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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TV] '폐허 속 사라져 가는 약산 김원봉의 발자취'
ⓒ 김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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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역을 맡은 배우 조승우의 이 짧은 대사 한마디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이 한마디로 약산 김원봉 장군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생각했다. 그만큼 약산은 항일운동사에서 굵직한 자취를 남겼다.

그는 십대 시절 중국 최고의 명문대학 중 하나인 금릉대학(난징대학)에서 수학한 뒤 신흥무관학교로 적을 옮겼다. 그곳에서 13명의 동지들과 함께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며 '의열단'을 창설하고 의백이 됐다. 스물한 살 때의 일이다. 이후 김원봉 장군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이 됐다. 당시 현상금이 지금 가치로 300억 원이 넘었다.

김원봉 장군은 의열투쟁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꼈다. 더 나은 항일투쟁을 위해 군대가 필요하다 생각했다. 본인부터 선진적인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1926년 황포군관학교 4기생으로 입교했다. 이후 1932년 난징에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한다. 시인 이육사와 작곡가 정율성이 조선혁명간부학교 출신이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원봉 장군은 1938년 10월 10일 우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총대장이 됐다.

일제의 압박은 거셌다. 김원봉 장군도 조선의용대 대원들과 함께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1940년대 충칭으로 이동한 뒤 완벽한 조국독립을 위해 큰 결단을 내렸다. 1942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는 대한민국 광복군에 합류했다. 김원봉 장군은 광복군 부사령관과 1지대 지대장이 됐다.

영광은 누리지 못했다. 1945년 8월 15일 충칭에서 해방을 맞았지만 4개월 뒤인 12월에야 개인자격으로 조국에 돌아왔다. 귀국 후에도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끌려가 모욕을 당했다. 금릉대학 동문이자 독립운동의 동지였던 여운형 선생이 대낮에 피살당하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1948년 김원봉 장군은 북한으로 올라간다.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10년 뒤 김원봉 장군은 북한에서 '장개석의 간첩'이라는 혐의로 숙청당한다. 이후 남과 북 모두에 외면당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임정팀은 중국에서 20박 21일 동안 취재를 진행하는 동안, 약산 김원봉 장군의 흔적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상하이 와이탄과 난징 천녕사를 시작으로 금릉대학, 광저우 황포군관학교, 구이린 조선의용대 본부 터, 충칭 김원봉 장군의 집터까지 최선을 다해 기록했다. 그러나 남과 북 모두에 외면 받은 김원봉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김원봉 사후 60년, 대한민국 탄생 100년을 앞두고 각계에서 약산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생기고 있다. 지난 3월 김원봉 장군의 고향 밀양에 의열기념관이 건립됐다. 내년 상반기엔 KBS에서 김원봉을 주인공으로, 제작비 250억원이 투입될 대작 드라마 <이몽>이 방영될 예정이다. 주인공으로는 배우 유지태와 이요원이 캐스팅됐다.

로드다큐 <임정> 5화는, 약산 김원봉 장군이 걸었던 발자취를 중국 현지에서 추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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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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