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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국내 최초의 전기회사인 한성전기 설립과 전차사업의 과정, 이를 둘러싼 황실과 미국인 운영자의 갈등, 조선 백성들의 반발 등을 소개했다(관련 기사 : 이병헌-김태리가 전등 점등식에서 만난 건 우연이 아니다). 

오늘은 황현 선생이 <매천야록>에서 언급한 서병달 주사를 소개하려 한다. 당시 승차거부 사건의 주역인 그는 어떤 인물인지, 대한제국의 전기사업은 이후 어떻게 됐는지 살펴보겠다. 더불어 이런 사실들을 근거로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옥에 티가 무엇인지 짚어보자. 

서병달 주사는 어떤 인물인가? 

동대문발전소 활동사진전람소와 경성수도양수공장 한성전기 운영대행을 하면서 콜브란과 보스트윅은 1903년 동대문발전소 전차 기계창 앞마당에 옥양목으로 된 스크린을 세워 만든 활동사진 전람소(왼쪽 사진)를 운영했는데 최초의 영화상영관으로 추정된다. (왼쪽 사진) 일요일과 비오는 날을 제외하고 매일 밤 8시부터 10시까지 활동사진이 상영됐으며, 초기 목적은 채권을 둘러싼 대한제국 정부와의 갈등과 전차사업에 대한 백성들의 반감을 줄여보려는 것이었지만 입장료가 동화 10전 정도에 관람객이 늘어나 이후 수익사업화 했다. 이후 콜브란&보스투윅상사는 1908년에 뚝섬에 경성수도양수공장을 지어 수도사업을 시작했다. (오른쪽 사진) 침전지, 여과지, 정수지, 송수실 등을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상수도 시설로 그해 9월 4대문 안과 용산 일대 12만5천명에게 수돗물이 공급됐고 해방 후 뚝섬 정수장으로 이름으로 1990년까지 사용됐다. 현재는 수도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동대문발전소 활동사진전람소와 경성수도양수공장 한성전기 운영대행을 하면서 콜브란과 보스트윅은 1903년 동대문발전소 전차 기계창 앞마당에 옥양목으로 된 스크린을 세워 만든 활동사진 전람소(왼쪽 사진)를 운영했는데 최초의 영화상영관으로 추정된다. (왼쪽 사진) 일요일과 비오는 날을 제외하고 매일 밤 8시부터 10시까지 활동사진이 상영됐으며, 초기 목적은 채권을 둘러싼 대한제국 정부와의 갈등과 전차사업에 대한 백성들의 반감을 줄여보려는 것이었지만 입장료가 동화 10전 정도에 관람객이 늘어나 이후 수익사업화 했다. 이후 콜브란&보스투윅상사는 1908년에 뚝섬에 경성수도양수공장을 지어 수도사업을 시작했다. (오른쪽 사진) 침전지, 여과지, 정수지, 송수실 등을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상수도 시설로 그해 9월 4대문 안과 용산 일대 12만5천명에게 수돗물이 공급됐고 해방 후 뚝섬 정수장으로 이름으로 1990년까지 사용됐다. 현재는 수도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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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달 주사는 어떤 인물이기에 뜬금없이 미국인들의 전기사업을 막고 나선 것일까? 당시 한성전기를 뺏으려는 미국인들은 보부상 출신의 친왕파 개혁가이자 황실 재정담당이었던 이용익이 배후에 있을 거로 추정했다.

실제 콜브란은 채권을 빌미로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송도까지의 경편철도 부설, 도로건설, 수도사업, 청량리선(최초 노선) 연장 사업권에 황실물품 공급권까지 따냈지만 이용익 등의 저지로 그 외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실제 1908년에 뚝섬 정수장(경성수도양수공장, 현재 수도박물관)을 지어 상수도 사업도 했다는 기록과 동대문 전차기지 기계창고에 영사기를 설치해 최초로 극장사업(입장료 1인당 구리돈 5전)도 한 거로 자료가 남아있다. 하지만 서병달이 이용익의 수하일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서병달(徐丙達)의 본명은 서병칠(徐丙七)로 한때 충북관찰부주사와 법부법률기초위원을 지난 인물이다. 화서학파 김평묵의 제자였다고 한다. 조선말 성리학자 이항로로부터 출발한 화서학파는 구한말, 그리고 식민시절 위정척사운동 및 항일독립운동의 기수였다.

화서학파의 초기 거두 김평묵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우리가 익히 잘 아는 항일 의병장 유인석 장군도 그의 문하생이었을 정도로 화서학파가 대한제국의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이 엄청났다. 미국인들은 서병달 주사를 전기회사의 운영에 반감을 품은 전환국 관리 정도로 생각했다는데, 사실은 서구 열강에 대한제국이 놀아나는 것을 참지 못한 우국지사였던 거다.    

조선 최초 전기사업의 최후  

1904년 결국 한성전기는 콜브란의 손으로 넘어갔다. 당시 대한제국은 채무 150만 엔(일화)중 결국 절반인 75만 엔 정도를 채무변제 겸 투자자금으로 내어놓고 경영권을 넘겨준다.

그래서 한성전기는 결국 15년간 매각이 불가능한 한미합작회사 '한미전기회사'로 바뀌었으며 애초 계약(자본금 150만 엔)보다 50만 엔이 많은 자본금 일화 200만 엔(미화 100만 달러)에 대한제국 황실과 콜브란측이 5:5로 지분을 소유하게 됐다.

콜브란은 아예 미국법에 적용되도록 코네티컷주 셀브룩에 본사를 두었다. 한양에 있는 사무실은 지사에 불과했을 거로 보인다. 콜브란 측은 회사의 자산을 담보로 영국과 미국 투자사들로부터 자금을 차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회사 매각이 목적이었기에 새로운 투자를 전혀 하지 않았다.

한미전기 설립계약서 및 한미전기 관련 사진 1904년 2월 19일 고종의 대리인 이학균과 콜브란&보스트윅이 체결된 한미전기회사 설립계약서(아래 왼쪽 사진), 대한제국 측은 콜브란&보스트윅은 한성전기의 특허권과 재산의 소유자이며 신설법인 한미전기의 운영권자임을 인정하고 신규로 일화 40만 엔을 현금 출자하며 나머지 35만 엔을 약속어음으로 발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현금 출자한 40만 엔도 채무변제로 보고 몰수하며, 신설법인은 미국 법률에 의거하여 하기로 되어 있다. (1904년7월 18일 설립) 한미전기회사라는 바뀐 법인명을 사용하긴 했지만 실제 영문명은 미한전기(American Korean Electric Co.)를 사용하였음을 발전소간판(위쪽 사진)과 승차권(아래 오른쪽 사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한미전기 설립계약서 및 한미전기 관련 사진 1904년 2월 19일 고종의 대리인 이학균과 콜브란&보스트윅이 체결된 한미전기회사 설립계약서(아래 왼쪽 사진), 대한제국 측은 콜브란&보스트윅은 한성전기의 특허권과 재산의 소유자이며 신설법인 한미전기의 운영권자임을 인정하고 신규로 일화 40만 엔을 현금 출자하며 나머지 35만 엔을 약속어음으로 발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현금 출자한 40만 엔도 채무변제로 보고 몰수하며, 신설법인은 미국 법률에 의거하여 하기로 되어 있다. (1904년7월 18일 설립) 한미전기회사라는 바뀐 법인명을 사용하긴 했지만 실제 영문명은 미한전기(American Korean Electric Co.)를 사용하였음을 발전소간판(위쪽 사진)과 승차권(아래 오른쪽 사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인터넷 자료 편집, 승차권은 한국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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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909년에 이들은 일한와사에 한미전기를 총 170만 엔(매각액 120만 엔, 부채 50만엔)에 팔아치웠다. 일한와사는 통감을 지낸 소네 아라스케(曾彌荒助)의 아들 소네 간지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받은 가스공급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1908년에 동경에 설립한 가스판매 회사다.

이때 대한제국은 절반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매각대금의 절반을 받지 못했다. 콜브란이 이를 정산하지 않고 런던으로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1915년 일한와사가 이름을 경성전기로 변경했으며, 조선최대의 전기회사이자 운수회사로 성장했다. 부영버스, 경인버스 등 경성에 버스가 도입되면서 경성의 대중교통사업에 잠시 경쟁이 일어나는 듯했으나, 전차사업에 엄청난 이권을 가지고 있던 총독부가 경성전기 편을 들면서 결국 이들 버스회사들은 경성전기에 합병돼 버렸다.

한미전기 인수한 일본인 기업 일한와사와 한미전기 후신 경성전기의 사옥 1908년에 동경에 세워진 가스회사 일한와사는 바로 대한제국으로도 진출해 가스사업을 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조선을 병탄할 목적으로 미국인이 주도하는 전기사업을 피해 일본정부가 정책적으로 일한와사의 조선 진출을 지원하였으며, 일한와사의 한미전기 인수도 1906년에 한성에 설치된 통감부가 물밑 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왼쪽사진). 이후 일한와사는 1915년 아예 회사이름을 ‘경성전기’로 바꾸었으며 1928년에는 을지로에 5층 규모의 사옥을 건설했다. 이 사옥이 바로 현재 을지로역 사거리에 있는 한국전력 서울지역본부 건물이며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1호이다.
▲ 한미전기 인수한 일본인 기업 일한와사와 한미전기 후신 경성전기의 사옥 1908년에 동경에 세워진 가스회사 일한와사는 바로 대한제국으로도 진출해 가스사업을 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조선을 병탄할 목적으로 미국인이 주도하는 전기사업을 피해 일본정부가 정책적으로 일한와사의 조선 진출을 지원하였으며, 일한와사의 한미전기 인수도 1906년에 한성에 설치된 통감부가 물밑 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왼쪽사진). 이후 일한와사는 1915년 아예 회사이름을 ‘경성전기’로 바꾸었으며 1928년에는 을지로에 5층 규모의 사옥을 건설했다. 이 사옥이 바로 현재 을지로역 사거리에 있는 한국전력 서울지역본부 건물이며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1호이다.
ⓒ 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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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1961년 경성전기와 더불어 남한의 남선전기, 조선전업 세 회사를 합병해 국유화함으로써 한국전력이 탄생했던 거다. 지금 남대문로 한국전력의 서울지역 본부로 쓰이는 건물이 1921년에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로 지어진 경성전기의 사옥이라고 하니 조선에서 전기사업은 황금알이었던 게 분명하다. 

한국전력이 알아야 할 또 다른 역사  

지난해 2017년 한국전력은 기자들에게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초기 한성전기 사업에 개입한 보스트윅(콜브란의 파트너)의 외손녀 웬디 세들러라는 사람으로부터 ▲ 고종 황제와 해리 보스트윅 등이 주고받은 편지 ▲ 한성전기 초기 사옥과 동대문변전소를 담은 1900년대 초반 사진들 ▲ 한성전기 운영에 대해 보도한 미국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기사 등 해리보스트윅 가문이 소장해온 한성전기에 대한 자료들을 넘겨받았다는 내용이었다. 한 연구자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성과였다.

한국전력에 한성전기 초기 사료를 전달한 웬디세들러와 사료 일부 보스트윅의 외손녀 웬디세들러가 전달한 사료들 중 공식레터지로 사용된 양식에는 한성전기 사명은 작게 표기되어 있고 콜브란과 보스트윅의 이름과 그가 가진 철도회사 등의 이름이 가운데 크게 박혀 있다.(하단 사진) 전차 가격표는 대한제국 시절인 1900년 7월의 것인데 'YEN‘(엔)이라는 단위를 사용하고 있다.(상단 오른쪽 사진)
▲ 한국전력에 한성전기 초기 사료를 전달한 웬디세들러와 사료 일부 보스트윅의 외손녀 웬디세들러가 전달한 사료들 중 공식레터지로 사용된 양식에는 한성전기 사명은 작게 표기되어 있고 콜브란과 보스트윅의 이름과 그가 가진 철도회사 등의 이름이 가운데 크게 박혀 있다.(하단 사진) 전차 가격표는 대한제국 시절인 1900년 7월의 것인데 'YEN‘(엔)이라는 단위를 사용하고 있다.(상단 오른쪽 사진)
ⓒ 한국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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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보도자료를 보면서 반가운 한편 고종이 보낸 서신의 내용이 정말 궁금해졌다. 당시 한성전기를 설립하고 미국인들에게 하청을 넘기는 과정에는 미국대리공사 알렌 박사와 궁내부 고문관 윌리엄 샌즈가 거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윌리엄 샌즈는 제주신축민란(이재수의 난)때 관군 100명과 함께 제주로 와 민군으로부터 성을 탈환하는 데 개입한 인물이다.

이들이 알선한 콜브란과 보스트윅은 미국상인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와 경인선 공사를 같이하던 이들이었다. 제임스 모스는 1890년대 초 조선에 와서 경인선 부설권(제물포-노량진)을 따내고 이를 다시 일본에 넘기면서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원래 일본이 받았던 부설권을 당시 미국공사인 알렌의 도움으로 인수한 모스는 1897년 경인선 공사를 시작하지만,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부설권을 빼앗겼다고 여기는 일본지주들로부터 설로 건설을 위한 토지매입에 방해를 받게 된다.

더불어 일본의 흑색선전으로 자금난을 겪자 공사를 중단하고 1899년 5월 10일 일본이 세운 '경인철도합자회사'로 철도사업을 넘겨 버렸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지켜본 콜브란과 보스트윅은 과연 계약대로 하청 업무를 잘 수행하는 정직한 사업가였을까.

알렌 (Horace Newton Allen)과 모스[James. R. Morse) 호러스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출신의 의사이자 선교사(왼쪽 사진). 1984년 의료선교로 내한, 미공사관 의사, 조선 황실의사 겸 정치고문을 지냈으며 한국 최초 현대식 병원 광혜원을 설립. 1890년부터 미국공사관 서기가 되면서 본격적인 외교활동 시작. 1895년 운산광산(雲山鑛山) 채굴권, 1896년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인 모스(Morse)에게 넘겨주고 1897년 미국공사겸 총영사가 되면서 전력회사 설립권을 미국인 콜브란에게 넘겨주는 등 대한제국의 수많은 이권사업에 개입했다.  
제임스모스(James. R. Morse미국 상인, 오른쪽 사진). 일본에 있다가 내한 한 후 조선 철도부설권을 획득하려 고전 분투하던 중 미국 공사의 도움으로 이완용과 철도창조계약을 체결하였으나 반대하는 세력이 강하여 사업권 확보에 실패, 당시 모스는 조선 정부에 왕복 여비와 폐업 손해배상으로 1만원을 요구했을 정도로 장사치에 불과했다. 이후 철도부설권은 1894년 강압적으로 일본인들에게 넘어갔으나 1896년 3월29일 고종의 아관파천 중에 부설권이 다시 모스에게로 넘어갔다. 모스는 운산금광채굴권까지 미국공사의 도움으로 획득했다.
▲ 알렌 (Horace Newton Allen)과 모스[James. R. Morse) 호러스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출신의 의사이자 선교사(왼쪽 사진). 1984년 의료선교로 내한, 미공사관 의사, 조선 황실의사 겸 정치고문을 지냈으며 한국 최초 현대식 병원 광혜원을 설립. 1890년부터 미국공사관 서기가 되면서 본격적인 외교활동 시작. 1895년 운산광산(雲山鑛山) 채굴권, 1896년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인 모스(Morse)에게 넘겨주고 1897년 미국공사겸 총영사가 되면서 전력회사 설립권을 미국인 콜브란에게 넘겨주는 등 대한제국의 수많은 이권사업에 개입했다. 제임스모스(James. R. Morse미국 상인, 오른쪽 사진). 일본에 있다가 내한 한 후 조선 철도부설권을 획득하려 고전 분투하던 중 미국 공사의 도움으로 이완용과 철도창조계약을 체결하였으나 반대하는 세력이 강하여 사업권 확보에 실패, 당시 모스는 조선 정부에 왕복 여비와 폐업 손해배상으로 1만원을 요구했을 정도로 장사치에 불과했다. 이후 철도부설권은 1894년 강압적으로 일본인들에게 넘어갔으나 1896년 3월29일 고종의 아관파천 중에 부설권이 다시 모스에게로 넘어갔다. 모스는 운산금광채굴권까지 미국공사의 도움으로 획득했다.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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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과 김태리의 첫 만남 장소는 실제로 가능했을까  

그렇다면 <미스터 션샤인>의 묘사는 무엇이 문제일까?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은 1902년에서 1903년을 지나고 있다. 한성전기 채권을 둘러싼 대한제국 정부와 미국공사관·콜브란 측의 공방이 격심할 때다. 당시 백성들은 전차에 대한 반감이 심했는데,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단체나 사건에 대해서는 가상의 스토리라는 단서를 달고 있으니 그건 그렇다 치고, 전차와 전등 도입과 관련해 극 중 옥에 티를 한번 찾아보자. 

<미스터 션샤인>에서 미국인 로건테일러 저격사건을 조사하는 주인공 유진초이(이병헌, 미 해병대 장교 겸 미국영사 대리)의 극 중 대사를 다시 살펴보자. 사건 당일 전등 점등식이 있었고, 그 거리는 일본인 이민자들의 거주지로 각광받던 진고개(本町), 즉 지금의 충무로란다.

미국의 정보를 팔아넘긴 로건을 죽이라는 명을 받은 유진초이가 암살일을 그날로 정한 이유는 뭘까. 당시 진고개에 점등식이 있어 사람이 많고, 발전기 소리로 총소리를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보면 옥에 티다. 유진초이가 조선 땅을 밟은 게 1902년(광무 6년)이라고 나오는데 진고개 점등식은 역사적 기록이 없다. 여러 자료에서 언급되는 한성전기의 점등식은 실제로 1901년 8월 17일 동대문발전소에서 열렸다. 당시 발전소 부지는 을미조약(1905년)에 반대하며 대궐 앞에서 조병세 등과 시위를 벌이다 일본 헌병에 의해 해산당해 자결한 민영환 대감이 제공한 거였다.

당시 정·재계 고위관료들을 초청하고 이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종로 등에서 출발하는 특별 전차까지 운행됐다. 밤 9시 30분에 거행된 이 날 점등식에서 발전기를 돌리기 시작하자 발전소 주변의 20여 개 등과 주요 대로의 가로등이 일제히 켜져 한성 도성을 밝혔다고 한다. 

점등식의 사진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당시 점등식 행사 참석 초대장 사진은 존재한다. 정식명칭은 'The Opening of Seoul Electric Company's Electric Lighting Plant'(한성전기회사 전기등기계개설예식)로, 토요일에 열렸다. 초대장에는 종로, 서문(서대문으로 추정) 등지에서 행사장으로 운행되는 특별 전차의 시간 등도 기재돼 있다. 당시 동대문발전소의 점등식 뉴스를 <황성신문>은 이렇게 전했다.
 
"전등 개설식을 기념하여 8시부터 10시까지 일반 차량은 물론이고 특별 전차까지 동원하여 운행하는데 초만원을 이루었다. 그리고 1년 전 4월 10일 이래로 종로에만 세 개의 가로등을 점등하였으나 이 날 밤 11시부터는 전기 철도 연변 네거리 등에는 모두 가로등을 점화했던 것이다." (출처: 금성출판사 티칭백과)  

인터넷 및 신문사의 오늘의 역사, 심지어 한국의 전기 사업에 대한 전문적인 자료들의 상당수가 1901년 8월 17일 진고개에서 점등식이 있었다고 기술한다. 심지어 이때 이미 명동과 진고개에 600등이 설치됐다는 내용도 보인다. 

그러나 이런 언급들은 오류로 보인다. 동대문발전소 점등식 시점인 8월에는 그 만한 여건이 안 됐다. 전차 운행을 위한 설비에 겨우 발전기 2대 정도를 추가했고, 도성 전체의 전등 수가 약 613등에 불과했다. 여기서 도성 전체 613등은 와전돼 잘못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전등 수는 이후 꾸준히 늘었지만 1902년 10월까지도 도성 전체 전등 수가 2100여 등 수준이었다. 그러면 이 드라마에서 1902년에 있었다는 점등식 이야기는 뭘까?

가로등은 밝혀졌으나, 점등식은 없었다

1901년에서 1902년 사이 한성의 전등 보급 속도 한국근대 電力産業의 발전과 京城電氣(株) 자료, 연세대 경제학과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오진석, 2006년, p47
▲ 1901년에서 1902년 사이 한성의 전등 보급 속도 한국근대 電力産業의 발전과 京城電氣(株) 자료, 연세대 경제학과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오진석, 2006년, p47
ⓒ 오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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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전기가 생기기 전에 전등은 전기사업이라기보다는 황실의 독자적인 도입이었다. 1887년에 경복궁에 전등을 설치한 기록이 있지만 가정용이었고 종로통에 한성전기의 가로등 3개가 설치된 것이 1900년 4월 10일(현재 전기의 날)이었다.  

전차 운행노선 구간을 따라 가로등이 조금씩 확대되었으나 본격적인 전등사업은 이듬해 1901년에 시작됐다. 고종 황제가 계신 경운궁(현 덕수궁)에 전등이 켜진 것이 6월 17일이었고 두 달 후 동대문발전소에서 가진 대규모 점등식을 기점으로 한성전기의 전등사업은 본격적으로 확대됐다.  

그중 최대 규모였던 진고개의 전등사업으로 가정용이나 상점용은 어느 정도 보급이 돼 있었겠지만 가로등의 경우는 1902년 12월 1일부터 550간(1km) 거리에 16촉광 전등 39개가 세워져 거리를 밝히기 시작했다. 그나마도 <미스터 션샤인>에서 그려진 것처럼 길 좌우로 2줄의 가로등이 설치된 것이 아니라 사진에서 보다시피 한쪽으로만 가로등이 설치됐다. 그리고 이날 진고개에 점등식이 있을 법하지만 실제 사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는 진고개의 풍경 일본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던 초기의 진고개는 여전히 좁은 길이었으며 주변으로 한옥과 초가집들이 즐비하다. 길이 좁았기에 초기 설치된 가로등은 ‘미스터 션샤인’의 화면처럼 길 양쪽으로 설치되지 않고 한쪽에만 설치되어 있어도 거리를 밝히기에 충분했다. 에디슨의 탄소필라멘트를 사용한 전구는 1880년 이미 발명되었지만 당시엔 아직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당시 한성전기는 1800년대 초에 영국 과학자 험프리 데비(Humphry Davy, 1778~1829)가 발명한 아크등을 사용했다.
▲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는 진고개의 풍경 일본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던 초기의 진고개는 여전히 좁은 길이었으며 주변으로 한옥과 초가집들이 즐비하다. 길이 좁았기에 초기 설치된 가로등은 ‘미스터 션샤인’의 화면처럼 길 양쪽으로 설치되지 않고 한쪽에만 설치되어 있어도 거리를 밝히기에 충분했다. 에디슨의 탄소필라멘트를 사용한 전구는 1880년 이미 발명되었지만 당시엔 아직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당시 한성전기는 1800년대 초에 영국 과학자 험프리 데비(Humphry Davy, 1778~1829)가 발명한 아크등을 사용했다.
ⓒ tvN, 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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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고개의 가로등 설치 꽤 늦은 편이었다. 그나마 이때 가로등 사업이 진행된 것도 일본인 상권에 대한 보호 목적이 컸으며 조선인과 잦은 마찰이 있던 진고개 일대의 일본 거류민들의 요구였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한양은 해만 떨어지면 암흑이었고 일본인 상인들은 그들의 수탈에 치를 떨고 있는 조선인들이 무서웠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일본 상점들에는 이미 전등이 보급돼 있었다. 전기요금이야 야간 치안 문제로 장명등까지 활성화하고 있던 한성부가 지급하겠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시설에 대한 관리 부담이 큰 데다가 전차 노선이 아닌 가로등 사업을 굳이 한성전기가 서두를 이유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진고개에 가로등이 보급되고도 전등이 깨지고 전선이 끊어지는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유진초이가 말하는 그 시기에 정확히 진고개에 가로등이 밝혀진 건 사실인데, 그가 말하는 거창한 점등식의 기록은 없는 거로 보인다. 한성전기의 전등사업 개시를 기념하는 대형 점등식 행사는 그 전년도 동대문에서 이미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극 중에서 1902년 진고개 점등식을 또 만들어 낸 것은 극 중 저격사건의 전개를 위한 허구적 장치가 필요했기 때문인 듯하다. 

두 번째로 과연 진고개에 발전기가 있었을까 하는 문제다. 당시 진고개의 전등사업은 이전 경복궁 내에 설치된 발전 및 전등 설비와 달리 전기회사의 본격적인 전등사업이었고 그래서 발전소가 진고개가 아닌 동대문에 있었다. 

동대문 발전소는 이미 전차 사업을 위해 한성전기가 마련한 것으로 민영환 대감의 땅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용산 등지에 발전소가 추가로 만들어졌지만 극 중 저격 사건 시점에는 여전히 동대문 발전소가 진고개에 전기를 공급했을 것이다. 지금의 동대문과 충무로 거리를 감안해보면 발전기 소리가 총소리를 가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날 저격당하기 직전 로건이 술자리에서 '발전기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라고 말하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로건의 귀는 소머즈 정도가 돼야 할 거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발전기를 언급하는 로건테일러 극중 진고개 전등점등식 당일 로건테일러는 술자리에서 전등을 밝혀주는 발전기가 마치 근처에 있는 듯 소리 내어 이야기 한다.
▲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발전기를 언급하는 로건테일러 극중 진고개 전등점등식 당일 로건테일러는 술자리에서 전등을 밝혀주는 발전기가 마치 근처에 있는 듯 소리 내어 이야기 한다.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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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미스터 션샤인>의 미술 고증은 놀랍다  

이 드라마의 미술적 시대묘사는 아주 탁월하다. 극 중에 등장하는 전차의 지붕 위를 보면 '도로오 히이로'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이건 'old hero'라는 당시 팔리던 담배의 광고판이다. 실제 당시 사진들을 보면 이 광고판을 달고 다니는 전차들이 나온다.

한성전기 전차가 운영한 차량광고판 한성전기는 전차 운영 초기부터 차량의 지붕에 광고판을 운영했다. (왼쪽 사진) 당시 사진 속의 ‘로이히 도루오’는 왼쪽부터 읽어 내려가면 ‘오루도 히이로’가 되는데 이는 'Old Hero'라는 당시 담배 브랜드의 광고판이다. ‘미스터 선샤인’의 전차의 모습은 간판이 옆으로 두 번 연속 해서 달려 있지만 당시 전차의 광고판을 제대로 재현하고 있다.(오른쪽 사진)
▲ 한성전기 전차가 운영한 차량광고판 한성전기는 전차 운영 초기부터 차량의 지붕에 광고판을 운영했다. (왼쪽 사진) 당시 사진 속의 ‘로이히 도루오’는 왼쪽부터 읽어 내려가면 ‘오루도 히이로’가 되는데 이는 'Old Hero'라는 당시 담배 브랜드의 광고판이다. ‘미스터 선샤인’의 전차의 모습은 간판이 옆으로 두 번 연속 해서 달려 있지만 당시 전차의 광고판을 제대로 재현하고 있다.(오른쪽 사진)
ⓒ tvN, 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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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8화에 고종을 알현하고 나오는 유진초이의 뒤로 보이는 덕수궁 문의 현판이 대안문(大安門)으로 돼 있다. 현재는 대한문(大漢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원래는 대안문(大安門)이었고 1906년에 현판이 교체됐다.  

극 중의 시간이 아마도 1903년 정도일 걸로 추정되므로 드라마 제작진의 섬세함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전기에 대한 부분은 좀 소홀했던 것 같다. 작가가 대본을 쓸 때 전등이 그즈음에 도입된 것은 파악했는데 진고개 점등식의 유무나 정확한 시기와 발전소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조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대안문을 재현한 '미스터 선샤인'의 대안문 현재는 덕수궁의 대한문이 ‘大漢門’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지만 1899년 3월부터 1906년 4월 사이에 그 자리에는 가로 347㎝, 세로 124㎝ 크기로 ‘대안문(大安門)’이라 적은 현판이 걸려 있었으며 이는 대한제국 시기에 대신을 지낸 민병석이 ‘크게 편안하다’는 의미로 썼다고 한다. 을사늑약(1905) 이듬해인 1906년 4월 지금의 현판으로 바뀌었으나 새로운 현판의 의미나 교체 배경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미스터 선샤인’ 유진초이가 고종을 알현한 것이 1903년 정도로 추정되므로 화면 속 궁궐 문을 걸어 나오는 유진초이 뒤로 보이는 대안문(大安門)이라는 현판은 제작진의 섬세함을 보여준다.
▲ 실제 대안문을 재현한 '미스터 선샤인'의 대안문 현재는 덕수궁의 대한문이 ‘大漢門’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지만 1899년 3월부터 1906년 4월 사이에 그 자리에는 가로 347㎝, 세로 124㎝ 크기로 ‘대안문(大安門)’이라 적은 현판이 걸려 있었으며 이는 대한제국 시기에 대신을 지낸 민병석이 ‘크게 편안하다’는 의미로 썼다고 한다. 을사늑약(1905) 이듬해인 1906년 4월 지금의 현판으로 바뀌었으나 새로운 현판의 의미나 교체 배경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미스터 선샤인’ 유진초이가 고종을 알현한 것이 1903년 정도로 추정되므로 화면 속 궁궐 문을 걸어 나오는 유진초이 뒤로 보이는 대안문(大安門)이라는 현판은 제작진의 섬세함을 보여준다.
ⓒ tvN 및 인터넷 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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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서는 <미스터 션샤인>에서 구한말 신문물의 요람으로 그려지는 진고개(충무로)의 풍경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과연 진고개에 일본인들이 몰려들게 된 이유는 무엇이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그려내는 풍경들에 또 어떤 옥에 티가 숨어 있을까? 

(*다음 편에 계속)    

[참고문헌]  

1. <한전국기통신 100년사>, 1984년, 전기통신공사
2. <한국근대 전기산업의 발전과 경성전기(주)>, 2006년, 오진석
3. <대한제국의 전기사업-한성전기회사를 중심으로>, 김연희
4. <관광안내로 본 근대 도시 경성 -1920~30년대 도해 이미지를 중심으로>, 2017년, 김선정
5. <도시 '본정통'의 장소 기억 -충무로·명동 일대의 사례>, 2013년, 전종한
6. 전우용의 서울탐사 블로그-센긴마에히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블로그와 동시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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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방송 채널에서 교양다큐멘터리를 주로 연출했, 1998년부터 다큐멘터리 웹진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운영. 자연다큐멘터리 도시 매미에 대한 9년간의 관찰일기 '매미, 여름 내내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16년 공개, 동명의 논픽션 생태동화(2004,사계절출판사)도 출간. 현재 다채널 방송사에서 전략기획업무 총괄 및 예능프로그램 기획.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