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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권력이 '갑작스레' 뭔가 규제하려 한다면,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대중을 위해 그러는 경우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적지 않다. '낙태죄 처벌'도 바로 그런 경우다.

낙태죄 처벌은 우리 역사에서 보면 '갑작스러운' 일에 속한다. 처벌 규정이 생긴 것도 100여 년밖에 안 된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산모나 태아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른 뭔가를 위한 이유였다.

지난 8월 17일, 보건복지부는 낙태 시술과 관련해 보다 강화된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을 내놨다. 형법 제269조는 낙태를 선택한 여성과 그 관련자에 대해 징역형과 벌금형을 규정했고, 제270조에서는 낙태를 시술한 의료인에 대해 징역형과 자격정지를 규정하기도 했다.

이 형법 규정을 포함해 의료법 및 '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 등을 근거로 삼아, 복지부는 8월 17일 자로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을 개정했다. 개정된 규칙에 딸린 별표(별도의 도표) 규정을 통해, 복지부는 낙태 시술을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포함시켰다.

'비도덕적' 딱지 붙이려는 보건복지부

지난 8월 14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 개정·시행 내용. 아래는 별표로 규정한 비도덕적 진료행위 개정안 상세 내용.
 지난 8월 14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 개정·시행 내용. 아래는 별표로 규정한 비도덕적 진료행위 개정안 상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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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에 개정된 별표 규정에서는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대해 자격정지 1개월을 부과한다고 했을 뿐, 낙태 시술을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포함시키진 않았다. 이에 비해 개정된 별표 규정에서는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형법 제270조를 위반하여 낙태하게 한 경우'를 명확히 포함시켰다.

자격정지 기간은 종전대로 1개월이지만, 낙태 시술을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명시적'으로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처벌을 강화한 셈이 됐다. 이렇게 되면 시술이 비도덕적인가 아닌가를 두고 국가기관이 고심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처벌이 쉬워진 셈이다.

이에 맞서 여성과 의료인들의 반발이 거세졌다. 지난 8월 26일에는 서울시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여성 125명이 낙태약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을 복용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낙태약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을 복용한 것은, 명확하게 낙태약을 복용하면 처벌 법규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임신 중단은 여성이 처한 사회적 조건을 막론하고 당연히 보장돼야 할 권리"라면서 낙태죄 폐지를 촉구했다.

산부인과 의사들도 반발했다. 지난 8월 28일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낙태 시술 전면 거부'를 선언했다. 이들은 "저출산의 가혹한 현실을 마다하지 않고 국민의 건강권을 지키며 밤을 새우는 산부인과 의사가 비도덕적인 의사로 지탄을 받을 이유는 없다"라면서 "입법 미비 법안을 앞세워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비도덕적 진료행위 유형으로 규정하고 처벌하겠다는 정부의 고집 앞에서 1개월 자격정지의 가혹한 처벌을 당할 수도 없다"라고 주장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가 '낙태 규제'에 대한 복지부 방침에 협력하거나, '낙태죄 위헌'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임신중절수술에 대한 합법화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헌법재판소에서 낙태 위헌 여부에 대한 헌법소원 절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정부는 당장의 입법 미비 해결에 노력하고 사회적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의사에 대한 행정처분을 유예하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반발 여론이 거세지자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8월 29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낙태죄에 대한 헌재 판결이 있을 때까지 처분을 유예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8월 26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 125명이 경구용 자연유산 유도약인 '미프진'을 복용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지난 8월 26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 125명이 경구용 자연유산 유도약인 '미프진'을 복용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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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를 처벌한다? 인류 역사 흐름에서는 비교적 최근 일

공권력이 낙태를 규제하고, 대중이 맞서는 풍경은 인류 역사의 흐름에서 봤을 때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낙태는 처벌 대상이 아니었다. 임신부뿐 아니라 조력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관련 규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성을 폭행해 낙태하게 만드는 행위는 법으로 처벌됐다. <경국대전> 형전과 더불어 형법 기능을 수행한 <대명률직해>(1395) 형률에 이런 규정이 있었다.

"남의 힘줄을 끊어버리거나, 양쪽 눈을 모두 다치게 하거나, 낙태되게 하거나, 칼로 날카롭게 세운 날로 사람에게 상해를 입혔을 경우에는, 가해자를 장형(곤장) 80대에 처한 뒤 도형(징역) 2년에 처한다."

현행 대한민국 형법 제258조에는 중상해죄 처벌 규정이 있다. 남을 상해해 생명에 대한 위험을 발생시키거나 불구·불치·난치의 질병에 이르게 한 경우, 일반 상해죄와 달리 처벌하는 규정이다. 위의 <대명률직해> 규정은 중상해죄 규정과 유사하다. 낙태나 낙태 시술 자체를 처벌하는 규정이 아니었다.

대한제국(1897~1910) 후반부에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 낙태를 처벌하는 규정이 생겨났다. 1905년에 나온 <형법대전>의 형률 제533조는 임신부를 구타하거나 위협해 낙태케 하는 행위, 임신부나 그 가족의 청탁을 받아 낙태를 시술하는 행위, 간통한 남성이 태아를 낙태시키는 행위를 처벌했다. 하지만, 이때도 임신부에 대한 처벌 규정은 없었다. 낙태를 돕거나 유발한 사람에 대한 처벌 규정이 신설됐을 뿐이다.

이 땅에서, 낙태한 임신부를 처벌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제국주의였다. 식민지 땅에 적용된 일본 형법에서는 의료인뿐 아니라 임신부도 함께 처벌했다. 일본 형법 제212조는 "임신한 여성이 약물을 사용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는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라고 규정했다.

일본 형법이 이 땅에서 시행된 것은 국권 상실 2년 뒤인 1912년. 지금으로부터 106년 전의 일이다. 글의 서두에서 낙태죄 처벌이 우리 역사에서 '갑작스러운' 일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사실,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나아가, 전 세계가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낙태죄를 처벌한 것은 유럽 문명을 받아들이면서부터였다. 그런데 유럽에서도 옛날에는 낙태죄를 강하게 처벌하지 않았다. 가벼운 죄로 취급했을 뿐이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공인된 후로 태아의 생명을 존중하는 사상이 확산되긴 했지만, 낙태 처벌에 대한 명확한 입장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영국에서도 19세기에 들어서야 낙태죄를 중하게 처벌했다. 영국 킬대학 쉬러프 맥기니스(Sheelagh McGuinness) 전임연구원이 쓴 '영국에서의 낙태죄의 역사(The History of Abortion in the UK)'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적으로 보통법은 자궁 속의 아이를 살해하는 것을 살인죄보다는 경범죄로 인식하였다. 1803년 이전 법은 오로지 이러한 경범죄를 태동이 있는 경우만 가끔 인정하였다." - 2010년에 한국 학술지 <법학논총>에 실린 논문.

1803년 이전의 영국에서 낙태가 '가끔' 처벌됐으며 그나마도 경범죄로 취급됐다는 것이다. 유럽 본토에서도 19세기부터 낙태를 강하게 처벌했다. 이런 영향을 받아 일본도 서구화 개혁인 메이지 유신(1868년) 직후부터 강경한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1868년부터는 낙태 시술을 한 사람을 처벌했고, 1882년부터는 낙태를 택한 여성도 함께 처벌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제국주의가 낙태를 죄로 규정한 까닭

청일전쟁을 그린 판화 '1894년 평양 전투'. 작가는 미즈노 도시가타.
 청일전쟁을 그린 판화 '1894년 평양 전투'. 작가는 미즈노 도시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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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에 대한 일본의 태도는 1894년 청일전쟁 이후로 한층 강경해졌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인구가 많아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태아까지도 국민의 범주에 넣으려는 의도에서 낙태죄 처벌 강화를 추구했다. 이것이 1907년 형법에서의 처벌 강화로 이어지고 1912년 이후의 조선에까지 적용된 것이다.

1905년에도 일본의 영향을 받아 대한제국에서 낙태죄 처벌 규정이 생겼지만, 그때만 해도 대한제국이 아직 살아 있어 기존대로 임신부는 처벌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하지만, 1912년에는 그나마 대한제국마저 사라진 뒤였기에, 임신부까지도 처벌 대상에 포함되고 말았다.

이 과정을 간략히 설명한 문장이 있다. 2017년 한국여성연구소가 발행한 <페미니즘 연구>에 실린 이은진의 '낙태죄의 의미 구성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고찰'에 나오는 대목이다. 2004년 국내에서 출간된 후지메 유키의 <성의 역사학>에 근거한 글이다.

"청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일본 정부의 자세가 명확히 바뀐다. 국가에 중요한 것은 전쟁에 쓸 병사의 숫자이며, 그 수를 줄이는 일은 허용될 수 없는 범죄라는 군국주의 출생 증강 사상을 기반으로, 1907년 개정 형법부터 독일 형법을 모방하여 낙태죄를 한층 엄격히 규정한 것이다(후지메, 2004년). 이것이 조선 형사령에 의해 의용된 바로 그 낙태죄 조문이며..."

일본 정부가 낙태죄에 대해 강경 입장을 취한 것은 '군국주의 출생 증강 사상'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그 전과 달리 태아까지도 '일본 국민'으로 파악하고 이 숫자를 늘리고자 낙태죄 처벌을 강화했다는 것이다. 태아나 산모의 입장을 고려한 입법이 아니라, 인구 증가를 통해 국력과 국부를 증진시키기 위한 입법이었던 것이다.

이런 일본의 방침이 국권 상실을 계기로 식민지 조선에 이식되고, 뒤이어 대한민국에도 그대로 전수됐다. 대한의사학회가 발행하는 <의사학>지에 실린 전효숙·서홍관의 논문 '해방 이후 우리나라 낙태의 실제와 과제'(2003)는 이렇게 말한다. 아래 인용문 속 우리나라는 '식민지 조선'을 지칭한다.

"(일본 식민당국은) 우리나라에서도 '인구증가가 곧 공익, 부녀건강, 도덕'이라는 데 의의를 두고 낙태죄 규정을 지속시켰다. 이 낙태죄의 규정은 해방 후에도 미 군정기를 거쳐 우리 형법이 시행되기까지 효력을 지속하였다."

태아의 생명도 당연히 보호돼야 한다. 하지만 1912년 이후로 이 땅에서 낙태 여성을 처벌한 동기는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산모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일왕(이른바 천황)의 백성 숫자를 늘리고 일본군 숫자를 늘리기 위함이었다.

정치 권력의 이익을 위해 산모한테 고통과 책임을 전가했던 것이다. 정치권력의 필요에 따라 우리나라 여성들은 1912년부터 '갑작스레' 낙태죄 처벌을 걱정하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에서의 낙태죄 처벌은 일제강점기 유산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태아가 무시돼도 좋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태아의 생명과 권리는 당연히 존중돼야 한다. 다만, 새로운 마인드로 법 제도를 정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 권력의 이익이 아니라 여성과 태아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방향에서 제도를 정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태그:#낙태죄, #일본제국주의, #청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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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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