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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비서에 대한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지난 14일 오전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이날 안 전 지사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정무비서에 대한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지난 14일 오전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이날 안 전 지사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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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 판결이 나오자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꽤 엇갈렸다. 법원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판결을 내렸다는 의견도 있고, 법원이 (좋지 않은 의미의) 법원다운 판결을 내린 것이라는 불만도 꽤 있었다.

그러나 판결도 판결이지만, 그 재판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대부분 비슷했다. 실제로 짧은 기자 생활의 절반 이상을 법원에서 보낸 나로서도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 성폭력 사건 재판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재판부는 이번 판결에서 '입법의 공백'을 이야기했지만, 재판부가 이번 재판에서 벌인 행태는 '사법의 공백'이 아닌가 되묻고 싶다. 우리 법에는 이미 피해자 보호 절차가 명시되어 있는데 기존의 보호 절차조차 지키지 않으면서 입법의 공백 탓을 할 일인가.

[경악 ①] 피해자에 관한 민감한 기록까지 공개 

우선 가장 큰 문제는 이번 재판의 거의 전 과정이 언론에 공개되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검찰측이 요청한 재판 전면 비공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첫 재판에서부터 생중계에 가까울 만큼 상세한 보도가 이어지는 것을 보고 사실 정말 놀랐다.

다른 사건도 아닌 성폭력 사건 재판인데, 증인의 발언 한 줄 한 줄, 증거 내역 하나 하나가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기사화되는 것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재판이 공개로 진행되는 바람에 피해자와 관련된 민감한 기록이 공개되었다. 그리고 그 기록을 어느 언론이 보도하는 일도 벌어졌다.

언론 중요도가 높은 성폭력 사건이라 해도 재판부의 직권으로 혹은 검찰의 요청으로 재판이 비공개로 진행된 사례는 꽤 있었다. 재판부가 재판의 앞부분만 공개한 후 방청객들에게 퇴정을 요청해 노트북을 든 기자들이 우르르 법정 밖으로 쏟아져나오는 것은 서초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멀리 거슬러 올라갈 것까지도 없이, 최근 연극연출가 이윤택씨 성폭력 혐의 사건을 담당한 재판부만 해도 공판준비기일과 심문기일 등 몇몇 절차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공판을 비공개로 진행했다.

안 전 지사 사건을 담당한 재판부도 이런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피해자를 보호하고 2차 가해를 막기 위해 공판을 비공개로 돌린다는 취지나 관련 법 조항 역시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이 사건 담당 재판장은 이미 대법원 공보관을 역임한 전력이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언론 관심 사건'의 재판 진행 상황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이를 보고하는 것 역시 대법원 공보관이 하는 일 중 하나다.

[경악 ②] 가림막 하나 사이에 두고 마주본 피해자와 피고인

내가 두번째로 놀란 것은 피해자 증인신문 절차였다. 이건 정말 보고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해자에 대한 신문이 비공개로 진행됐다고는 하나, 안 전 지사와 피해자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고작 가림막 하나에 불과했다.

현재 대한민국의 모든 법원은 증인지원실과 증인지원관을 마련해두고 있다. 성폭력 사건의 피고인과 피의자가 최대한 마주치지 않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 피해자가 법정에서 직접 피고인을 마주하지 않고 화상으로 증언할 수 있게끔 증인지원실에 비디오 중계 장치도 설치해두었다.

하지만 법원이 이번 사건에서 피해자를 위해 준비한 것은 고작 가림막 하나로, 피해자와 피고인은 가림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했다. 피해자 혹은 검찰의 요청이 없어도 재판부 직권으로 화상 증언을 고려해봄직 했을 텐데, 하지 않은 것인지 할 생각을 못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피고인이 업무상 위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던 피해자가 피고인과 같은 공간에서 제대로  증언을 하는 것이 쉬웠을까. 말 한 마디를 할 때마다 헛기침을 하는 피고인을 보면서 피해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다.

[경악 ③] 피고인- 피해자 '관계' 따져묻는 감정 섞인 증언

그리고 안 전 지사의 부인을 비롯한 여러 증인들의 증언 역시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피고인측이 증언의 필요성을 주장해 재판부가 안 전 지사 부인을 증인으로 받아준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를 따져묻는 감정 섞인 증언들이 사건의 실체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 증언들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재판장에게는 재판 지휘권이라는 것이 있어서, 사건의 실체와 상관이 없는 피고인, 증인의 발언은 언제든지 제지할 수 있다. 재판을 방청하다 보면, 재판장이 검찰이나 변호사측 이의를 받아들여 사건의 실체와 상관 없는 발언을 제지하는 모습을 왕왕 볼 수 있다.

사실 이번 재판의 전 과정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었던 후배 기자들은 재판 진행과 관련된 문제점을 이 이상으로 아주 깨알같이 지적해주곤 했다. 아마 아직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문제점들 역시 산더미같이 쌓여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다.

피해자 보호 장치마저 제대로 가동하지 않은 재판부

14일 오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성폭행 혐의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가운데 페미당당, 불꽃페미액션, 한국여성단체연합, 녹색당 등 여성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오후 7시부터 서울 마포구 서부지법앞에 모여 '안희정이 무죄면, 법원은 공모자다' '한국남성들은 오늘 성폭행 면허를 발부 받았다'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항의시위를 벌였다.
▲ 서부지법앞 항의시위 '안희정이 무죄면, 법원은 공모자' 14일 오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성폭행 혐의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가운데 페미당당, 불꽃페미액션, 한국여성단체연합, 녹색당 등 여성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오후 7시부터 서울 마포구 서부지법앞에 모여 '안희정이 무죄면, 법원은 공모자다' '한국남성들은 오늘 성폭행 면허를 발부 받았다'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항의시위를 벌였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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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문제는, 안 전 지사의 재판에서 드러난 문제들이 안 전 지사 재판에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안 전 지사 재판부가 특별히 성 인지적 감수성이 부족한 재판부여서 이런 문제를 드러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성폭력 사건 수사와 재판 절차에서 종종 드러나곤 하는 문제점들이 이번에 집약적으로 드러났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서초동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변호사 분들을 만나면 검찰, 경찰 혹은 법원의 성 인지 수준에 대한 불만을 종종 듣는 때가 있었다. 성폭력 감수성이 없는 경찰이나 검사가 피해자에게 이상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했다거나, 재판을 진행하는데 재판부가 피해자 보호에 눈곱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더라는 얘기들이다.

또 피고인측 변호인에 대한 날선 비판을 세우는 분들도 있었다. 이번 사건처럼 비공개로 진행된 재판에서 오간 얘기들을 마치 언론에 브리핑하는 것처럼 상세하게 알려주는 것은 사실상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나 다름없다는 얘기들도 한다.

수사, 기소, 재판 등 사법 절차에서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특별법이 마련된지도 벌써 5년이 넘었다. 그래도 한국의 사법 절차는 아직까지 이 수준이다. 여성들이 편파 수사, 편파 판결을 외치며 거리로 나오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사실 안 전 지사 재판에서 재판이 이렇게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본 몇몇 사람은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했으며, 지금도 판결의 공정성에 의문을 품고 있다. 합리적인 의심일 수밖에 없다. 법이 마련하고 있는 피해자 보호 장치마저 제대로 가동하지 않은 재판부인데, 그런 재판부의 판단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여성들은 헌법에서 벗어나는 것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헌법이 정하고 있는 법 앞의 평등, 그리고 법이 정하고 있는 평등한 수사와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계속해서 외치고 있을 뿐이다.



태그:#안희정, #헌법앞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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