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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 앞 해치 동상
 광화문 앞 해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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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좌우에 해치(獬豸) 석상이 떡 버티고 앉아 눈을 부릅뜨고 있다. 해치는 중국의 태평성대였던 요순시대에 세상에 나타났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해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2세기 전한시대에 저술된 <회남자>에 '초(楚)나라 문왕(文王)이 해치관(冠) 쓰기를 좋아했다'는 구절이 있다. 그후 후한시대의 문헌에는 자주 나온다. 후한의 사상가 왕충(王充)의 저서 <논형(論衡)>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 "동북 변방에 있는 짐승이며, 한 개의 뿔을 가지고 있는데,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고, 사람이 다투는 것을 들었을 때는 옳지 않은 사람을 받는다"라는 요지로 설명되어 있다. 

상상의 동물인 만큼 형상뿐만 아니라 이름도 해치, 해타(海駝), 신양(神羊), 식죄(識罪) 등 다양하게 불렸다. 뿔이 있는 것은 북방계 '해치'이고, 뿔이 없는 것은 남방계 '해태'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 주장에 의하면, 광화문 앞의 석상은 뿔이 없으므로 남방계 해태라 할 수 있다. 서울시 상징 캐릭터로 정한 후 '해치'를 공식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어느 책에서는 '해치'가 순우리말 고어로 '해님이 파견한 벼슬아치'의 줄임말이라고 했는데,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경복궁 앞에 해치 세운 진짜 의미

진실이야 어떻든 해치는 시비사정(是非邪正)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는 신수(神獸)로 알려져 왔다. 그래서 동양 여러 나라에서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들이받으라는 법의 상징물로써 죄를 다스리는 관청 앞에 해치 석상을 놓았다. 조선시대의 사헌부는 관리를 감찰하고 법을 집행하는 곳인데, 대사헌이 입는 관복의 흉배에 해치를 새겼고, 머리에는 '해치관'을 썼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고 한 쌍의 해치 석상을 앉혀둔 것은 궁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그렇지만 해치가 화기를 제압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그 근거를 찾기 어렵고, 그러한 내용을 적어 놓은 기록도 없다.

어느 사학자는 숭례문(崇禮門)의 현판을 세워 쓴 것과 흡사한 풍수학적 이야기가 덧붙여진 것이라고 말했다. 풍수지리설과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관악산은 불의 기운이 강한데, 그 기운을 막기 위하여 세로로 쓰였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 없고,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야사(野史)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은 사람의 흥미를 끌어 그럴싸하게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숭례문의 현판은 <논어>에 수록된 공자의 가르침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는 학설이 있다. 조선 왕조의 사상을 뒷받침한 유교의 절대 경전인 <논어>에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흥어시 입어례 성어악)'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해석하면 '시에서 흥이 생기고, 예에서 일어나고, 음악에서 이룬다'는 것인데, '예(禮)를 통해 사람이 일어난다'는 뜻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들을 유추해 볼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앞에 해치상을 둔 이유는, 극심한 세도정치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나라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는 정치적 의지로 읽힌다. 출퇴근하는 관리들에게 해치의 꼬리를 쓰다듬으면서 마음속 먼지를 털어내고 공명정대한 정사를 다짐하라는 의도였다고 짐작한다. 그런데 해치를 상징하는 속칭 '독각수(獨角獸)'가 없어서 선악을 가리지 못하고 모리배들이 그렇게 활개를 쳤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법을 뜻하는 한자 '법 법(法)'은 '삼수변(氵)'에 '갈 거(去)'로 구성되었지만, 이는 후대에 와서 단순화된 글자다. 원래 갑골문의 모양은 '법 법(灋)'처럼 생겼다. 즉 삼수변 옆 '갈 거(去)' 위에 '해태 치(廌)' 글자가 하나 더 있다. 시비선악을 가릴 줄 아는 해치가 옳지 않은 사람을 뿔로 들이받아 제거[去]함으로써 평평한 물(氵)처럼 공평함을 이룬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법(法) 자에 대한 현대의 글자를 보고 '물 흐르듯이 해야 하는 게 법'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 어원적 유래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다. 정말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말로 이해된다. 대다수 사람은 굳이 법이 없더라도 나쁜 짓을 하려고 하면 양심에 찔려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바로 그러한 마음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불법을 저지르고, 까닭 없이 악을 행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착하고 정상적인 사람은 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야 악으로부터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만약 법이 없다면 권력을 가진 자들이 멋대로 세상을 주무를 것이다.

두 눈 가리고 법정에 들어간 판사

 대부분 나라의 법원 앞에는 천으로 두 눈을 가리고 양손에 천칭 저울과 칼을 든 여신상이 서 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을 실행한 판사가 있었다.
 대부분 나라의 법원 앞에는 천으로 두 눈을 가리고 양손에 천칭 저울과 칼을 든 여신상이 서 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을 실행한 판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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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법가(法家) 사상의 선구자이며 뛰어난 문장가였던 한비자(韓非子)는 '법불아귀(法不阿貴), 승불요곡(繩不撓曲)'이라고 했다. 법은 권력자에게 아첨하지 아니하고, 목수는 굽은 나무라고 먹줄을 구부려 그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일단 세워진 법(法)은 지혜 있는 자가 마다할 수 없고 용감한 자라도 이를 다툴 수가 없다는 것이 한비자의 주장이다. 출신, 신분, 지위 등을 구분해 법의 잣대를 들이댈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양에 시비곡직을 엄중하게 가리는 '해치'가 있었다면 서양에는 '법과 정의의 여신'이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는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다른 손에는 천칭 저울을 들고 있는 두 명의 여신이 등장한다. 하나는 법의 여신인 테미스(Themis)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딸이자 정의의 여신인 디케(Dike)이다. 두 여신이 들고 있는 천칭 저울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겠다는 공정함의 상징이고, 칼은 법과 정의를 엄정하게 구현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케는 '별의 여신'이라는 의미를 지닌 아스트라이아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 이야기>에 의하면 아스트라이아는 황금시대로부터 은의 시대를 거쳐 청동 시대까지는 이 세상에서 인간들과 함께 살았으나 철기 시대에 들어오면서 인간의 타락과 악행을 더는 참을 수 없어 하늘로 올라가 처녀자리가 되었다고 한다. 아스트라이아도 천칭 저울과 칼을 들고 있지만, 15세기 말부터 여기에 한 가지 특성이 더 부가된다. 그것은 두 눈을 천으로 가리게 된다는 점이다.

대부분 나라의 법원 앞에는 천으로 두 눈을 가리고 양손에 천칭 저울과 칼을 든 여신상이 서 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을 실행한 판사가 있었다. 미국의 세인트루이스 지방재판소 베크 판사는 멀쩡한 두 눈을 갖고 있었지만, 법정에서만큼은 철저하게 두 눈을 천으로 가렸다.

재판정에 들어가기에 앞서 흰 천으로 두 눈을 가린 채 법원 서기의 도움을 받아 판사석에 앉았다. 모든 서류를 법원 서기가 대신 읽어주었다. 베크 판사는 오로지 귀로 듣고 재판을 진행했다. 판사로 재직한 14년 동안 줄곧 이런 식으로 재판에 임했다. 주위 사람들이 까닭을 묻자 그가 말했다.

"아무리 훌륭한 재판관이라도 소송 당사자의 얼굴을 보거나 주위의 말 없는 압력을 느끼게 되면 마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저도 인간인지라 그 사람을 보고 어떤 선입견을 품게 된다면 공정한 재판이 될 수 있겠습니까?"

베크는 신화 속 여신들이 상징하는 '법의 정신'을 현실에서 그대로 실행한 판사였다.

2400여 년 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한 국가만이 안정된 국가"라고 정의했다. 이 명제는 근대 법치주의의 원칙이 되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헌법상의 대원칙이 현실에서도 통하고 있는가?

대한민국 법원의 상징도 여신 디케다. 세계적으로 정의의 여신은 오른손엔 칼, 왼손엔 천칭 저울을 들고 서 있다. 반면 우리나라 대법원 청사의 여신상은 오른손엔 천칭 저울, 왼손엔 법전, 그리고 편안히 앉아 있다. 다른 나라의 많은 디케 동상은 두 눈을 가리고 있지만, 우리 대법원 로비의 동상은 마치 선녀가 한복을 입은 듯한 모습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실체적 진실을 가리겠다는 의미라고 하지만, 눈을 가리지 않아서 그렇게 권력의 눈치를 잘 보는 것은 아닐까?

대법원 디케의 두 눈을 가려야 할 때

不患貧 患不均  백성은 가난함을 걱정하기보다 불공정한 것에 분노한다.
▲ 不患貧 患不均 백성은 가난함을 걱정하기보다 불공정한 것에 분노한다.
ⓒ 이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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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정에 판사가 들어서는 순간 그곳의 모든 사람이 일어나 경의를 표한다. 판사는 인사를 받으며 들어와 가장 높은 곳에 엄숙하게 앉는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TV 드라마나 연극, 문학 작품, 그리고 실제 재판에서도 많이 듣는 말이다. 비록 형식적이라 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재판장에게 존경의 수식어를 붙인다. 그것은 공명정대하고 명명백백한 판결을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법의 힘>에서 법 테두리 안에 이미 힘이 있으니, 그 힘은 어디서부터 오는가를 묻고서, 몽테뉴의 말을 인용하여 법을 '권위의 신비한 토대'라고 하였다. 법은 법이기 때문에 권위를 부여받은 강한 힘으로 작용한다. 그동안 사법부는 성역으로 여겨져 왔고, 판결은 신뢰해야 한다는 최소한의 공감대가 있었다. 그런데 사법부 스스로 권위를 손상하고 신뢰를 훼손한 일련의 일들, 그 사례를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알고 있다.

슬프게도 대한민국 '디케의 저울'은 한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공정해야 하는 준엄한 법이 형평성을 잃고 오판을 내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란 말이 가슴 시린 '법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재판의 공정성이 의심받으면 판사도, 대법관도 가치를 잃는다.

송나라 유학자 육상산은 불환빈 환불균(不患貧 患不均), 즉 백성은 가난보다는 불공정한 것에 분노한다고 하였다. <논어>에서 유래된 말이며,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도 중하게 다루고 있다. 나랏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철칙으로 뼛속에 새겨야 할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공정을 바라는 국민의 감정은 달라진 게 없다.

최근에 보도된 사법부의 부조리와 부패 뉴스는 참으로 충격적이다.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노래해야 한다. 자정 능력을 발휘하여 고름은 짜내고 썩은 곳은 과감하게 도려내어 환골탈태하리라고 믿는다.

이쯤에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대법원 청사 로비에 있는 디케 동상의 두 눈을 흰 천으로 가리는 것은 어떨까? 앞으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고우면 없이 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리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것이며, 법원 구성원들의 경각심을 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누가 뭐래도 우리 사회의 마지막 보루이자 희망은 법원, 법관이다. 힘없는 국민이 믿을 건 역시 법밖에 없다. 법관은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직업이다. 무엇보다 굳건한 명예가 있으며, 스스로 우월한 자부심만으로도 높은 도덕성과 정의감이 투철해야 한다.

법을 상징하는 정의의 여신 디케가 흰 천으로 눈을 가린 것처럼 법은 사람도, 권력도 가리지 않고 공정하게 흘러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축성여석의 방'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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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3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