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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내에게 요구되는 역할과 갈등하고 불화하는 '위기의 주부' 이야기입니다. 정체성의 혼란과 번뇌를 글로 풀어보며 나의 언어를 찾아가려고 합니다. [편집자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꼭꼭 싸맨 건 나를 비롯한 '한국의 엄마들'이 유일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꼭꼭 싸맨 건 나를 비롯한 '한국의 엄마들'이 유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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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의 유명 휴양지인 세부에 갔을 때였다. 리조트 수영장에서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다 하나의 특징을 발견했다. 서양인은 백발의 할머니부터 뱃살이 이중 삼중으로 겹친 중년의 부인들까지 모두 비키니나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선베드에 누워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꼭꼭 싸맨 건 나를 비롯한 '한국의 엄마들'이 유일했다. 말랐건 통통하건 간에 상의는 래시가드, 하의는 반바지나 레깅스로 무장했다. 햇볕이 강해 피부 화상을 걱정할 정도도 아니었다. 어차피 그늘에만 있을 터였는데도 행여 속살이 드러날까 봐 겹겹으로 껴입었다. 엄마는 비키니를 입으면 안 된다는 규칙도 없는데 다들 비키니는 신혼여행을 마지막으로 어딘가에 처박아 둔 것으로 보였다.

나의 '최애템'은 루즈핏 래시가드

올여름. 산뜻한 수영복을 새로 장만하고 싶었다. 한 달 내내 쇼핑몰을 들락거렸다. 결국 구입한 건 앞 지퍼가 있는 '긴 팔 래시가드'와 '사각 팬츠'. 그러나 이조차 난관에 부딪혔다. 래시가드는 몸매 보정 효과가 있단 말에 혹해서 정사이즈로 샀는데 앞 지퍼가 안 올려졌다. 간신히 목까지 올리고 났더니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뱃살은 울룩불룩 튀어나와 보정은 어림없었다.

하반신은 더 참담했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바지라 해서 기대했는데 삼각팬티보다야 덜 민망했지만 엉덩이와 허벅지 라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상의와 하의 모두 다시는 입지 못했다.

다시 헐렁한 래시가드를 열심히 뒤졌다. 일명 '루즈핏 래시가드'. 사실 헐렁한 수영복이란 불가능하다. 치렁치렁한 옷깃은 수중에서의 활동성을 현저히 제한하고, 밖에 나와 돌아다닐 때도 축축 늘어져 무겁고 불편하다. 그런 옷을 입고선 자유형도 평영도 할 수 없다. 몸에 물을 묻히는 수준에서 끝나야 한다.

나처럼 달라붙는 스타일이 불편한 사람들이 꽤 있었는지 뱃살을 '완벽 커버' 해주는 래시가드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엄밀히는 수영용이라기보다 물 바깥에서 걸치는 상의에 가깝긴 했지만 어차피 아이와 물놀이 할 때 입을 옷이니까, 유아 동반 물놀이장에서 자유형할 리는 없으니까 상관없었다. 이렇게 하여 집에서부터 입고 나가도 되는 전천 후 '물놀이 복장' 완성. 여름 동안 알차게 활용했다. 신혼여행 때 입었던 비키니를 버려도 미련 없었다. 

과시하거나, 감추거나  
 한 포털사이트에서 '루즈핏 래시가드'를 검색한 결과
 한 포털사이트에서 '루즈핏 래시가드'를 검색한 결과
ⓒ 네이버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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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는 비키니를 선망하고 있었다. SNS에서 일반인의 수영복 사진을 볼 때면 불편함이 일렁였다. 선의 가득한 '몸매 품평'에 눈살이 찌푸려지면서도 저런 사진을 굳이 올리는 이유는 뭘까 트집 잡고 싶어졌다. 그렇다. 나는 마음대로 못 입는데 누군가는 신경 쓰지 않고 입을 정도로 몸매가 완벽하다는 점에 부러움과 시기심이 났다. 게다가 그 사람이 '애 엄마'라면 더더욱.

한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어떤 엄마가 야외 물놀이장에서 비키니 입은 엄마를 보고 "정신 나갔다"고 반응했다고 한다. "물놀이장에서 비키니 입은 것이 뭐가 문제야, 왜 다들 남에게 관심이 많을까"라며 대꾸했지만, 나라고 그런 비난을 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보나 마나 나도 흘깃 째려봤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비키니 입고 돌아다니면 '정신 나간 짓' 또는 '퍼포먼스'겠지만, 수영 가능한 장소에서 수영복을 입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내가 겪고 본 한국 사회에서는 비키니 착용에 자격이 존재한다. '젊고 날씬한 여자가 입는 수영복'이라는.

타인의 시선은 자기 검열의 기준이 된다. 스스로 조건에 부합된다 느낄 때만 비키니를 편하게 입을 수 있는데 '대상화'됨을 감당하는 것도 자기 몫이다. 비록 칭찬이라 해도 몸매 품평을 받아들일 각오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반면 몸매가 '날씬함'의 기준에 (55사이즈 이하) 못 미칠 경우, 젊음으로 상징되는 '탄력성'이 떨어질 경우(출산 후 늘어진 뱃살 소유) 비키니를 입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수군대거나 흘겨보기 때문이다. 날씬하지 않은 여성이 몸을 노출하면 '민폐'라고 규정하는 '사회적 규범'은 엄연히 존재한다.

이러한 규범은 내 몸을 '대상'으로 바라보게 한다. 기준에 근접할 경우 '봐도 좋다고 과시하는 몸'이 되며, 그러지 못할 땐 '숨겨야 하는 몸'이다. 어떻게 입든 자유이자 취향이라고 말하지만, 마르거나 뚱뚱하거나 젊거나 늙은 사람 누구도 실상 자유롭지 못하다.

물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야, 살 좀 빼라."

수영장에서 비키니를 입은 친구에게 무심결에 내뱉었다.

 "미국에서는 이 정도는 날씬한 거거든? 나보고 살 빼라고 하는 건 한국 사람들밖에 없어!" 

친구의 '발끈'에 흠칫하고 반성했지만, 뼛속까지 찌들은 일상화된 '외모품평'에서 벗어나기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팔뚝 살이 없다", "얼굴이 작다", "날씬하다"며 칭찬을 가장해 평가한다.

화살은 나에게로 다시 향한다. 나는 분명 살이 찌지 않았다. 그럼에도 "살이 5kg 쪘다, 뱃살이 많다"고 수시로 말한다. 나보다 마른 사람이 다이어트해야 한다고 할 때마다 속으로 재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으니 이건, 겸손도 자학도 아니다. '사회적 미의 기준'으로 타인을 평가하고 자기를 검열하는 딱한 영혼일 뿐이다.
 나의 이 소박한 꿈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모르겠다. 물은 만인을 평등하게 대할진대 물 앞에서 우린 아직 서로를 지나치게 흘겨본다.
 나의 이 소박한 꿈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모르겠다. 물은 만인을 평등하게 대할진대 물 앞에서 우린 아직 서로를 지나치게 흘겨본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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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나는 겹겹이 싸맨 래시가드 덕에 눈에 띄지 않는 편안함을 찾았다. 하지만 옷장을 정리하다 비키니를 발견하고 씁쓸해졌다. 더 이상 입지 않을 것 같아 이참에 버릴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다시 서랍 속에 넣었다.

그건 소망이었다. 몸을 과시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떤 바람 때문이었다. 거추장스러운 옷가지를 훌훌 벗고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짜릿함. 맨살에 닿는 모래와 바람, 햇빛의 감촉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뱃살이 편안하게 늘어져도, 허벅지 살이 튀어나와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누구의 시선도 받지 않은 채 그저 나른하고 평온하게 휴가를 즐기고 싶다는 열망. 그때를 위해 비키니를 간직하고 싶었다. 비키니를 버린다는 건 그러한 해방감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직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이 소박한 꿈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모르겠다. 물은 만인을 평등하게 대할진대 물 앞에서 우린 아직 서로를 지나치게 흘겨본다.

덧붙이는 글 | 블로그와 브런치에 중복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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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