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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품 한 점을 독자와 함께 감상하며 그림 속 숨어있는 이야기와 작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보려고 합니다. 미술전문가의 입장보다는 관람객 입장에서 그림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편집자말]
 
 검은 옷을 입고 오페라 관람석에서(메리 커셋,1880.보스톤 파인아트 뮤지엄)
 검은 옷을 입고 오페라 관람석에서(메리 커셋,1880.보스톤 파인아트 뮤지엄)
ⓒ 보스톤 파인아트 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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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오페라 안경을 들고 관람석에 앉아 뭔가를 보고 있다. 멀리서 그녀를 훔쳐보는 남자가 있다. 오페라는 관심 없고 잿밥에만 사심 가득한 이 남자는 19세기, 공연보다는 다른 목적으로 오페라 극장을 찾은 파리 부르주아 남성의 흔한 모습이다.

옆에 앉은 여인은 일행이 아닌가. 누군가의 앞을 가로막으면서까지 몸을 쑥 빼고 노골적으로 보는 폼이 무례하다. 은근한 풍자가 매력적인 이 그림은 메리 커셋(1845-1926)이 그린 '검은 옷을 입고 오페라 관람석에서'라는 작품이다.

이 시절 남자 화가들이 그린 여자의 모습은 주로 가슴이 파인 드레스에 화려하게 치장하고 관람자에게 '보여지는 존재'인데, 메리가 그린 이 여인은 주체적으로 '보는 존재'다. 메리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전에 합류한 유일한 미국 출신 화가다. 마네, 모네, 르노아르, 피사로 등 유명한 인상파 화가들 사이에 활동한 여성 화가는 단 3명.

마네의 동생과 결혼한 베리트 모리조, 동판화가 펠릭스 브라크몽의 아내 마리 브라크몽, 그리고 독신녀 메리 커셋. 여성의 미술활동이 쉽지 않은 그 시절, 유일하게 화가 남편이나 가족을 두지 않고도 성공한 화가라 할 수 있다. 그럴 수 있었던 동력은 재능과 열정 그리고 경제력이다.

메리와 드가

메리는 미국 피츠버그 근교 재력가 집안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 나이 7살 때 당시 상류층 사이 유행이던 유럽여행을 4년 동안 했다. 이 덕택으로 그녀는 독일어, 프랑스어, 이후에는 스페인어, 이탈리아어까지 4개 국어를 섭렵한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파리 국제 박람회에서 본 쿠르베의 그림에 깊은 감동을 느낀 메리는 화가가 되리라 맘을 먹는다.

하지만 그 결심을 들은 그녀의 아버지는 "차라리 네가 죽는 것이 낫겠다"라고 말하며 화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그럼에도 15세에 펜실베이니아 아카데미에 입학, 4년간 미술교육을 받지만 이미 유럽 대가들의 그림을 경험한 그녀의 눈에 진부한 아카데미 교육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졸업을 앞두고 그녀는 기어이 파리로 간다.

루브르에서 작품들을 모사하고 장 레옹 제롬에게 개인 레슨을 받으며 실력을 쌓아갔다. 무명의 화가가 타국에서 이름을 알리거나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살롱전'에 작품을 내서 당선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 메리는 당선이 될 만한 즉, 심사위원들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리려 노력했다. 그녀의 작품이 선정되기도 하고 탈락되기도 하면서 그녀는 더 이상 당선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외려 "나는 이제 심사위원의 의견 없이도 독자적으로 작업할 수 있다. 나는 누가 과연 진정한 스승인지도 알게 되었다. 마네, 쿠르베, 드가가 바로 그들이며 틀에 박힌 예술은 이제 싫다. 나는 새로 현실을 시작한다"라고 말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찾아간다. 성장한 것이다.

베리트 모리조에게 마네가 있었다면 메리에게는 드가가 있었다. 다음은 메리가 드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고 충격에 빠져 친구이자 콜렉터인 헤브마이어에게 쓴 편지다.

"뷸러바스 오스망 화랑 창문에 전시된 드가의 파스텔화를 처음 보았을 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나는 내 코가 납작해질 정도로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그의 작품에 열중했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을 바꿔놨어요. 난 예술을 보았고 곧 나는 내가 본 그것을 원하게 됐습니다."

드가 역시 그녀의 작품 '코르티에 부인의 초상'을 보고 "누군지 몰라도 나와 같은 것을 느끼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작품만 보고도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것이다. 여성 혐오로 널리 알려진 드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성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과 도움을 준다. 수잔 발라동의 그림도 매입해주며 그녀가 화가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스승이 되어주었고 메리와는 죽을 때까지 스승이자 연인, 동지적 관계를 유지한다.

미혼남녀가 서로의 작품에 경외심을 가지고 때때로 공동 작업도 하며 수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어찌 '썸'이라 불릴만한 일이 없었겠는가. 둘은 사소하거나 심각한 문제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며 드가가 죽을 때까지 40여년 서로 곁에 남았다.
 
 왼쪽-루브르에서 메리 커셋(에드가 드가,1880년경,개인소장) 오른쪽-카드를 손에 쥔 메리 커셋의 초상(에드가 드가,1884, 워싱턴 스미소니언 국립초상화 미술관)
 왼쪽-루브르에서 메리 커셋(에드가 드가,1880년경,개인소장) 오른쪽-카드를 손에 쥔 메리 커셋의 초상(에드가 드가,1884, 워싱턴 스미소니언 국립초상화 미술관)
ⓒ 워싱턴 스미소니언 국립 초상화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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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작품은 드가가 그린 메리의 초상화다. 왼쪽의 그림은 '루브르에서 메리 커셋'이라는 작품이다.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메리의 뒷모습을 그렸다. 우산에 기대어 그림을 보고 있는 뒷모습이 소위 '엣지'가 있다. 뒤에 앉아서 전시 도록을 읽고 있는 여자는 언니 리디아다.

오른쪽은 '카드를 쥐고 앉아있는 메리 커셋의 초상'이다. 메리는 이 그림을 매우 부끄러워했다. 오죽하면 판매상에게 이 작품의 모델이 누군지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왼쪽 그림이 4년 먼저 그려졌는데 나는 이 그림을 보고 드가가 밀당의 대가이거나 겁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세련되게 그렸다가 품위 없이도 그렸다가 '밀고 당기다' 선을 긋는 느낌이랄까. 마치 '다가오지 마, 멀어지지도 마' 하는 것 같다.

엄마와 함께 있는 아이

나이도 비슷하고 집도 가까웠던 베리트와 메리는 둘 다 좋은 집안과 인상파에 몸을 담고 있는 여자화가라는 공통점으로 통하는 게 많았다. 좋은 경쟁자이자 친구이기도 한 둘은 마네, 드가와 함께 어울리며 때로는 모델이 되어 주기도하고 서로의 작품에 영향을 주고받는다.

메리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미국에 알리는 데 적극적이었다. 스스로도 많은 작품을 매입했으며 주변의 인맥을 이용해 많은 그림들을 미국의 콜렉터들에게 팔아주었다.

그 덕에 그림을 판매한 화가들도 한숨 돌릴 수 있었고 미국의 인상주의도 자연스레 더불어 발달한다. 미국 미술관에 프랑스 인상주의 그림이 많이 있는 까닭이며 이는 전적으로 메리의 공이다. 하지만 메리는 자신의 그림을 홍보하거나 판매하는 데 열을 올리지는 않았다.

당시 여자가 그릴 수 있는 주제는 한정적이었다. 가족 아닌 남자를 모델로 그릴 수 없었고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남편을 그릴 수도 없다. 그러니 자연스레 자매들과 조카들이 그림에 등장한다.

주로 모델이 되어주었던 언니 리디아가 병으로 사망하자 큰 슬픔에 빠진 메리는 허전한 마음을 '엄마와 함께 있는 아이' 시리즈를 그리며 달랬다. 1880년대 이후로 그려진 그림의 주제로 그녀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대부분의 그림들이 이 시기에 그려졌다.
 
 엄마와 두 아이들(메리 커셋,1906,개인소장)
 엄마와 두 아이들(메리 커셋,1906,개인소장)
ⓒ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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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그린 일련의 시리즈들은 다른 어느 작가와도 확연히 구별된다. 굉장히 촉각적이다. 아이의 따듯한 살결이 닿는 느낌이 든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그래서 마음이 따듯해지다가 때론 울컥하게 만드는 작품들.

유명한 그림들이 많지만 특히 나는 이 그림을 좋아한다. 엄마의 시선은 작은 아이를 향해있고 작은 아이의 시선은 큰 아이를 향해있다. 큰아이의 시선은 작은 아이에게 있지만 결코 엄마를 뺏기고 싶지 않은 듯 엄마에게 기대어 엄마를 찜하듯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다.

아이 둘을 키워본 사람이면 이 오묘한 삼각관계를 완벽히 이해할 것이다. 내 감정은 큰아이에게 이입된다. 엄마의 사랑을 빼앗긴 아이의 슬픔이 동생을 바라보는 부러운 눈빛으로 나타나있다. 마음이 찡하다.

메리는 특유의 섬세한 감각으로 사소한 장면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표현했다. 이즈음 메리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를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았다. 결혼과 출산보다는 예술을 택한 후회와 자기연민에 관하여. 하지만 어느 길을 간들 후회 없는 인생이 있겠는가.

메리는 1911년 당뇨와 류머티즘, 그리고 신경통, 그리고 백내장 진단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작품을 쉬지 않았던 메리는 1914년 거의 장님 판정까지 받고 붓을 놓는다.

그 와중에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하여 11개의 작품전시를 했고 전쟁에 피난 온 벨기에 난민들을 돕는다. 외로움과 우울증, 신경쇠약에 시달렸던 메리는 1926년 당뇨의 합병증으로 눈을 감는다.

덧붙이는 글 | 참고서적 : 인상주의자 연인들(김현우, 마음산책)/메리커셋 작품 성향의 변천연구, 김현화(석사학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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