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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경선 교수의 문하생들과 함께 강화도로 헌법세미나 여정을 다녀왔다.

인천에서 강화대교를 통해서 강화도에 도착한 후 처음 찾은 곳은 연미정이다. 연미정은 월곶리에 있는 정자이다. 월곶리는 임진강와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월곶리가 제비 꼬리 지형과 닮았다. 그래서 이 정자의 이름을 제비 연(燕)자에 꼬리 미(尾)자를 붙여서 연미정이라고 부른다. 연미정에서는 북한 지역도 보인다.
 
 연미정
 연미정
ⓒ 여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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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강화읍내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읍내에 있는 여러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우리는 대몽항쟁기 시절 고려 국왕이 머무른 강화궁지, 왕실 서적을 보관하던 외규장각, 동서양 건축법이 조화를 이루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을 찾았다.

우리는 강화도와 교동대교로 이어진 교동도로 향했다. 교동도의 이름은 교동도에 교동향교가 있어서이다. 교동향교는 고려 시대인 1127년에 창건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이다.
 
 교동향교
 교동향교
ⓒ 여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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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박을 한 다음날 우리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운요호 사건을 겪은 곳인 정족산성,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을 둘러보았다. 병인양요는 1866년 병인년에 프랑스가 일으킨 소란으로 그 이름을 병인양요로 지었으며, 신미양요는 1871년 신미년에 미국이 일으킨 소란으로 그 이름을 신미양요로 지었다. 운요호 사건은 1875년 일본이 군함인 운요호를 끌고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을 말한다.

조선 말기에는 부정과 부패로 정상적인 국가운영이 불가능하였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서원을 철폐하고, 경복궁을 복원하는 사업을 벌였다. 그는 서양과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면서, 쇄국정책을 펼쳤다.

흥선대원군이 1866년 기독교인을 학살한 것을 빌미로, 프랑스는 강화도를 침공한다. 프랑스 군대를 물리친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며, 전국에 척화비를 세운다. 척화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강화도 척화비
 강화도 척화비
ⓒ 여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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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평양 대동강에서 조선군은 미국상선인 제너럴셔먼호를 파괴한다. 미국은 1871년에는 이를 빌미로 강화도를 침공한다. 프랑스와 미국은 곧 물러나지만,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 조선과 불평등한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는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을 겪은 곳이 강화도의 초지진이다.

성벽이 보존된 초지진 옆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있다. 그 소나무에는 당시 포탄자국이 남아있다. 아직 소나무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듯이, 우리의 근현대사도 그 상처가 쉽사리 치유되지는 않는 듯하다.
 
 강화도 초지진
 강화도 초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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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 우리는 국제정세를 읽는 능력도 없었으며, 외국과의 교류에도 서툴렀다. 그 결과로 임오군란(1882년), 갑신정변(1884년), 동학농민전쟁(1894년), 청일전쟁(1894년), 갑오개혁(1894년), 을미사변(1895), 아관파천(1896년), 대한제국성립(1897년), 러일전쟁(1904년), 을사늑약(1905년), 국권침탈(1910년)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거치게 된다.

지금의 냉혹한 국제정세에서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과거의 경험에서 찾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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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힘이 되는 생활 헌법(좋은땅 출판사) 저자, 헌법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