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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첫 번째 도심관광지, '북촌'...겉만 보지 말고, 나이테처럼 그곳에 쌓인 수많은 이야기들을 상상하며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희망. 게으른 걸음으로 사색하는 여행이었으면 좋겠다.[편집자말]
북촌의 구체적 답사에 앞서 지난 글에서 주로 북악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물길에 대해 살펴보았고, 그것들은 현재에는 모두 복개되어 북촌의 주요 도로망으로 변해 있음을 알아보았다(관련 기사 : 우리 눈에서 사라진 '북촌의 물길'들).

그럼 이번에는 동서로 놓여 있는 도로망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나의 북촌 탐방지역에서 동서로 놓인 가장 큰 도로는 '종로'와 '율곡로'이다. 먼저 북촌, 아니 한양도성 최대의 도로였던 종로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가로망'으로서의 '종로'의 변화과정
 
 일제강점기 이후 변한 조선시대 한성부의 기본도로망
 일제강점기 이후 변한 조선시대 한성부의 기본도로망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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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태평로 건설 전후의 변화(광화문~남대문 구간). 용산합병경성시가전도(좌, 1911)와 경성부명세신지도(우, 1914)
 일제강점기 태평로 건설 전후의 변화(광화문~남대문 구간). 용산합병경성시가전도(좌, 1911)와 경성부명세신지도(우,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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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는 조선의 한양천도(1394) 당시 경복궁(1395), 한양도성(1396) 등과 함께 만들어진 한성부의 최초·최대의 계획도로이다. 물론 일제강점기 이후는 청계천 이남의 간선도로가 주로 개발되면서 그 지위는 과거와 같이 않지만 현재까지 동서로 관통하는 최고의 중심도로이다.

한편 남북으로 놓인 도로는 일제강점기 전까지는 광화문 앞 육조거리와 남대문로로 이어지는 '고무래 정'(丁) 자 모양의 길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위 그림에서와 같이 조선총독부-남대문-남산 조선신궁을 연결하는 직선 모양의 태평로(현 세종대로)가 개설됨으로써 그 지위가 바뀌었다. 여기서는 북촌과 관련된 종로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종로는 본래 특별히 붙여진 이름이 없었으나, 이곳에는 정부가 공인한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이 설치되었고, 이로써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거리라 해서 '운종가(雲從街)'라 불렀다. 그리고 지금의 '종로'라는 명칭은 도성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가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유래한 지명이다.

한편 도로 폭은 조선의 한양천도 이후 처음 개설된 이래 크게 변하지 않았다. 처음 도로를 낼 당시 영조척(營造尺)으로 폭 56척(약 17.5m), 양 옆의 수구(水溝)는 각각 폭 2척(약 62cm)의 넓이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육의전과 시전 등 공인된 상점 외에 가건물을 지어 장사하는 온갖 가게들이 길을 점유함으로써 자연히 도로가 좁아졌다. 이후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근대화프로젝트의 하나로 종로와 남대문로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그러면서 이곳의 무허가 상점들을 남대문 선혜청 미곡창고 자리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남대문시장'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선혜청 미곡창고가 있던 자리와 중구 남창동과 북창동의 위치
 선혜청 미곡창고가 있던 자리와 중구 남창동과 북창동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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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러한 가건물 상점을 당시에는 '가가'(假家)라 불렀는데 이런 '가가'에서 유래된 말이 지금의 '가게'이다.

또한 선혜청은 1608년(광해군 원년)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공물세로 현물 대신 대동미와 포·전을 받기 위해 설립한 관청이었으나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그리고 대동미를 받던 선혜청 창고를 기준으로 지금의 남북으로 중구 '남창동'과 '북창동'이란 지명이 유래한 것이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종로는 1915년과 1925년 개수되어 폭이 28m가 되었지만 1930년대 경성의 인구폭증에 비해 그 변화는 미비했다. 왜냐면 당시 일본인들이 주로 살던 곳은 충무로, 명동 등 청계천 이남의 '남촌'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성부 도시개발의 우선순위는 북촌이 아니라 남촌이었다.

종로의 뒷골목, 피맛길

우리들에게 흔히 종로 맛집골목으로 널리 알려진 피맛골(避馬-골)은 종로 양 옆으로 종로와 평행을 이루며 뻗어 있는 '이면 도로' 즉 뒷골목을 말한다. 또한 피맛길은 종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 살펴본 '고무래 정' 형태의 한양도성 내 메인도로 양옆으로 형성되어 있었지만 종로 이남의 피맛길은 일제강점기 이후 도시개발로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다.

한편 사람들은 '피맛길'과 '피맛골' 두 용어를 혼용하는데, 엄격히 구분하자면 '피맛길'은 피맛골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는 좁고 긴 도로를 말하며, '피맛골'은 이 피맛길 양옆으로 늘어선 점포와 가옥을 총칭하는 말이다.

 
 도성전도(1834)에 나타난 종로와 피맛길
 도성전도(1834)에 나타난 종로와 피맛길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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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지명의 기원은 '避馬'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지명인데, 사람들은 '피마'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잘 못 알고 있다. 흔히 '백성이 말을 탄 고관을 피하다'는 의미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하관이 말을 타고 큰 길을 가다가 고관을 만났을 때 자신의 말을 돌려 고관을 피하다'라는 뜻이다.

즉 '고관이 탄 말을 피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관을 피해 자신의 말을 돌리다'라는 의미다. 따라서 조선시대 하관의 업무수행에 신속성을 도모할 수 있도록 의도된 이면도로라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다.(도시 뒷골목의 '장소 기억', 전종한, 2009)

나의 답사지인 종로1가~종로3가에 해방 후 도시계획상 커다란 변화가 온 것은 1974년, 2009년이다. 이미 1952년 내무부고시로 종로는 도로 폭이 40m로 확장하기로 계획되었지만 계속 미뤄지다 1974년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면서 종로 대부분의 도로가 모두 확장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때의 도로확장은 남쪽에서 이루어졌기에 종로1가~2가 아랫피맛길이 사라졌다. 그리고 2009년에는 도로확장으로 피맛길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종로1가의 일대를 현대적 건물로 재건축하는 방식의 도시개발로 인해 기존 피맛길 위에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면서 윗피맛길이 사라진 것이다.
 
 종로 일대에 현존하는 피맛길
 종로 일대에 현존하는 피맛길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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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74년 종로1가 아랫피맛길이 사라질 때 당시 이 일대의 무교동 낙지골목이 사라진 것이며, 이번 2009년 윗피맛길이 사라지면서 청진동 해장국골목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일반인들이 쉽게 찾아가 즐길 수 있던 피맛골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마치 종로의 피맛길 전부가 사라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위 그림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여전히 적지 않은 피맛길은 남아 있다. 물론 현존하는 피맛길은 그 위치에 따라 그곳에 형성된 상점이 다르다. 광화문네거리에서 종각까지의 피맛길은 주로 해장국, 낙지, 빈대떡 등 서민적인 음식점들로 특화되어 있었고, 종각에서 동쪽으로 난 피맛길은 주로 유흥업소와 귀금속 상점 등으로 특화되어 있었다. 종로3가의 아랫피맛골은 여전히 보쌈 등의 서민적 음식점들이 남아 있다.

청진동 해장국 골목

특히 현 KT빌딩와 미대사관 일대는 조선시대 '한성부'가 위치해 있었고, 현 종로구청 앞으로 나무를 사고 파는 땔감시장이 있었던 곳이라 이곳 청진동에는 나무꾼들이 모여들던 곳이다. 따라서 이른 아침 이곳으로 온 나무꾼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고 피로를 풀어주기 위하여 자연스레 국밥집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이곳의 밥집 메뉴는 나무꾼들이 술 한잔 시키면 공짜로 따라오던 안주로써의 술국, 그리고 거기에 밥을 말아 내는 국밥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50~60년대 전쟁과 산업화를 겪으며 '해장국'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또 단일 메뉴로 자리잡으면서 그것에 걸맞은 양념과 꾸미가 더해진 것이다.

한편 이곳에서의 메뉴 명칭은 도시재개발 전까지는 국밥처럼 토렴한 밥을 국에 말아내 주는 '해장국'과 밥과 국이 분리된 '따로국밥' 두 종류였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위생문제에 있어서 너무도 예민해지면서 '따로국밥'이 본래의 국밥인 '해장국'을 완전히 제압해 버렸다.

따라서 이제는 아예 기존의 '따로국밥'이 그냥 '해장국'이란 이름으로 제공된다. 그야말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 꼴이다. 이렇게 토렴한 밥을 국에 말아내 주는 우리 서민들의 전통적인 국밥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시대변화의 흐름을 인정하면서도 무엇 때문인지 못내 아쉬움이 든다.

참고로 이 일대 음식점들의 최대 호황시기는 미군정 이후 1982년까지 37동안 실시되었던 통행금지가 해제되면서 시작되었다. 더욱이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과 맞물리면서 이후 청진옥 등 일부 식당은 아예 24시간 365일 영업을 지속하면서 급속히 성장한 것이다.

지명으로서 사라진 '피마동'과 새로 생긴 '종로1~6가'

'피마'라는 명칭은 1894년 갑오개혁에 따른 행정구역 개편 때 일상의 용어에서 '피마동', '하미파동' 등의 공식 행정지명으로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피마동과 하피마동은 종로1정목, 종로3정목, 종로4정목, 서린동 등에 나뉘어 편입되어 다시 공식 지명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도시 뒷골목의 ‘장소 기억’(2009, 전종한) 재인용
 도시 뒷골목의 ‘장소 기억’(2009, 전종한) 재인용
ⓒ 전종한, 도시 뒷골목의 ‘장소 기억’(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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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선시대의 종로는 본래 행정구역으로서의 명칭이 아니라 가로명으로만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종로1정목~6정목이 신설되었고, 이때부터 종로는 '가로명'과 '지명'을 동시에 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해방된 이듬해  '가로명제정위원회'에서 일본식 용어인 '정목(丁目)' 대신 '가(街)'로 바꾸면서 현재의 '종로1가~6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종로1가~6가'는 일제강점기와 마찬가지로 '가로명' 뿐만 아니라 '지명'으로서의 지위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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