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스스로를 위한 의미있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계간지 <딴짓>의 발행인인 프로딴짓러가 소소하고 쓸데없는 딴짓의 세계를 보여드립니다. "쫄지 말고 딴짓해!" 밥벌이에 지친 당신을 응원합니다.[편집자말]
 수많은 사람 중 유일한 누군가가 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 중 유일한 누군가가 될 수 있을까
ⓒ pixabay

관련사진보기


예전에 한 판소리 소리꾼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은 이름조차 아득하지만, 그가 한 이 말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제가 원하는 거요? 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누구누구가 부른 춘향가가 듣고 싶다' 이렇게요. 그냥 '춘향가가 듣고 싶다'가 아니라요. 제가 부른 그 춘향가를, 제 목소리를 원했으면 해요."

소리꾼과는 별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데 그 말이 왜 그렇게 와닿았을까? 우리가 아는 '춘향가'와 '내 목소리로 부른 춘향가'가 다르다는 그 당연한 말에 엄지 척! 좋아요를 백 번 눌러주고 싶었다. 그래, 당신 목소리는 유일하지. 이 세계에서 가장 유일하고 말고. 나는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을 그 판소리꾼에게서 봤다.

한 대기업 지역본부의 영업팀 대리로 살고 있던 때였다. 나는 언제라도 대체될 수 있는 소모품,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해도 회사가 굴러가는 데 하나 문제가 없는 조직의 부품이었다. 내 업무 능력이 아무리 뛰어난다 한들 이 거대한 조직에 예기치 않은 큰 이윤을 남겨줄 순 없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나를 대체할 터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대부분은 '머릿수를 채우는 일'이었다. 임직원 수 3951명 중 마지막 숫자 1을 채우는 일. 국가의 소중한 노동자원이자 경제활동인구 중 하나가 되는 일.

 
 대체불가능한 무언가가 되고 싶은 욕망
 대체불가능한 무언가가 되고 싶은 욕망
ⓒ pixabay

관련사진보기


대체 불가능한 무언가가 되고 싶은 갈망을 가진 것이 나뿐일까. 사람은 누구나 특별하고 유일한 무언가가 되고 싶어 한다. 이런 나의 성토에 한 친구는 이런 혜안을 내놓기도 했다.

"꼭 회사에서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어야 해? 회사에서는 그냥  N분의 1로 살고 네가 꾸리는 가정에서 유일한 무엇이 되면 안 되는 거야?"
   
현명한 조언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산다. N분의 1이 되면 어떤가? 가족이 아니더라도 취미생활에서 의미를 찾을 수도 있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게 '퇴근 후 작문'을 권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그렇게 받아들이기엔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24시간 중 회사에 있는 시간은 평균 10시간이 조금 넘었다. 출퇴근하는 시간과 출근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일주일 중 5일, 365일 중 290일을 회사를 위해 써야 했다.

그럼 그걸 빼고 남은 내 삶은 얼마나 될까? 그럼 나란 사람은 얼마의 시간 동안 진짜 내 삶을 산 것일까? 그 시간을 눈감고 지내기엔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갈증이 너무 컸다.
회사에서 대체 불가능한 무언가가 될 수 있을까? 그 누구라도?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면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될까? 

회사는 내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보편적으로 하는 노력은 '능력 개발'이다. 실제로 일을 잘하는 사람은 환영받는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일을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차이는 있다. 일을 잘하면 다른 부서에서도 그를 스카우트해 가고 싶어 할 테고, 이직을 하기에도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일을 잘해도 큰 기업에서는 '개인의 능력'이 아닌 '시스템'이 이윤을 만든다. 관료화된 기업일수록,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더 그렇다. 내가 있던 회사는 업계에서 절반 이상의 점유율을 가진 독과점에 가까운 기업이었다. 게다가 웬만해서는 소비가 크게 늘지도 줄지도 않는 제품을 생산했다.  

때문에 회사에 들어온 한 명이 천재적인 재능을 가져 회사의 순이익을 급성장시키는 일은 드물었다. 안정적인 사업구조를 갖춘 대기업이 대부분 그럴 것이다. 기술직이 아닌 일반 사무직은 더 그렇다. 설사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 조직이 그를 붙잡는다고 하더라도 그가 회사를 그만둔다고 해서 조직이 휘청거리진 않는다. 기껏해야 대체 인원이 오는 동안 부서의 몇 명이 조금 더 고생을 하는 정도다.  

규모가 작은 회사는 다르지 않을까? 대기업 퇴사 후 직원이 열다섯 정도인 작은 사회적 기업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는 그런 기대도 있었다. 축제를 기획하는 회사였다. 이곳에서는 어쩌면 한 명 한 명이 유일무이한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규모가 작다 보니 한 명 한 명의 역량에 따라 회사의 매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폭은 더 컸다. 일을 내가 따오는 경우도 있었다.

 
 능력이 뛰어나면 조직에서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능력이 뛰어나면 조직에서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pixabay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회사는 내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은 '문화예술팀 팀장'이었지 '나'는 아니었다.  

사실 '능력'보다 중요한 건 '사회성' 혹은 '친화력'이나 '융화력'이었다. 조직은 '능력 있는 독불장군'을 원하지 않았다. 일의 우선순위를 재빠르게 파악하고 때로는 적당히 쳐내기도 하는 노하우가 더 중요했다. 내가 대표라도 그런 사람을 쓸 것 같았다.  


연륜이 쌓여서 이 회사에 대해 잘 알게 되면 회사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 손가락을 화면에 몇 번 두드리는 것만으로 세상의 웬만한 정보는 다 알 수 있는 요즘엔 노인의 역할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조직은 다르지 않을까? 거래처와의 관계, 이 업계의 역사, 회사 매뉴얼에는 없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대처법은 회사에 오래 남은 사람이 더 잘 알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노하우는 자주 무시된다. 경력이 쌓일수록 인정받는 기술직은 드물다. 젊은이들은 점점 높아지는 스펙과 능력으로 치고 올라온다. '의전하는 법'이나 '애매한 부서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법'은 연륜이 쌓인 사람이 더 잘 알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만이 가진 유일한 재능은 아니다. 게다가 그런 것에 의지해 점점 '꼰대화'되어가는 스스로까지 경계해야 한다. 사람 때문에 휘청거리는 조직은 건강하지 않다.  


"회사가 무너져도 연락하지 않을게요!"

큰 회사에 다닐 때 누가 휴가라도 갈라치면 내가 하는 덕담이었다. 회사 일은 완전히 잊고 푹 쉬다 오라는 의미에서 건넨 말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꼭 좋은 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이 없어도 회사가 잘 굴러간다는 건 그 사람의 존재가치를 무시하는 말로 들릴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어쩌면 회사 같은 '조직'에서 '나'라는 개인이 유일무이하길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한 사람에 의해 유지되는 조직은 건강하지도 않거니와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기업이 가진 다양한 자원 중 가장 변할 가능성이 큰 '인적자원'에 의지하는 건 위험한 행동이다. 회사가 '나'가 아니라 '회사원'이 필요한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대체불가능한 무언가가 될 수 있는 곳

 
 딴짓시스터즈. 왼쪽부터 장모연, 황은주, 박초롱
 딴짓시스터즈. 왼쪽부터 장모연, 황은주, 박초롱
ⓒ 박초롱

관련사진보기


그렇다면 영영 '대체불가능한 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할까? 가족 외에 내가 대체불가능한 무언가로 존재한다고 느낀 건 <딴짓>이 유일했다. <딴짓>은 세 명의 여자가 함께 만드는 계간 독립 잡지다. 출판사로서 사업자도 있고 안국동에 문화공간도 있지만 아직 각자 월급을 가져갈 만큼 성장하지는 못했다.

'회사'라고 하기에는 서로의 관계가 너무 친밀하고 '사교모임'이라고 하기에는 수익성을 목표로 하기에 적절치 않다. 회사와 동아리와 가족의 중간 즈음이랄까. <딴짓>에 대한 애정은 다니는 회사보다 크다. 잡지를 같이 만드는 딴짓시스터즈를 향한 애정 역시 일반 직장 동료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출판사 <딴짓>에서 나는 완전히 나로서 존재한다. 게다가 <딴짓>을 만드는 세 명의 여자인 딴짓시스터즈는 결코 대체 가능하지 않다. 개인의 특성이 조직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왜 <딴짓>은 다른 조직과 달랐을까? 첫째, 각자 생계수단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일 것 같다. <딴짓>에서 편집과 섭외를 맡는 황은주씨는 출판편집자라는 본업이 있다. 디자인을 담당하는 장모연씨 역시 마케터라는 직업뿐 아니라 디어마이드레스라는 개인 프로젝트를 병행한다.

나 역시 책 읽는 술집 '낮섬'의 주인이자 축제기획자이기도 하다. <딴짓>에서 나오는 수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익이 생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생계를 위협받지는 않는다. 계란을 여러 바구니에 담은 덕이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체성은 이곳에 있다. 다양한 일을 하지만 그중 가장 나를 잘 정의하는 것이 있다면 <딴짓>이다. 프리랜서의 고독함을 나는 <딴짓>이라는 소규모 조직에서 위로받는다. 속하는 집단이 있다는 것은 안정감과 소속감을 준다.  

셋째, 삶을 대하는 태도와 가치가 맞는다. 삶의 목표까지 같을 수는 없겠지만 <딴짓> 구성원은 추구하는 가치가 비슷하다. 또한 위아래가 없다 보니 서로의 말을 경청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당연하다. 가끔 서로의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서로가 말이 안 통한다거나 다른 마음을 품고 있어서 고집을 피우는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가기 때문이다.  


나의 가치를 독립적으로 인정받으면서도 대체불가능한 누군가가 되는 방법. <딴짓>과 같이 경제적으로는 느슨하고 정신적으로는 단단한 조직을 꾸리는 것이 그 해답이라고 확답하긴 어려울 것 같다. <딴짓>은 이제 막 3년이 넘은 신생 출판사인 데다 큰 수익을 창출하는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딴짓의 한옥공간 '틈'
 딴짓의 한옥공간 "틈"
ⓒ 박초롱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요즘 <딴짓>은 보다 독립적인 조직이 되기 위해 발돋움하고 있다. 안국동에 '공간 딴짓'을 오픈하고 정기적으로 우리 세대의 고민을 논하는 '어딴론(어떻게 딴짓해야 할까 토론하는 모임)' 파티를 개최하기도 한다. 규모가 큰 사업들을 맡으며 '모임'에서 '회사'로 조금씩 이동 중이다. 딴짓시스터즈 역시 '딴짓'의 성장에 따라 삶의 무게추를 조금씩 딴짓으로 옮기고 있다.  

이 실험이 성공할지, 혹은 처참하게 실패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초기 자본금이 거의 없는 우리가 모두 <딴짓>이라는 배로 무사히 옮겨올 수 있을까? 우리는 한 발자국씩 조금씩 떼어보며 이 배가 침몰할지 아닐지를 가늠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실험의 결과를 공유해보려 한다.

언젠가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무사히 <딴짓>이라는 새 배로 옮겨왔다고. 처음엔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침몰할 것 같은 나뭇조각이었지만 지금은 나룻배 정도는 되었다고. 그러니 당신도 타도 된다고 말이다.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글로 밥 벌어 먹고 사는 프리랜서 작가 딴짓매거진 발행인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