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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나주목사의 살림집이었던 목사내아. 지은 지 200년이 넘은 옛집이다. 8월 22일 오후 풍경이다.
 옛 나주목사의 살림집이었던 목사내아. 지은 지 200년이 넘은 옛집이다. 8월 22일 오후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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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나주는 '천년 목사고을'로 통한다. 고려 성종(983년) 때 중앙집권 정책의 하나로 설치한 전국 12목 가운데 하나인 나주목(羅州牧)이 설치됐다. 당시 나주목은 무안 담양 곡성 낙안 남평 5개 군과 회진 반남 창평 장산 진원 화순 등 11개 속현을 다스렸다고 한다. 지금의 전라남도 서남부와 중부권을 관할한 셈이다.

나주목은 1895년 행정제도 개편 때 나주관찰부가 됐다. 이듬해 전국을 13도로 나누고, 전남도청이 광주에 설치될 때까지 913년 동안 전라도의 중심이었다. 나주는 '전라도' 지명 유래와 엮이기도 한다. 고려 현종(9년) 때 전주를 중심으로 한 '강남도'와 나주를 중심으로 한 '해양도'를 합치고, 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를 따서 이름 붙였다.

1018년의 일이다. 올해가 '전라도'라는 지명이 역사에 등장한 지 1000년이 되는 해이다. '경상도'가 1314년, 충청도는 1356년, 뒤를 이어 강원도 평안도 경기도 황해도 함경도가 등장한 걸 감안하면, 우리 역사에서 전라도가 얼마나 빨리 등장했는지 알 수 있다.
 옛 나주읍성의 모형. 나주목문화관에 전시돼 있다.
 옛 나주읍성의 모형. 나주목문화관에 전시돼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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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나주읍성의 남고문 야경. 옛 나주경찰서 옆에 복원돼 있다.
 옛 나주읍성의 남고문 야경. 옛 나주경찰서 옆에 복원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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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는 당시 남쪽의 한양으로 불렸다.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힐 규모였다. 흥선대원군이 '나주 가서 세금 자랑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로, 세금을 가장 많이 거둔 곳이기도 하다. 이에 걸맞게 옛 나주읍성의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읍성의 둘레가 3679m, 면적이 97만4390㎡로 넓었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4개가 있었다.

읍성의 금성관을 중심으로 하는 객사가 있었다. 경복궁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나주목의 궁궐인 셈이다. 관찰사가 읍성을 돌보며 업무를 봤고, 조정에서 내려온 사신들이 묵어가던 곳이다.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패를 모셔두고 망궐례를 행하던 공간이기도 하다. 성종(1470년대) 때 나주목사 이유인이 세웠다. 일제강점기 땐 나주군 청사로 쓰였다. 1976년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했다.
 옛 나주목사의 행차 모습. 나주목문화관에 모형으로 전시돼 있다.
 옛 나주목사의 행차 모습. 나주목문화관에 모형으로 전시돼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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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나주읍성의 금성관 전경. 울퉁불퉁한 박석이 마당에 깔려 있다. 8월 22일 오후 풍경이다.
 옛 나주읍성의 금성관 전경. 울퉁불퉁한 박석이 마당에 깔려 있다. 8월 22일 오후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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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문인 망화루를 지나 금성관으로 들어가면, 울퉁불퉁한 박석이 깔린 너른 마당이 펼쳐진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걸음걸음마다 조심하라는 뜻으로 깐 박석이다. 울퉁불퉁한 돌 사이로 빗물이 흘러 고관대작의 신발도 젖지 않았다. 망궐례를 할 때 눈이 부시지 않도록 하는 목적도 담고 있다.

금성관의 출입문도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가운데 문은 왕이나 사신이 들어갔다. 왼쪽은 문관, 오른쪽은 무관이나 백성이 들어가는 문이다. 객사로 가는 길도 양쪽으로 두 갈래가 있다. 가운데에 약간 높게 돋아진 길이 왕이나 사신의 길이다.

금성관 한쪽에선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옛 연못 자리다. 뒤편에 수령 600년이 넘은 은행나무도 한 쌍 있다. 동학농민전쟁 때 나주읍성의 수성군이 나주성을 지킨 것을 기념해 세운 금성토평비도 왼편에 있다. 동학군과 관군의 전투는 나주읍성의 서문을 중심으로 치열했다.
 옛 나주읍성의 금성관 전경. 지난 8월 22일 오후 풍경이다.
 옛 나주읍성의 금성관 전경. 지난 8월 22일 오후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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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나주읍성의 목사내아 전경. 하룻밤 묵으려는 여행객들이 마당을 거닐고 있다. 8월 22일 오후 모습이다.
 옛 나주읍성의 목사내아 전경. 하룻밤 묵으려는 여행객들이 마당을 거닐고 있다. 8월 22일 오후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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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관 앞에 있는 정수루는 옛 동헌의 출입문이다. 읍성의 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던 북이 걸려 있다. 목사내아는 나주목사의 관저이면서 살림집이었다. 지은 지 200여 년 돼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옛집이다. 건물이 마당의 호두나무를 중심으로 ㄷ자로 배치돼 있다.

일제강점기에 군수들의 관사로 쓰이면서 변형된 것을 복원했다. 문화재청의 승인을 얻고 전문가의 고증을 거쳤다. 지금은 여행객들이 문화재를 체험할 수 있도록 숙박시설로 변신했다. 하룻밤 옛집 체험장으로 제격이다.
 목사내아의 벼락 맞은 팽나무. 행운을 가져다 주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목사내아의 벼락 맞은 팽나무. 행운을 가져다 주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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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나주읍성의 동점문. 옛 나주읍성의 제1 관문이었다.
 옛 나주읍성의 동점문. 옛 나주읍성의 제1 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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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내아에 벼락 맞은 팽나무도 있다. 수령이 500년 넘었다. 1980년대 태풍 때 벼락을 맞았다. 그때 파이고 갈라진 곳을 황토로 메우고 사슬로 묶어 지탱하는 수술을 받았다. 지금도 늠름하게 서 있다. 벼락 맞은 나무는 예부터 예상치 못한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지금도 팽나무 앞에서 소원을 비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옛 읍성의 성문도 복원돼 있다. 나주읍성의 제1관문이었던 동점문은 남산공원 아래에 있다. 서성문은 나주향교 옆에, 남고문은 옛 나주경찰서 옆에 복원됐다. 성문은 밤에 조명을 받으면 더 고풍스럽게 보인다.

서성문 옆에 나주향교도 있다. 앞쪽에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공간, 뒤에 명륜당을 중심으로 공부를 가르치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형태를 띄고 있다. 여기에 수령 500년 넘은 은행나무와 비자나무도 있다.
 나주향교의 비자나무. 수령 5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주향교의 비자나무. 수령 5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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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