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죽어야 한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고로 '죽음은 삶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명제가 가능하다. 죽음이 없다면 우리가 뜨겁게 '지금'과 '여기'를 살 이유도 없다. 그래서일까, <트로이>에서 페터슨 감독은 아킬레우스의 입을 빌려서 말한다.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하기에 치열하게 살아야 하고, 그런 이유로 인간은 신보다 아름답다. 늙지도 죽지도 않는 불멸의 신들은 인간을 부러워한다."

죽을 운명의 인간이 영생불사의 신을 부러워한다는 것이 세간의 통념이다. <트로이>의 감독은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죽음이 없는 신들의 삶에는 간절한 소망이나 기대, 처절한 패배와 불가피한 전락, 위대한 승리와 성취 같은 것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반면에 제한된 시공간을 사는 인간은 매순간을 마지막처럼 살아간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골머리 앓는 한국사회는 오직 '삶'의 문제에만 골몰한다. 태어나는 새로운 생명의 미래와 죽어가는 노년의 사멸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에 함몰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오로지 지금과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까닭에 미래를 기획하는 것도, 과거를 돌아보는 것도 기대 난망이다.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마지막 지점을 물어보면 병원이나 요양원 같은 시설이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생의 최후순간에 가족이 함께 한 경우는 드물다.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선진국 범주에 들어가는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21세기 인류가 맞이하고 있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노화와 죽음

 <어떻게 죽을 것인가> 책표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책표지
ⓒ 부키

관련사진보기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우리가 항용 놓치고 있는 노화와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 우리에게 허여된 나날의 시간 속에서 누군가는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망각하고 있을 뿐이다. 하버드 의대교수 아툴 가완디는 이 문제를 다각도로 제시하면서 우리에게 노화와 죽음에 대한 사유와 재인식을 요구한다.

그에 따르면, 1790년 미국의 65세 노인비율은 2%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4%에 이른다고 한다. 도이칠란트와 이탈리아, 일본에서 노인비율은 20%를 넘는다. (한국의 노인비율은 고령사회에 해당하는 14%에 이르고, 2025년에는 20%를 넘어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이라 한다.) 노인이 급증한 원인과 현상을 가완디는 이렇게 지적한다.

"10만 년 인류 역사에서 최근 수백 년을 제외하면 인간의 평균수명은 30세 이하였다. 영양과 위생, 의료가 개선되면서 1900년 평균수명이 50세, 1930년대에는 60세로 높아졌다. 유럽의 80세 이상 노인 가운데 10%만 자식들과 동거하며, 절반이상의 노인이 홀로 살아간다. 현대화가 강등시킨 것은 노인의 지위가 아니라 가족이다." (41-59쪽)

오늘날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소속국가 거주자들의 평균수명은 80세를 넘나든다. 이런 추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며, 인류는 '길가메시 프로젝트'로 불멸의 수준까지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노화와 죽음이라는 문제를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책에서 가완디는 노화에 대해서 단호하고 확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노화과정은 점차적이면서도 가차 없이 진행된다. 나이 들면서 우리는 그저 허물어질 따름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필립 로스는 <에브리맨>에서 '나이가 드는 것은 투쟁이 아니다. 대학살이다.' 라고 말한다." (49-94쪽)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의료 선진국이라 할 미국조차 노화와 죽음을 담당할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한다. 노인병 전문훈련 과정을 마치는 의사가 1년에 300명 미만이며, 97%의 의대생이 노인병학 과목을 전혀 수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현대의학과 의사들은 노화와 죽음을 직시할 태세를 전연 갖추지 않은 셈이다.

누구를 위한 요양원인가
 삶의 마지막 단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사회가 낳은 기형적인 결과가 요양원인 셈이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사회가 낳은 기형적인 결과가 요양원인 셈이다
ⓒ unsplash

관련사진보기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은 혼자 화장실에 갈 수 있는 거예요!" 가완디가 만난 어느 할머니의 말이다. 단언컨대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할머니가 하는 말의 참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 적잖게 나이 먹은 나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대표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낙상이다. 노인들은 왜 넘어질까?!

가완디는 균형감각 쇠퇴, 4가지 이상의 처방약, 근육약화를 그 원인으로 제시한다. 나이 들면서 점차 약해지는 균형감각과 여러 가지 질환 때문에 자꾸만 늘어나는 처방약. 그리고 활동량 부족과 불균형한 식단으로 인한 근육약화가 낙상의 원인이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위한 시설로 우리가 맨 처음 떠올리는 것은 요양원이다.

요양원은 미국의회가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환자들을 수용하는 별도의 시설건립 자금을 제공하도록 결정한' 1954년이 원년이다. 하지만 요양원은 거기 들어가야 하는 사람들의 바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완디가 요양원에서 만난 앨리스 할머니는 말한다. "여긴 집이 아니야. 그냥 집을 흉내 낸 거야."

지은이는 '군대 훈련소, 고아원, 정신병원과 함께 감옥과 요양원은 사회와 단절된 전체적인 기관의 전형'이라는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의 저작 <정신병원>을 인용한다. 왜냐하면 요양원에는 노인들에게 어떤 삶을 원하는지 묻는 사람 하나 없기 때문이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인간은 누구나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데도 말이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사회가 낳은 기형적인 결과가 요양원인 셈이다. 시설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요양원에 수용된 노인의 심사를 깊이 있게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런 인식에서 출발한 가완디는 충격적인 결론에 이른다.

"요양원은 노인들이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다." (167쪽)

최후를 어떻게 맞을 것인가
 세상에 좋은 죽음은 없으며, 따라서 우리의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최후의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세상에 좋은 죽음은 없으며, 따라서 우리의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최후의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 unsplash

관련사진보기


지은이는 집처럼 보이지만 결코 집이 아닌 요양원의 가장 유력한 대안이 가족이라고 한다. 딸이 하나라도 있다면 노인들에게는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그와 아울러 늙고 쇠약해져서 죽음에 다가가는 순간에도 인간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우리는 깊이 숙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간과 더불어 찾아오는 질병과 노화가 야기하는 공포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라, 고립과 소외에 대한 두려움이다. 하지만 요양원은 그런 문제에 심층적으로 접근하지 못한다. 가완디에 따르면, 요양원은 무료함, 외로움, 무력감이라는 세 가지 역병(疫病)의 공간이다. 노인들은 죽음보다 깊은 고독과 무기력의 공간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된 것은 의료 전문가들이 인간의 마음과 영혼이 아니라, 의학을 통한 신체건강 복구에만 집중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대를 이어 전해진 노화와 죽음에 대한 경험과 전통을 무시하고, 의학의 힘을 과신한 현대의학에 책임을 묻는 것이다. 지은이가 도달하는 결론은 간명하고 설득력 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면 아군이 전멸할 때까지 싸워서는 안 된다!" (286쪽)

죽음은 죽어가는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대사다. 오늘날의 인간들은 '죽는 자'의 역할이 마지막 시점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지 잊어버렸다는 것이 가완디의 생각이다. 세상에 좋은 죽음은 없으며, 따라서 우리의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최후의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지은이는 호스피스와 존엄사 같은 방식을 제시한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제어할 수는 없지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축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생명연장의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의학적 시도는 그다지 유용하지도 않고, 죽어가는 자와 가족들에게 의미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중환자실의 집중치료를 받았을 경우, 마지막 일주일에 경험한 삶의 질은 인위적인 개입을 받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나빴다." (239쪽)

우리는 현대의학이 무한정 발전하여 노화와 죽음이 없는 '호모 데우스'가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생명은 언젠가 작별을 고하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지만 최후까지 아름답고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유의미하다는 결론에 동의해야만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 2017.



댓글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인터넷 상에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새로운 세상 만들기에 참여하고 싶어서 회원으로 가입하고자 합니다. 개인 홈페이지에 영화관련 글들을 대략 40편 가까이 올려놓고 있으며, 영화와 결부된 분야에 관하여 글을 썼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