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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은 사회과학이며 정치는 큰 규모의 의학일 뿐이다."

독일 병리학자 루돌프 피르호의 말이다. 젊고 유능한 의학자였던 그는 1848년 독일 북부 실레시아 지방에 발진티푸스가 발병하자 질병 퇴치 조사관으로서 ▲전면적인 민주주의 ▲보편적인 학교 교육 ▲가난한 노동자나 농민으로부터 받던 세금을 부자 지주에게 전환할 것 등의 '사회적 처방'을 지시했다.

극빈층이 모여 살던 당시 실레시아 지방의 열악한 생활환경을 개선하지 않는 이상 전염병은 언제든지 다시 발병할 수 있었다. 루돌프 피르호는 단순히 환자 개개인에 대한 투약이나 수술이 아닌 사회적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이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몸은 사회를 기록한다> 표지.
 <몸은 사회를 기록한다> 표지.
ⓒ 낮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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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사회를 기록한다>(시민건강연구소 씀, 낮은산 펴냄)는 루돌프 피르호의 신념을 입증하는 사례로 가득 찬 책이다. 시민건강연구소가 <프레시안>에 2014년부터 연재한 글을 묶은 이 책은 공중보건 분야의 다양한 최신 연구를 소개하며 "사람들이 건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하는 거대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힘"(6쪽), 즉 불평등, 차별, 사회적 재난, 부조리한 사회제도 등이 인간의 몸과 정신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 보여준다.

뻔한 것을 새롭게 보여주는 수치의 힘

<몸은 사회를 기록한다>가 주장하는 내용은 어찌 보면 별로 새롭지 않은 내용일 수도 있다. 불평등과 차별 등은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몸과 정신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이는 건강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나이가 어리고, 비정규직이고, 작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일수록 산재를 예방할 수 있는 자원에 접근하기 힘들다는 모건 레이 박사 연구팀의 2016년 연구는 통념을 연구로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뻔할 수 있는 내용도 구체적인 연구와 수치를 통해 보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노동시간을 예로 들면 일을 너무 적게 할 때는 수입 부족과 일자리의 불안정성 때문에 불안하고, 일을 너무 오래 하면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괴롭다. 일은 적당히 하는 게 좋다. 여기까지는 상식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몇 시간을 일해야 적당한 노동시간일까?

책에 등장하는 훵 딘 교수 연구팀의 2017년 연구에 따르면 노동시간이 늘어날수록 정신건강이 점점 좋아지다가 39시간이 넘어가면 악화됐다. 올해 5월 근로기준법이 개정되면서 300인 이상 사업장부터 순차적으로 주간 40시간 노동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정신건강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주 40시간도 절대 짧지 않은 시간인 셈이다. 연장근로를 포함해서 52시간을 일할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다.

여기에 가사 노동/돌봄 노동까지 고려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가사 노동/돌봄 시간이 주당 28시간 이상인 경우 노동시간이 34.5시간을 넘어가면 정신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처지를 고려하면 노동시간을 40시간보다 5.5시간 이상 줄여야 노동자의 정신건강을 보호할 수 있다.

이 연구 하나만으로도 막연하게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넘어서 구체적으로 몇 시간을 일해야 하고, 노동시간을 몇 시간 줄여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낮은 최저임금은 아동 건강에 해롭다

이 책에 담긴 연구들은 두 가지 면에서 새롭기도 하다.

첫째, 이 책은 사회적·경제적·정치적 환경이 우리 몸에 미치는 영향이 통념보다도 훨씬 크고, 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철희 서울대학교 교수가 2017년 <아시아 인구학 연구>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전쟁 당시 어머니 배 속에 있던 태아들이 나이가 들어 중고령자가 되었을 때도 악영향을 미친다.

1945년에서 1959년까지 연도별 출생자들의 건강상태를 살펴보면 출생 연도가 최근일수록 건강 결과가 전반적으로 좋아졌지만, 유독 1951년 출생자들만 이러한 추세에서 벗어나 있다. 특히 남성은 장애, 의사소통의 제한, 이동 능력의 제한, 정신장애, 인지 능력의 제한, 기본적 활동의 제한, 외출의 제한, 노동 능력의 제한 등 8개 평가 지역 모두에서 유의미하게 나쁜 점수를 기록했다.

자궁 내 선천성 감염, 전쟁 스트레스로 인한 부모의 정신건강 악화, 전쟁으로 인한 영양 부족과 보건의료 서비스 부실 등이 어머니 배 속에 있던 태아에게도 깊은 상흔을 남겨 수십 년 후까지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둘째, 이 책은 일반적으로는 건강과 별로 관계없다고 생각하기 쉬운 사회적·경제적·정치적 환경이 알고 보면 건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일례로 최저임금 수준은 아동 건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콤로 교수팀이 2016년 발표한 논문 <영아 사망률과 출생 시 체중에 대한 최저임금 인상의 효과>에 따르면 주의 최저임금이 연방 기준보다 높은 경우 일관되게 건강 결과가 좋았다. 주의 최저임금이 연방 최저임금 기준보다 1달러 높아질 때마다 저체중아 출생은 1~2% 감소하고, 영아 사망률은 4% 내외 감소했다.

서상희 시민건강연구소 연구원은 이 결과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한다.

"겨우 1~2% 변화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14년을 기준으로 만일 모든 주가 최저임금을 1달러 인상한다면,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저체중아로 태어나는 아기들의 숫자를 2,790명 줄이는 것에 해당한다. 또한 신생아 후기 사망 사례도 518명 줄일 수 있는 셈이다. 한국에서 2016년 사망한 영아가 총 1,154명이고 그 중에서 신생아 후기에 사망한 아기가 494명이었던 것을 본다면 이는 결코 작은 숫자라고 할 수 없다." - <몸은 사회를 기록한다> 199쪽

서상희 연구원은 또한 1999년 영국에서 최저임금제도가 도입된 배경에 아동 빈곤이 증가하던 현실이 있음을 지적하며 "최저임금 인상이야말로 아동 빈곤율을 낮추고 아동의 건강도 증진할 수 있는 훌륭한 아동 복지 정책이자 보건 정책"(202쪽)이라고 주장한다.

대안은 '연대의 공동체'

이 책은 불평등과 차별, 사회적 재난 등이 초래하는 건강 불평등을 해소할 방법으로 '연대의 공동체'를 제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동성애 혐오와 관련한 하첸블러 교수팀의 2014년 논문 "미국 이성애자들의 반동성애 편견과 총 사망률"은 의미심장하다. 이 연구에 따르면 동성애 편견 수준을 최대 4점으로 수치화했을 때, 동성애 편견 점수가 1점 올라갈 때마다 사망 위험이 2.9배 높아졌다. 혼인 상태, 인종, 성별, 연령 등의 여타 요인을 모두 고려했을 때도 사망 위험은 여전히 1.25배 높았다. 연령별 사망률을 이용해 환산하면 기대수명이 약 2.5년 줄어든 것이다.

특히 심장병으로 인한 사망이 1.3배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연구진은 이는 분노로 인한 심혈관 반응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차별은 차별받는 이에게는 물론이고, 차별하는 이에게도 해롭다는 사실을 증명한 셈이다.

'연대'의 부재가 미치는 악영향을 보여주는 이 연구와는 달리 '연대'를 통해 건강을 지킨 사례도 있다. 히키치 교수팀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전후로 발생한 노인들의 인지 능력 저하 문제를 다룬 논문에서 사회자본('사회적 행위자들이 서로 협력하도록 함으로써 공동의 목적을 보다 효율적으로 성취할 수 있게 하는 신뢰, 규범, 네트워크 같은 사회 조직의 특질'을 뜻한다-기자말)이 재난의 부정적 효과를 완화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연구에 따르면 2010년 사회자본이 낮았던 집단과 높았던 집단을 구분했을 때, 사회 활동 참여와 친인척 혹은 이웃 접촉이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거나 증가하는 경우에 주거지 손상으로 인한 인지 기능 저하 정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반면 사회 활동 참여와 사회적 접촉이 줄어든 집단에서는 주거지 손상에 인지 기능 저하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더 크게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재난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낼 수 있는 것은 호혜성과 연대로 이어진 '우리'의 공동체"(219쪽)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 책은 공중보건 분야의 연구를 소개한 책이다 보니 대체로 건조하다. 그러나 이 책은 따뜻한 감성이나 극적인 사례 없이도 사회가 품고 있는 여러 문제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들의 몸과 마음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 보여주고, 이러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역설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원래' 그런 것도 없다. 우리가 현재 존재하는 거대한 사회 불평등, 건강 불평등이 부당하다고 인식한다면 그것을 바꿀 수 있고 또 바꾸어야 한다." - <몸은 사회를 기록한다> 245쪽


불평등, 차별, 사회적 재난, 부조리한 사회제도 등이 만들어낸 건강 불평등을 바꿔낼 책임은 결국 우리에게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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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 2015.4~2018.9 금속노조 활동가.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을 연재하며,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