고 하지만 우리나라 관광객들만이라도 소중한 고구려 문화 유산을 보존한다는 생각으로 아래에서 바라보며 설명을 듣고 오는 것은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어차피 올라가 보아야 모두 도굴된 상태에서 새롭게 꾸며놓은 현실이 전부이다).

광개토대왕비와 태왕릉을 둘러본 기행단은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인근에 있는 오회 5호분으로 향했다. 집안 지역의 20여기 벽화 고분 중에게 유일하게 일반인의 관람이 허용된 곳이다. 집안의 고분군은 당시 귀족들의 무덤으로 우리가 그동안 교과서에서 고구려인의 기상을 이야기 할 때 보았던 말 타고 활 쏘는 벽화, 씨름하는 벽화, 사신도가 그려진 벽화 등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5호분 역시 사진촬영은 금지였으며 중국 공안이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유럽 여행단과 같이 들어온 탓인지(그들은 영어로 설명하고 있었음) 가이드의 한국어 설명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그동안 말로만 듣던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그린 벽화 문양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고분에 있는 벽화들  오회 5호분 입구에 마련된 전시관에 설치된 벽화 사진들. 우리 눈에 익숙한 벽화들이 보인다.
▲ 고분에 있는 벽화들  오회 5호분 입구에 마련된 전시관에 설치된 벽화 사진들. 우리 눈에 익숙한 벽화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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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분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한 아이에게 소감을 물었다. "솔직히 더운 날씨에 무덤속이 시원하고 새로운 경험이어서 좋기는 했는데요, 사람들 입김도 나오고 체온도 있는데 저렇게 개방해 놓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지금도 벽에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데 언제 벽화가 지워질지 모르잖아요!"라고 말했다.

장수왕릉이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

오늘 일정의 테마는 주로 광개토대왕과 그의 아들 장수왕에 대한 이야기이다. 광개토대왕의 흔적을 공부한 기행단은 이어서 장수왕릉으로 향했다. 안내판의 자료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장수왕릉은 장군총이라고도 부른다. 현재까지 제일 잘 보존되어 있는 석조 구조로 된 이 무덤은 고려 제 20대 장수왕릉이다. 기원 5세기에 건축되었다. 무덤은 피라미드형으로 건축되어 <동방의 피라미드>라는 미칭(美稱)을 가지고 있다. 무덤은 방단계단식 석실무덤이며 정방형이다. 밑변의 길이는 31,58m, 높이는 13.1m이다. 무덤 칸은 5층, 무덤 윗부분에는 무게가 50여 톤짜리 큰 덮개를 올려놓았다. 무덤의 변두리에 총 11개의 10여 톤짜리 큰 돌들을 각 변에 세워놓았다.
 
 
장수왕릉  상단에 무게 50여 톤의 큰 덮개가 있으며, 무덤의 각 변에는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11개에 이르는 10여 톤짜리 세로형 돌들을 세워놓았다. 사진은 기행단 아이들이 모둠별 보고서 작성을 위해 릉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 장수왕릉  상단에 무게 50여 톤의 큰 덮개가 있으며, 무덤의 각 변에는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11개에 이르는 10여 톤짜리 세로형 돌들을 세워놓았다. 사진은 기행단 아이들이 모둠별 보고서 작성을 위해 릉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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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릉  기행단의 한 학생이 장수왕릉이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라는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하여 사진을 찍고 있다.
▲ 장수왕릉  기행단의 한 학생이 장수왕릉이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라는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하여 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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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릉은 앞서 보았던 태왕릉에 비해서 아주 잘 보존되어 있었다. 기행단 아이들은 릉 앞에서 각 모둠별 보고서에 사용할 사진을 촬영하고 자신들이 조사해온 자료와 가이드의 설명을 비교하며 정리하고 있었다. 특히 일부 무너질 조짐이 보이는 릉의 뒤쪽에 이르러서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 어떠한 대책이 있는지 윤지영 교사의 설명을 들으며 꼼꼼히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석우 단장은 아이들에게 장수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장수왕은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듯 하다. 아버지 광개토대왕을 기리는 크나큰 비석으로 세우고 그 옆에 대단한 크기의 왕릉을 조성해 모셨으니 말이다. (학자에 따라 이견은 있지만) 그가 죽어서까지 다시 이곳으로 와 묻힌 것을 보면 드넓은 자신들의 땅 만주 벌판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렇게 장수왕릉 관람을 끝으로 오늘 집안에서 펼쳐진 기행단의 파란만장한 고구려 탐구는 마무리 되었다. 아이들은 여기 저기 널려있는 고구려 유적에 감탄하기도 하고 공안의 감시와 간섭 등에 기분이 나쁘기도 하였지만 이곳이 우리 조상들이 당당하게 말달리던 땅이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면서 드디어 내일 오르게 될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향하여 백두산 아래 마을 송강하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중국 백산시 조선족 학교  집안을 출발하여 백두산으로 향하는 길에 백산시에 있는 조선족 학교를 들러 아이들이 준비해간 책과 여러 가지 학용품을 선물했다. 중국 학생들이 방학 중이라서 아이들을 만나지는 못했다.
▲ 중국 백산시 조선족 학교  집안을 출발하여 백두산으로 향하는 길에 백산시에 있는 조선족 학교를 들러 아이들이 준비해간 책과 여러 가지 학용품을 선물했다. 중국 학생들이 방학 중이라서 아이들을 만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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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국내성터 옆 새벽시장에서 만난 사람들
 
야외 정육정 중국 아침 시장에서 돼지고기를 팔고 있는 풍경
▲ 야외 정육정 중국 아침 시장에서 돼지고기를 팔고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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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 분식점 중국 새벽시장에서 만두를 찌고 중국식 빵을 튀기고 있는 광경
▲ 야외 분식점 중국 새벽시장에서 만두를 찌고 중국식 빵을 튀기고 있는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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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먹는 가족 중국 새벽시장에서 아침을 먹고있는 가족
▲ 아침먹는 가족 중국 새벽시장에서 아침을 먹고있는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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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사람들 중국 새벽시장에 나온 사람들
▲ 시장 사람들 중국 새벽시장에 나온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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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물고기 중국 새벽 시장에 나온 압록강에서 잡은 물고기
▲ 압록강 물고기 중국 새벽 시장에 나온 압록강에서 잡은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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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사람들 중국 새벽시장 사람들
▲ 시장 사람들 중국 새벽시장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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