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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300km에 가까운 제주도 자전거 일주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몸도 마음도 더 지칠 거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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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하나의 문화상품이 된 90년대에, 나는 내가 알 수 없는 세계를 만화로 접했다. 그 세계의 이름은 '운동하는 소년들의 꿈과 우정'쯤 된다.

당시에 나는 땀 흘리는 것을 싫어하는 까다로운 여자아이였으니, 운동도 소년도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스포츠 만화를 즐겨본 이유는, 모바일 게임이나 SNS가 없던 시대의 아이들에게, 만화책이 독보적인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특히 농구 만화 <슬램덩크>는  90년대 내내 가장 열렬하게 사랑받은 작품이었고 아직도 상당수의 올드팬을 거느리며 회자되곤 한다.

그런데 이 글을 쓰기 전에 문득 '지금 다시 슬램덩크를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슬램덩크가 창고에서 잠든 동안, 까다로운 여자아이는 일주일에 서너 번씩 바벨을 잡는 성인이 됐다(여전히 까다롭긴 하다). 무엇보다도 페미니스트가 됐다. 그리고 웬만한 스포츠 만화는 끝까지 읽을 수 없게 됐다.

당장 슬램덩크의 여성 캐릭터인 채소연과 이한나를 떠올리기만 해도 이 만화를 다시 들추는 것보다 추억으로 남겨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채소연은 '농구 좋아하세요?'라는 말 한마디로 주인공 강백호를 농구의 세계로 이끄는 미소녀이고 이한나는 강백호가 들어간 농구팀의 매니저이자, 역시 강백호와 같은 팀의 선수인 송태섭이 짝사랑하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둘은 농구하는 소년들의 들러리라는 면에서는 크게 다를 게 없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채소연은 뭘 잘 모르는 순진하고 엉뚱한 소녀이고, 이한나는 성숙하고 카리스마 있는 글래머다. 전원 남성으로만 채우기는 심심한 농구 만화에서, 이들은 예쁘장한 눈요기이자 잔재미를 유발하는 장치로써 기능한다.

장르의 공식에 충실한 스포츠 만화는 이렇듯 모종의 기시감을 선사한다. 비교적 최근에 일본 야구 만화의 전설 <에이치투(H2)를 읽으면서도 마뜩잖은 감정이 떠나지 않았다(에이치투도 90년대에 출간, 인기를 끌었는데 나는 2016년에 재발간된 단행본으로 이 작품을 처음 접했다).

내가 스포츠 만화를 끝까지 못 읽는 이유

한 가지 특이성을 꼽자면, 에이치투를 그린 아다치 미츠루는 슬램덩크의 경우보다 여성 캐릭터를 좀 더 비중 있게 다루는 편이다. 이 만화 속 소녀들은 어설픈 짝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소년들과 진지한 연애 감정을 주고받으며 작품의 한 축을 담당한다.  
 
그러나 두 명의 소년이 어린 나이임에도 승부에 있어서 진지하고 야구에 열정을 바치는 것과 달리, 두 소녀는 아무런 저항 없이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역할을 수행한다. 히카리와 하루카는 세상의 모든 남성 작가들이 반복해서 구현한 진부한 여성 캐릭터의 백화점 같다.

두 소녀는 건강하고 씩씩해서 제 앞가림을 잘하지만, 소년들을 위협할 정도로 강하진 않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예쁘며 '적당히' 똑똑하고 배려심도 깊어서 소년들의 고민을 이해하고 어른스러운 조언을 제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평소엔 실수를 연발하고 어딘가 모자란 것처럼 행동하며 절대로 화를 내는 법이 없다. 결정적으로 이들에게는 승부를 걸 게임도, 올라설 마운드도 없다. 소년들 못지않게 야구를 좋아하지만 이들의 역할은 치어리더로 한정된다.

그런데 에이치투를 끝까지 보기 위해서 내가 인내해야 할 것은, 남성 작가의 입맛대로 만들어진 여성 캐릭터가 아니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아다치 미츠루가 소위 말하는 서비스 컷으로 내놓는 '소녀의 몸'이었다.

에이치투에는 수영이나 체조를 즐기는, 짧은 머리 소녀들이 마치 풍경처럼 맥락도 없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얼굴이 잘린 채로 클로즈업되곤 하는 소녀의 가슴, 그리고 가랑이가 남성 독자에겐 서비스일지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소녀의 몸을 향한 작가의 집착과 도착적인 취향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읽혔다.

더군다나 이 만화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포르노와 팬티에 집착하고 추행을 짓궂은 장난쯤으로 가볍게 저지르기 때문에 혐의는 더욱 짙어진다. 그런데도 이들은 야한 것을 좋아하는 철없는 중년 내지 천재 소년이라서 추행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도대체 언제까지 아이들이 보는 만화에서 '사람 좋은 변태' 캐릭터를 봐야 하는가?

이쯤에서 나의 결론은 나왔다. 페미니스트라면 소년 주인공을 내세운 만화를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운동하는 소녀가 등장하는 스포츠 만화는 어떨까? 이렇게 발동된 호기심 덕분에 나는 소녀 주인공을 내세운 테니스 만화 '해피!' 와 유도 만화 '야와라', 두 작품을 성공시킨 우라사와 나오키를 알게 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들 작품 역시 마음 놓고 즐길 만한 작품은 아니었다.

'여적여'말고... '살아있는' 소녀들을 보고 싶다

 핑계를 대며 운동을 미뤘지만 마흔을 넘으면서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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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소녀 주인공이 스포츠에 입문하는 계기부터도 문제적이다. 소녀들은 스포츠를 향한 열정이나 자아실현, 출세욕이 아니라 가정 문제 때문에 운동을 시작한다. 운동으로 유명해져서 어릴 때 헤어진 아버지를 만나거나 오빠가 진 거액의 빚을 대신 갚고자 한다.

이는 1980년대에 TV 애니메이션으로 인기를 끌었던 <달려라, 하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설정이다. <달려라, 하니> 1화는 중학생 하니가 아버지, 새엄마와의 갈등 때문에 가출하고 혼자 옥탑방을 얻는 것으로 시작한다(홍두깨 선생이 찾아와서 김치를 담가주기도 한다). 구전설화에서부터 꾸준하게 명맥을 이어온, '딸을 핍박하는 가족 플롯'이 스포츠 만화에서도 반복되는 것이다.

여기에 소위 말하는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진부한 설정까지 추가된다. 우여곡절 끝에 운동을 시작한 주인공은 수순처럼 악녀 라이벌과 만난다. 악녀들은 부유하고 예쁘지만 인성에 결함이 있는 소녀로 묘사되는데, 이들이 저지르는 악행이라곤 주인공에 집착하기, 질투하기, 주인공의 남자에게 눈독 들이기, 지고 나서 분노하기가 고작이다(나는 지금도 나애리가 왜 '나쁜 계집애'인지 모르겠다).

앞서 언급한 에이치투의 두 소년이 라이벌이면서도 담대한 마음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성장하는 것과 비교하면 소녀 주인공과 악녀의 관계 설정은 너무나 얄팍해서, 여성의 우정을 폄하하려는 음모처럼 보이기도 한다. 요컨대 소녀를 내세운 스포츠 만화는 성장보다 그가 겪는 고생과 악인의 음모, 로맨스에 더 집중한다. 또 주인공이든 들러리든 간에 상관없이 운동하는 소녀의 몸은 성적으로 소비된다.

나의 바람은 좀 더 인간적이고 진지하고, 무엇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소녀 주인공들을 보는 것이다. 그를 선망한 여자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놀기까지 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슬램덩크의 인기가 또래 남자아이들을 농구 열풍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말이다. 모바일 게임과 SNS의 시대에도 살아남은 저력이라면, 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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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과 움직임에 자주 매혹되며 여성과 세상에 관해서 씁니다. 운동하는 여자 연재 중 Time's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