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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비혼, 돌아온 비혼, 자발적 비혼 등 비혼들이 많아진 요즘, 그동안 ‘비혼’이라는 이유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조금 더 또렷하고 친절하게 비혼의 목소리를 내고자 용기를 낸 40대 비혼의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아름다운 몸, 아름다운 몸매란 어떤 것일까? 누가 아름다움을 평가할 수 있을까? 평가한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

늘 다이어트 중이던 내가 다이어트에 대한 회의를 품으면서 갖게 된 의문이다. 먼저 자백하자면, 내가 했던 다이어트는 건강을 위한 체중감량이 아니라 날씬해지기 위한 다이어트였다.

통통 수준의 몸매인데 내 정서상으로는 늘 '더 빼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20~30대에는 살찐 것은 잘못이고 매력적이지 않다는 인식이 강했고, 40대에 들어선 나이든 독신녀가 몸까지 푹 퍼지는 건 못 봐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탓이다. 뿌리는 같다. 살찐 몸은 싫다는 거였다. 아니,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내 몸이 싫었던 이유가 크다.

내 키는 163cm다. 이 정도면 적당한 신장이지만 어릴 땐 키가 나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지금이야 초등학교 고학년들은 훤칠하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남녀 통틀어 가장 큰 사람이 나였다. 작은 친구하고는 머리 하나가 더 클 정도이기도 했다.

남자 아이들한테는 위협적으로 보였던지, 키 때문에 무척이나 놀림을 많이 당했다. 그들에게 나는 이름이 아니라 '돼지'로 불렸다. 예쁜 돼지, 귀여운 돼지도 아니고 그냥 "돼지"였다. 정말 싫었지만, 내가 비쩍 마른 편이 아니고 분명 다른 아이들보다는 컸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했다.

돼지라고 불리는 게 당연한 것인냥, 남자 아이들이 "돼지"라고 놀리면 그냥 바보처럼 웃으면서 넘기곤 했다. 그렇게 몇 년을 '돼지' 소리를 들으니 나중에는 진짜 내가 엄청난 돼지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다 6학년 2학기 때 나보다 큰 여자아이가 전학을 오면서, 그제야 난 "돼지"라는 별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 느낀 해방감이란! 그 전학 온 친구가 나에게는 구원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한번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내 몸에 대한 원망과 수치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성인이 돼서 어릴 적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내 기억 속의 그때 내 모습은 엄청난 뚱땡이인 데다가 킹콩 같은 거구였는데, 실상은 그저 좀 통통한 수준이어서. 뭔가 억울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린 시절 '돼지'라는 철없는 놀림 때문에 내가 내 몸을 비정상으로 여기며 수치스럽게 여겼던 왜곡된 시간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짧은 옷을 잘 입지 못했다. 반바지를 입은 적도, 미니스커트를 입은 기억도 별로 없다. 나로서는 되도록 살을 감추는 게 내 수치심을 숨기는 유일한 방어 기제였던 것 같다.

처음으로 나를 드러내게 된 것이, 캐나다에 갔을 때였다. 몸이 안 좋아서 1년 동안 캐나다에서 생활할 기회가 있었는데, 캐네디언들 사이에 있으니 나는 평범함을 넘어 오히려 날씬한 축이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였을까. 전에 없던 용기가 나서, 미니스커트를 샀다. 처음이 어려웠을 뿐, 한번 입자 다음부터는 반바지를 입는 것도, 소매 없는 옷을 입는 것도 쉬워졌다. 옷에서 해방된 느낌,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 몸이 저주에서 풀려난 느낌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옛날보다는 많이 나아졌고, 이제는 개성대로 입지만,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여전해서 몸을 사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

얼마 전 두 개의 재미있는 기사를 접했다. 하나는 가수 씨엘에 대한 기사였다. 온통 후덕해졌다는 기사였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거냐는 둥. 양현석 사장에 대한 항의라는 둥. 온갖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가수 씨엘(CL)에 대한 기사들. 외모에 대한 난도질에 가까웠다
 가수 씨엘(CL)에 대한 기사들. 외모에 대한 난도질에 가까웠다
ⓒ 네이버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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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기사 제목들은 어찌나 코미디 같은지. "살과 함께 물오른 퍼포먼스 능력" "씨엘 근황, 체중 증가에도 여전한 카리스마" 가수의 외모에 대한 난도질에 가까웠다.

문득 외모로 평가받았던 기억들이 올라왔다.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외모에 대해 그토록 무례하게 함부로 말을 하는 걸까. 자기 자신이 그렇게 평가당하면 분명 불쾌하고 속상하고 자존심 상할 거면서.

다른 하나, 뜨거웠던 기사는 모 프로그램에 수영복 입은 모습을 당당하게 드러낸 개그우먼 이영자씨에 대한 소식이었다. 그동안 선례가 별로 없던 일이어서 나도 조금 놀랐다. 어쨌든 그 당당함은 시원했고, 영자 언니가 낸 용기에는 무조건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잘 알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그 당당함은 시원했고, 영자 언니가 낸 용기에는 무조건 박수를 보내고 싶다(올리브 '밥블레스 유' 캡처)
 그 당당함은 시원했고, 영자 언니가 낸 용기에는 무조건 박수를 보내고 싶다(올리브 '밥블레스 유' 캡처)
ⓒ 올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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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또 한번 언론에서 말이 많겠구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방송 다음날에 '자신감이 넘쳐서 보기 좋다' '뚱뚱해도 당당하게 꾸미는 게 정말 좋다' 이런 류의 기사들이 쏟아졌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씨엘이 살쪘다고 온갖 수선을 떨던 언론들이 이번엔 이영자를 보고 살쪄도 당당하고 아름답단다. 당당하기로 따진다면 씨엘도 만만치 않은 연예인인데 말이다.

여성의 몸에 대한 이런 분열적이고 모순적인 시각들은 불편하다. 그래서 아무리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해도 이런 식의 기사도 그다지 반갑지 않다.

진짜 아름다운 몸이란

몸이나 외모 자체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을 순 없을까. 뚱뚱하거나 말랐거나 상관없이 개성을 가진 한 사람으로 봐주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가장 좋은 건, 외모, 몸에 대한 품평을 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부터 인사치레성 외모 품평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예를 들면 이런 말이다.

"많이 예뻐졌네." "살이 빠졌나 봐." "날씬해져서 그런가 보기 좋네." "어쩌면 얼굴에 주름이 없니?" "어려 보인다" 등등. 옆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쟤네는 거울도 안 보나 봐' 할지도 모를 말들이다. 상대의 변화를 발견하고 진심으로 칭찬해줄 때도 있지만, 사실 할 말이 없거나 호의를 보이고 싶을 때 별 생각 없이 하기도 한다.

"기분 좋으라고 하는 립 서비스인데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아?" 내 말에 친구가 뭘 그리 까칠하게 구냐고 타박했지만, 남들의 시선과 판단에 갇혀 내 몸을 부끄러워한 것에 대한 반성이자, 다시는 그런 판단에 매이지 않고 나도 판단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그래서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외모 품평은 사절이다. 하지 않으려고 의식하다 보니, 그런 말을 참 많이 하고 살았었구나 싶다. 생각보다 꽤 어렵다.

아름다운 몸이란 어떤 몸인지 다시 생각해 본다. 정답은 없다. 다들 각자의 기준이 있고 거기에 맞춰서 자신의 몸을 다루고 경영하는 것뿐. 다만 나는 사람을 두고두고 빛나게 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몸에 깃든 정신이며, 그것은 분명 좋은 태도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새삼 긍정한다.

물론 날씬하거나 몸이 좋은 사람을 보면, 처음엔 눈이 가고 좋은 옷태가 부럽기도 하지만 결국 어떤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건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건강하고 일상의 소소함에서 행복할 줄 아는 사람에게선 외모와 상관없는 긍정의 기운들이 뿜어져 나오고, 그 기운은 외모를 덮어버리곤 한다.

그래서 진짜 아름다운 몸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평가에서 자유로운 몸.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몸. 건강을 위해 부지런한 몸, 좋은 마음이 태도로 드러나는 몸. 이런 몸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만들어내는 고유의 아름다움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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