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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 2회차 첫날인 24일 오후 금강산 면회소에서 열린 단체상봉에서 북측 량차옥(82·가운데)씨가 남측에서 온 언니·동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량차옥씨는 북한에서 40여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 사진공동취재단
인민군에 끌려간 형, 돈 벌겠다며 서울로 올라간 언니, 이유도 모른 채 잃어버린 엄마... 24일 금강산에서 남북 이산가족이 만났다. 총 6차례, 2박 3일 일정 중 첫 만남인 단체상봉이다. 북측의 이산가족이 남측의 가족들을 찾아 마련된 이 자리에서 남측 81 가족이 헤어진 북측 가족들을 만났다.

이들 중에는 26년 전 방북해 엄마를 만나고 온 뒤 수감된 아들(송유진 할아버지), 눈앞에서 인민군에게 끌려간 형을 본 동생(임홍근 할아버지), 죽은 줄 알고 사망신고한 언니(박춘자 할머니)가 있었다.

[송유진 할아버지 이야기] "20년이 흘렀으니, 지금은 다르겠지"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 2회차 첫날인 24일 오후 금강산 면회소에서 열린 단체상봉에서 북측에서 온 송유철(70·가운데)씨가 남측 형 송유진(75), 누나 송유주(76)씨에게 훈장을 보여주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엄마가 있었지만, 보육원에서 자랐다. 엄마를 찾아 만나고 와서는 간첩 혐의를 받았다. 1년여 수감 생활도 했다.

송유진(75) 할아버지의 엄마는 한국전쟁 때 송유진 할아버지와 누나를 포항으로 피신시켰다. 엄마는 나머지 형제들을 개성으로 데려갔다. 송유진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폭격 때 돌아가셨다. 포항에 닿은 두 남매는 보육원에서 꿋꿋하게 버텼다. 대학을 나와 대우자동차와 현대자동차에서 일했다. 1990년대에는 태국에 공장을 두고 있는 사업체를 운영할 정도로 생활이 폈다.

그때 즈음이었다. 1990년대 당시 통일원과 안기부를 통해 평양에 다녀올 수 있었다. 북한 사람을 만나도 된다는 방송을 듣고 공식적으로 북한 주민 접촉 신청을 한 것이다. 태국 공사관에 접촉해 신고하고 1년이 흘렀다. 엄마를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통일원에 방북 허락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결국에 북한에 갔다.

헤어진 지 20년 만에 송유진 할아버지는 엄마를 만났다. 1992년 9월이었다. 예순을 훌쩍 넘긴 엄마를 보고 돌아왔다. 송유진 할아버지는 엄마를 만난 지 1년 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큰아들인 송 할아버지를 만나 소원을 풀었던 걸까, 통일이나 이산가족 상봉 같은 또 다른 희망을 품기에는 엄마의 기력이 쇠했던 걸까.

"나도 어머니 보고 싶은 희망으로 살았죠. 어머님도 그랬을 거고요. 그런데 나를 만나고 나서 살아야 할 의욕을 잃으신 건지 1년 있다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요. 나도 소원이던 어머님을 만나고 나니 삶의 의욕이 줄어들었어요."

북에 다녀온 송유진 할아버지는 간첩으로 몰렸다. 북한에서 저녁에 만난 사람 중 한 명이 당시 북한 서열 3위였다는 것. 당시 남측 당국은 이야기를 잘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간첩으로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1년여를 복역하다 1998년 광복절 때 특사로 풀려났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지금 북한 형제를 만난다고 같은 일이 생기지는 않겠죠."

할아버지가 말했다.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 2회차 첫날인 24일 오후 금강산 면회소에서 열린 단체상봉에서 남측 김현수(77·오른쪽)씨가 북측 형 김용수(84)씨를 만나 오열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임홍근 할아버지·임근순 할머니 이야기] 오빠는 '언년이'를 기억할까

인민군이 집에 들이닥쳤다. 눈앞에서 형이 끌려갔다. 충청북도 괴산군 증평면, 임홍근 할아버지의 집은 쑥대밭이 됐다. 인민군은 임홍근 할아버지의 가족 모두를 집 밖으로 쫓아냈다. 가족 중 18~19세 정도의 남자는 형뿐이었다. 형은 끌려가면서 "금방 갔다 오겠다"라고 했지만, 그날 이후 68년이 흘렀다. 임홍근(81) 할아버지가 10대 때의 일이다.

엄마는 늘 발을 동동 굴렀다. 아들이 언제 오나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임 할아버지의 부모님은 결국 큰아들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임 할아버지는 평생 아들을 기다리며 마음 졸인 부모님의 사진을 품에 넣어왔다. 형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많다.

여동생들 역시 그날을 기억한다. 당시 20세에 가까운 큰 오빠는 또 다른 아빠이기도 했다. 듬직하고 너른 등에 마음을 기댔었다. 임근순(84) 할머니는 큰오빠가 끌려가고 난 후 종종 오빠가 나오는 꿈을 꿨다. 큰오빠도 나를 그리워하는 걸까. 언년이, 막순이로 불리던 여동생들이 오빠의 꿈에도 나왔을까. 할머니는 큰 오빠에게 묻고 싶다.

남북의 이산가족이 분단 후 65년 만에 다시 만나 진한 혈육의 정을 나눴다. 8.15 계기 '제21차 이산가족 상봉행사'(2회차) 첫날인 24일 오후 강원도 고성군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우리측 박태배(77), 박성배(69), 박정배(69) 할아버지가 상봉자가 북측의 큰누나 박완배(84) 할머니와 가족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뒷줄 왼쪽은 북측 며느리 양연희(51), 오른쪽은 조카 박종숙(51). ⓒ 사진공동취재단

[박춘자 할머니 이야기] 사망신고 한 언니... 그 언니가 돌아왔다

언니는 제주에서 서울로 호기롭게 떠났다. 이마에 있는 큰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돈을 벌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박춘자 할머니의 나이 아홉 살. 그런 언니가 대단해 보였다. 언니는 다섯 명의 친구와 독수리 오형제처럼 서울로 향했다. 언니 나이 열여섯 살 때였다. 박춘자(77 할머니와 가족들은 제주도에 있었다.

할머니는 처음에 6.25도 몰랐다. 섬은 그때까지 고요했다. 언니와 함께 올라갔던 친구 중 한 명이 언니의 옷과 도민증을 가져다줘서 그제서야 상황을 알게 됐다. 언니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가족들은 언니의 사망신고를 했다.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텔레비전에 나와도 남의 이야기라고만 여겼다. 서울로 간 언니가 북한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언니가 할머니를 찾았다. 오빠와 남동생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박춘자 할머니의 여동생은 건강이 좋지 않아 함께하지 못했다. 할머니도 혈압약과 심근경색약을 먹고 있다. 활동하는 데 문제가 없어 언니를 만나겠다고 나섰다. 언니의 68년은 어떻게 흘렀을까.
남북의 이산가족이 분단 후 65년 만에 다시 만나 진한 혈육의 정을 나눴다. 8.15 계기 '제21차 이산가족 상봉행사'(2회차) 첫날인 24일 오후 강원도 고성군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가 꿈에 그리던 가족을 상봉한 이산가족들의 기쁨과 슬픔으로 인해 눈물바다로 변해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태그:#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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