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 메인포스터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 메인포스터 ⓒ 와이드릴리즈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일본 호러 장르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잘 알려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지만, 사실 그의 작품 속에는 무거운 주제 의식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원초적인 공포감이 아닌 기묘한 느낌을 받게 될 때가 많다. 많은 관객들이 같은 작품을 두고 공포 영화라고 보기도 하고 예술 영화 카테고리로 나누기도 할 만큼 극단적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감독을 대표하는 작품인 <큐어>(1997)만 보더라도 최면에 걸린 살인마를 등장시키며 외면적으로 기괴하고 공포로 가득하게 보이는 것과 달리, 그 속에는 일상 속에 자리하고 있는 막연한 위협과 누구나 일상의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알리는 주제 의식들이 담겨 있다.

지난 2016년 감독이 전작 <은판 위의 여인>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했을 당시, 공식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차기작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원작이 있는 SF코미디 형식의 이상한 영화를 찍어서 편집 중이다"라고 밝혔다. 그때 이미 그 작품은 촬영이 끝난 상황이었는데 아마도 그 작품이 이번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이 영화로 지난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에 다시 한번 참석했다. 최근 다양한 작품을 통해 전에 없이 자신의 표현 방식에 대한 확장을 시도하고 있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역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덜어내고 SF와 러브 스토리, 외계인과 개념의 의미와 같은 것들을 담아낸다. 일본의 연극 <생매장>을 영화화 한 이번 작품 <산책하는 침략자>는 지구를 침략하려는 외계인들이 인간의 정신에 잠입해 인류의 개념을 수집, 붕괴시키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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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은 지구를 침략하려는 외계인들이 사용하는 방식에 대한 설정이다. 대개의 경우 지구를 침공하는 외계인들의 방식은 파괴와 종속, 절멸에 포커스가 맞춰진다. 이것은 인류가 타 종족 혹은 타 국가를 복종시켜왔던 방식과 가장 유사하기 때문이며, 어쩌면 관객들이 납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보여주는 것에 가장 많이 기대는 매체이고, 그런 매체를 가장 잘 수용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 경험했던 것을 변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독은 인간의 개념을 빼앗아 내는 것으로 방식을 우회한다. 개념을 빼앗은 외계인들은 인류의 행동 양식을 습득함으로써 이해에 가까워지고, 반대로 개념을 빼앗긴 인간은 문명 그 자체, 더 나아가 스스로에 대한 개념마저 상실하면서 유기체적 생명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퇴행하게 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03.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 스틸컷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 스틸컷 ⓒ 와이드릴리즈




더불어 외계인의 모습을 특정하지 않고 인간의 정신에 잠입한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그로 인해 결국 관객들이 마주하는 외계인의 모습은 인간과 동일한 형상이며 극 중 인물들은 서로의 존재에 대해 혼란스러워 한다. 우리는 외견 상 이질적인 대상에 대해서는 다른 모든 생활양식에서도 다를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다른 존재'가 '다른 행위'를 하는 건 기괴하더라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이유다. 반면 인간과 동일한 형상, 즉 '같은 존재'가 '다른 행위'를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감독은 이러한 인간의 빈 틈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극 중에서 외계인에 의해 개념을 빼앗긴 사람들의 행동을 그저 아픈 것으로 한정하는 것은 물론, 외계인의 존재를 깨달은 이들의 경고를 묵살하는 장면들이 여기로부터 파생된다.

이들의 동일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설정이 극 중 다른 인물들에게 미치는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이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는 물론, 알고 난 이후에도 나루미(나가사와 마사미 역)가 남편인 신지(마츠다 류헤이 역)의 가이드를 자처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외계인에게 정신을 빼앗겨 이상해지기는 했지만 겉으로 원래의 신지와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기에 나루미는 그를 놓지 못한다. 물론, 여기에는 두 사람의 과거와 신지의 정신을 빼앗은 외계인이 신지의 모습에 가까워지고자 노력하는 부분들이 영향을 준다. 그러나 애초에 외계인이 나루미가 알던 신지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성립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리고 만다. 사쿠라이(하세가와 히로키 역)가 아마노(다카스기 마히로 역)와 아키라(츠네마츠 유리 역)에게 조력할 수 있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 특종 기자인 그가 그들의 가이드가 되는 것은 나루미가 신지를 대하는 것과는 또 다른 목적이지만, 기본적으로 동일한 형태와 언어를 공유하는 존재라는 것이 영향을 주었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04.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이번 작품에서 자신의 장기인 호러물의 특성을 이번 작품에서 최대한 배제하고 있다고 했지만, 적어도 작품의 타이틀 시퀀스만큼은 예외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다소 약한 것도 사실이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톤과 이질적이라는 점과 영화의 가장 처음에 등장한다는 점 때문에 더 인상적이다. 이 장면은 앞서 설명한 두 가지 요소를 집약적으로 드러내기에 가장 적합했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존재'의 '다른 행위'를 극단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지금 등장하는 인간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과는 다른 것임을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B급 영화적 연출(무자비한 총질, 전투기와의 액션 신 등) 또한 익숙하지는 않지만 감독이 추구하는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것이다.

05.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 스틸컷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 스틸컷 ⓒ 와이드릴리즈


이 영화의 백미는 외계인에 의해 개념을 빼앗긴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지를 지켜보는 일이다. '자신과 타인'을 빼앗긴 요원은 자신의 역할은 물론 이름과 존재에 대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표류하게 된다. '소유'의 개념을 빼앗긴 히키코모리는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집을 뛰쳐나와 사회운동가가 된다. 자신의 권위를 무기로 성추행을 일삼던 나루미의 회사 대표 역시 '일'의 개념을 잃어버린 후 자신의 모든 책무를 놓고 어린 아이처럼 변해버리고 만다. 때로는 우스워 보이기도 하는 이런 장면들은 그런 개념이 없던 시절의 외계인들의 행동과 겹쳐지며, 인간에게 있어 '개념'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진지한 물음으로 바뀐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표현되는 '사랑'의 개념이 외계인의 침공을 막아낸다는 설정은 다소 유치하게 느껴질 법하다. 하지만, 신지의 몸 속에 들어간 외계인이 이미 신지가 잃어버렸던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해 궁금해 하고 또 그것을 다시 얻어내는 과정의 흐름을 이해한다면 궁극적으로 감독이 이 영화 속 '개념'이라는 장치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 단순히 The Power of Love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있던 곳에 메마를 수 있는 것 또한 사랑이며, 사랑이 메말라 있던 곳에 다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이처럼 '개념'이라는 것은 존재할 때와 존재하지 않을 때 차이를 보이며, 인간의 행동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 말이다.

06.

나루미와 신지 두 사람의 관계는 물론, 신지가 사랑의 개념을 찾기 위해 교회를 찾아가는 시퀀스는 그 동안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작품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순정 멜로와도 같은 분위기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러브 스토리를 단순히 아름답다거나 예쁘다는 식의 가볍게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유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때문이다. 외계인의 침략을 기적적으로 막아낸 후, 어렵게 살아남은 인류는 다시금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만, 사랑의 개념을 빼앗긴 나루미만큼은 회복하지 못한다.

감독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개념에도 층위의 단계가 구분된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개념들에 비해 조금 더 근원적이고 고고한, 한 단계 더 높은 이상적 개념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랑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쉽게 주고 받을 수 있는 다른 하위 계층의 개념과는 달리 사랑이라는 개념은 받는 것은 물론, 주는 것 또한 오로지 주관적 의지로만 가능하기에 고고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신지가 그녀의 곁을 지키겠노라 다짐하는 것 또한, 사랑의 순수함에 대한 그의 믿음이 이 마지막 장면을 통해 표현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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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 스틸컷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 스틸컷 ⓒ 와이드릴리즈


<산책하는 침략자>(散歩する侵略者)라는 타이틀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산책이라는 것은 사유의 과정이며, 사유는 자아와 인식 능력, 개념을 갖고 있는 인류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타이틀이 '걷는 침략자'가 아니라 <산책하는 침략자>인 까닭역시, 침략자인 외계인이 인간의 사유하는 과정을 습득하고 배워나가는 과정을 통해 인간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가 끝나고 나니 반대로, 우리가 과연 다른 존재에게 산책하는 법, 즉 인류의 생활 양식을 알려줄 만큼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씁쓸함이 조금 남는다.

영화 무비 산책하는침략자 구로사와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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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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