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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동)서원의 역사
 화양서원
 화양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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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의 제자 수암 권상하와 장암 정호는 1695년 스승을 제향하기 위해 화양(동)서원을 세웠다. 1696년 사액을 받았고, 1704년 명나라 황제를 제사지내기 위해 만동묘를 세웠다. 1716년 숙종대왕 어필 편액을 하사받았고 화양서원묘정비(華陽書院廟庭碑)를 세웠다. 이렇게 해서 화양서원은 사우와 강당, 문, 재사, 창고 등 모두 15동 62칸으로 완성되었다.

서원 맨 윗쪽 중심부에 우암의 영정을 모시고 매년 3월과 9월에 제향을 올리는 본전인 송자사(宋子祠)가 있었다. 송자사를 출입하는 문으로 세 성현을 잇는다는 의미를 지닌 승삼문(承三門), 동재와 서재인 거인재(居仁齋)와 유의재(由義齋), 서원의 강당으로 화양서원 사액현판을 걸었던 일치당(一治堂), 강당과 동서재로 통하던 중문인 개래문(開來門) 등이 있었다. 그밖에 우암이 생전에 거처하던 초당, 우암 생전에 우암에게서 공부하던 생도들이 거처하던 열천재(洌泉齋,) 화양서원 임원이 거처하던 소양재(昭陽齋) 등이 있었다.
 우암 진상
 우암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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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화양서원에 20결에 이르는 많은 토지와 다수의 노비를 지급하였다. 영조 때 노론의 일당전제가 이루어지고 송시열이 문묘에 배향됨에 따라, 화양서원의 위상은 날로 올라갔다. 조정에서는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노론 관료나 유생들도 많은 토지를 기부하여 화양서원 토지가 삼남은 물론 강원도에 걸쳐 있었다. 또한 영조는 1725/26년 두 번에 걸쳐 직접 신하를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1747년에는 도암 이재가 만동묘비(萬東廟碑)문을 짓고, 비를 묘 앞에 세웠다.

정조 역시 1776년과 1782년 두 번 신하를 보내 선비를 숭상하고 도를 중히 여겨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처럼 화양동서원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서원으로 그 위세를 과시했다. 그러나 정조가 세상을 떠난 1800년대 이르러 화양서원은 더 이상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게 어려워졌다. 그러자 서원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발행하는 등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다.

 만동묘비
 만동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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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묵패란 서원의 제수를 충당하기 발행하는 일종의 공문서인데, 이게 강제성을 띠면서 문제를 일으켰다. 1865년에는 만동묘가 철폐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화양서원마저 철폐되었다. 그러나 2년 후 이항로, 최익현 등 화서학파의 상소가 있었고, 1874년 이후 다시 향사(享祀)가 부활되기도 했다.

화양서원이 또 다시 철폐된 것은 대한제국 때인 1908년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안 되는 1917년 만동묘에 대한 제사를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그렇지만 유림들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제사가 지내졌고, 이것이 알려져 1942년 만동묘가 불태워지고 묘정비가 땅에 묻혔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1983년 괴산군은 묘정비를 찾아 다시 세우고 만동묘 주변을 정비했다. 그리고 다시 20여년이 지난 2006년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다시 복원되기에 이르렀다.

화양서원을 지켜낸 사람들
 수암 권상하
 수암 권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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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서원을 만드는데 앞장선 사람은 수암 권상하다. 그것은 그가 우암의 수제자이고, 우암의 유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1689년 6월 8일 전라도 정읍땅에서 우암은 수암에게 다음과 같은 유명을 남겼다. 여기서 치도는 권상하의 자(字)다.

"내가 일찍이 아침에 도를 듣고 저녁에 죽기를 바랐는데, 지금 나이 80이 넘도록 끝내 듣지 못하고 죽는 것이 바로 나의 한이네. 이 시대는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니, 나는 웃으며 땅속으로 들어갈 것이네. 이후로는 오직 치도(致道)만 믿겠네."
 화양서원묘정비
 화양서원묘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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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1년 화양동으로 들어간 수암 권상하는 연풍에 있는 장암 정호와 만나 화양동서원 건립에 대해 논의한다. 그러나 서원이 공식적으로 성립된 것은 1695년이다. 그것은 1695년 12월 16일자 <서원등록>에 화양동서원 건립이 이미 기정사실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보면 교리(敎理) 정호는 "선현의 도덕과 학문을 배우고 본받기 위해 서원을 설립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그 결과 1696년 화양동서원은 사액을 받고 우암의 진상을 봉안한다. 사액을 받는다는 것은 정부로부터 공인을 받는 것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1704년 1월에는 만동사가 지어지고, 신종, 의종 두 황제에 대한 향사가 이루어진다. 이것 역시 우암이 수암에게 내린 유지였다. 1716년에는 어필 편액을 하사받았고, 병계 윤봉구가 화양서원묘정비를 지었다.

비문에는 화양서원과 우암 송시열 선생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우암은 공자와 주자의 가르침을 따라 청나라 오랑캐를 물리치고 중원을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주자를 받들고 춘추의 의리를 세웠다. 우암은 또한 군자와 소인, 옳음과 그름을 분별하여 도를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우암이 의종황제의 사당을 세우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제자인 수암이 만동묘를 세워 신종, 의종 황제를 제사지냈다.

화양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한문 경서강독
 한문 경서강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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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동에서는 '아방가르드 송자'라는 이름으로 문화재 활용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4월부터 11월까지 2/4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서원체험, 달빛체험, 예악체험, 역사체험, 생태체험을 한다. 그리고 여름인 7월에는 꽃나들이를 하고, 10월에는 음악제를 한다. 이 사업을 주관하는 팀이 '화양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이 모임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안금자, 김영운 부부다. 이들 부부는 문화관광해설사로도 활동한다.

서원체험은 경서강독, 다도체험, 인문학 강의로 이루어진다. 경서강독은 <명심보감> 공부하기로, 박온섭 화양서원장이 지도한다. 다도체험은 다도전문가가 진행한다. 인문학 강의는 필요에 따라 전문가를 초빙해 이루어진다. 달빛체험은 밤에 청사초롱을 들고 화양구곡을 걸으며 명상에 잠기고 자연과 하나 되는 체험이다. 예악체험은 예를 배우고 음악을 즐기는 체험이다.

 청사초롱 들고 밤길 걷기
 청사초롱 들고 밤길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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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체험은 화양동을 걸으며, 화양구곡의 역사 화양서원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생태체험은 충청북도 자연학습원으로부터 화양서원까지 걸어 내려오며 동식물에 대해 배우고 공부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참가자들은 삶과 문화가 자연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도심에 사는 아이들에게 생태체험은 자연과 친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달빛촉촉 1박2일' 행사는 토요일 오후 4시 시작해 일요일 오후 1시 끝난다.

'화양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화양동의 명소화, 선비정신 교육, 문화향유 기회 확대를 목적으로 2009년 창립되었다. 그 동안 선비학교 생생체험, 서원문화재 활용사업 등을 통해 화양서원과 화양구곡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 결과 2016년에는 '아방가르드 송자 - 화양서원'이 문화재청 우수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금사담 건너 암서재 들어가기

 암서재
 암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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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달빛촉촉 1박2일 화양서원 행사에 참여한 다음 김영운 선생의 배려로 암서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과거에는 금사담에 다리가 놓여 암서재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화양3교를 건넌 다음 개울을 끼고 내려가야 한다. 또 암서재의 문이 항상 걸려 있어 화양서원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다.

암서재에는 편액이 여러 개 걸려 있다. 이들이 바로 암서재의 역사를 말해준다. 암서재는 1669년 처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우암의 '화양동 바위 위 정사에서 읊다(華陽洞巖上精舍吟)'라는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우암의 암서재시
 우암의 암서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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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가 바위 벼랑 열렸으니          溪邊石崖闢
그 사이에 집을 한 칸 지었네.       作室於其間
조용히 앉아 경서의 가르침 찾아   靜坐尋經訓
분촌이라도 따르려 애쓴다네.       分寸欲躋攀


그리고 그 후 역사는 수암 권상하가 쓴 암서재 중수기(巖棲齋重修記, 1721)를 통해 확인된다. 우암은 암서재에서 경서도 공부하고 후학도 가르치고 놀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1689년 우암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재사가 퇴락하고 무너지기 시작한다.

 암서재에서 내다 본 화양계곡
 암서재에서 내다 본 화양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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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1715년 백온(伯溫) 김진옥(金鎭玉)의 후원으로 암서재가 옛 모습으로 중건된다. 그리고 1721년 봄 수암의 글과 글씨로 암서재 편액과 중수기문이 만들어진다. 그 후의 역사는 암서재에 걸려 있는 세 개의 중수기를 통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이들 중수기는 8대손 송근수(宋近洙: 1818-1902), 후학 이정로, 박동식이 쓴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중부매일신문> 기사와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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