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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나는 돌아갈 고향이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명절이나 방학때 고향집에 갔다가 돌아온 친구들은 보기좋게 살이 올라 있곤 했고, 표정은 한결 편안해보였다. 고향이 있다면, 나도 때때로 어지러운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완벽한 휴식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다.

내게도 고향이 있지만, 당시엔 막연하게도 일상을 내려놓고 돌아갈 수 있는 곳을 상상했다. 그때까진 나고 자란 서울을 한번도 떠나본 적이 없었으므로, 일상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었다. 서울살이에 지쳤다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친구를 볼 때도, 나 역시 지금의 생활이 힘겨워질 때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안다. 고향이라는 것은 사전적 정의와는 무관하게 각자의 마음 속에 자리잡는다는 것을. 나는 고향을 떠나본 뒤 그곳을 더 사랑하게 됐고, 역설적으로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고향이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배우게 되었다. 내 고향은 서울인 동시에, 그 어느 곳이라도 될 수 있다.

또 다른 고향을 찾을 가능성을 열어두며 나의 서울을 가볍게 배반하면서도, 서울 이야기엔 언제나 귀가 솔깃해진다. 거의 평생을 살았어도 여전히 모르는 동네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서울은 어떤 도시일까. 다른 사람들은 이 도시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의 이 도시에 대한 사랑은 언제까지나 유효할까.
 <저는 아직 서울이 괜찮습니다> 책표지
 <저는 아직 서울이 괜찮습니다> 책표지
ⓒ 웨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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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직 서울이 괜찮습니다>는 4명의 사람과 8개의 사연으로 엮어낸 서울에 대한 이야기다. 오늘도 서울살이에 설레거나 서러웠을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이자 공감이고, 따뜻한 응원이다. 서울이 매개가 되었지만 사실, 서울은 중요하지 않다. 오늘도 각자의 하루 살이에 울고 웃을 모든 이에게 건네지는 이야기다. '삶이 기울 때 나를 일으키는 시작의 풍경들'을 부제로 한다.

"누군가에겐 나고 자라 당연한 고향이지만 어느 누군가에겐 마음 둘 곳 없는 타향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겐 그저 벗어나고 싶은 지긋지긋한 이곳이 어느 누군가에겐 오랜 시간 열망해온 꿈의 공간이기도 하지요." (p10, 서문)

눈에 순한 그림들과 함께 어우러진 짧은 이야기들은 어느 것 하나 할 것 없이 큰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내 추억을 떠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그 추억들을 함께 했던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친구들의 고향을 부러워하기 전에, 외로웠을지도 모르는 친구들을 조금 더 보듬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몇 개의 사연을 소개하면 이렇다. 오직 서울만을 목표로 공부하고, 대입과 함께 19년간 살았던 터전을 버리고 서울살이를 시작한 여자가 있다. 꿈을 이뤘으니, 자긍심을 갖고 시작한 그녀의 서울살이는 순탄했다. 힘겨운 날도 있었지만, 앞만 보며 씩씩하게 성장했다고. 그러던 그녀, 어느 날 문득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거대한 상실감이 그치지 않고 나를 덮쳤다. 나는 그대로 아래로 그만 가라앉아버릴 것만 같았다. 상실감은 때때로 이렇게 아무런 사건 없이, 좌절 없이 찾아오기도 하는가 보다." (p115)

그녀는 갑작스럽게 퇴사를 결정한다. 잃어버린 무언가가 분명 중요한 것 같은데, 중요한 것을 잃고도 괜찮다는 것이 슬픈 일인지, 위안이 될 일인지도 모르겠다. 혼란에 빠져버린 그녀. 일상에 찾아온 뜻밖의 일로 삶의 생기를 되찾는다. 여전히 그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현관 앞을 나선다.

"내가 잃어버린 건, 나의 일상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일상 속에서 그것을 다시 찾아, 나를 다시 행복하게 만들 의무가 있다."(p153)

사회 생활을 시작하며 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시계 초침처럼 일한 남자가 있다. 내일이 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잠을 청할 정도로 힘겨웠던 날들. 조금 더 느긋한 분침이나 시침이 아닌, 소리 없이 할일을 묵묵히 해내는 '무소음 초침'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모든 것이 어색한 '처음'을 힘겹게 버텨낸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테다.

그 목표를 이루는데 무려 1년이나 걸렸는데, 다시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다시 또 힘겨운 적응을 해야 하나 싶지만, 그렇지 않다. 이번의 새로움은 바로 사랑이기 때문에. 밥벌이의 눈물겨움을 호소하던 회사에서 괜한 웃음을 짓고, 운이 좋으면 그녀와 만날 수도 있는 엘리베이터는 로맨틱한 공간이 된다.

"그러니까 내가 서울을 좋아하게 된 것은 100% 그녀 때문이다." (p67)

넓지만, 언제나 비좁고 숨가쁘게 느껴졌던 서울이란 도시는 그에게 이렇게 변해간다. 그러니까 이 책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도 아주 따뜻한 이야기. 구구절절 공감이 가다 못해 모두 내 이야기 같기까지 하니, 이 계절이 무색하게 얼어 있던 내 마음을 어느 새 사르르 녹이고 만다.

행여 결례가 될까 조심스럽지만, 나는 고전과 신간 에세이를 각기 다른 마음가짐으로 펼치곤 한다. 전자에 삶의 통찰을 기대한다면, 후자에는 오늘을 살아내는 동지애를 기대한다. 오랫동안 끌어안을 책은 고전일 가능성이 높지만, 내겐 나의 오늘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책 또한 너무도 간절하고, 소중하다. 이 책은 그 몫을 가뿐히 해낸다.

"함께 만든 이 이야기가 당신에게 위안이 되기를,
그리고 당신의 서울이 내일은 보다 더 괜찮기를." (p11, 서문)


애잔하다가도 어느 순간 웃음 짓게 만드는 이야기들은 모두 내 이야기이고, 내 동지들의 이야기다. 이렇게 우리들은 오늘을 살아간다. 친애하는 나의 동지들의 내일이 조금은 더 괜찮길, 나 역시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동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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