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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병설,김수영, 주경철 외 18세기 도시
 정병설,김수영, 주경철 외 18세기 도시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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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인 지금 책 <18세기 도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래 세대는 수 세기 후 우리 시대 도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도시를 독해하는 방법이 있긴 한 걸까. 이방인과 원주민으로 구분되는 인종의 대결, 경제적 침탈, 군사적 억압이 공존하는 공간이 바로 도시였다. 층층히 단계별로 쌓인 역사에서 빛만을 보거나 그림자만을 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빛과 그림자가 동행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삶이자, 우리가 사는 공간이지 않겠는가.

도시 공간 속에는 그 동안의 역사, 철학, 그리고 문학이 있다. 날줄과 씨줄로 둘러싸여 어느 것 하나 외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타인이 머문 어느 한 시대의 공간을 유람하듯 가볍게 배낭을 메고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덧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낯설음이 느껴질 것이다.

새롭게 보는 것은 창의적 혜안을 얻는 열쇠가 될 것이다. 작은 주거 공간에서 마을로 뻗어 나오는 문화의 힘을 더 이상 아무개 교과서에만 찾을 필요는 없다. 살아가는 힘이 공간에 있다. 그 공간에 파생된 인문 정신이 마을을 벗어 날 것이고 국경을 초월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코 과대망상이 아니다.

교류의 시작과 장소의 역사인 18세기 도시는 한 단어로 요약하면 로컬이다. 로컬은 한 시대에 포함된 지역성을 의미한다. 지역성이란 결코 한 가지 색으로 표현할 수 없다. 그 지역의 기후와 환경에 맞춰 지역성은 발달했다. 태어나고 자란 지역은 밋밋한 일상만 있었다. 그 일상의 개념을 깬 것이 바로 '여행'이다.

17세기 말부터 유럽에는 여행열풍이 불었다. … 먼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에 강렬한 호기심을 느낀 것이다. 특히 영국과 독일의 귀족 출신 젊은이들이 유럽은 물론 근동지역으로 여행을 떠나는 풍토가 유행처럼 번졌는데, 이를 이르는 말이 그랜드 투어다.(172쪽) 

그랜드 투어로 말미암아 바라본 세상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언어가 대표적이며 그 밑받침이 되는 것에는 사상이 있었다. 중세 도심의 길을 걸으며 다양한 언어의 빛깔을 눈으로 보는 것은 어떤 기쁨일까. 때론 소통의 불능에서 역사는 어떤 식의 폭력으로 원주민을 제압했는가. 여행은 발견을 주는 동시에 전쟁을 일으켰고, 그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다. 식민지의 체제를 굳건히 하기 위해 유창한 언어로 사상을 세웠다.

도시를 유람한다는 것은 사상의 운하를 파고 수만 개의 언어를 체험하는 것이다. 언어는 아무렇게나 마구 뻗친 가지가 아니었다. 반드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혹자는 오랜 세월 동안 둥글게 마모된 삶의 지혜라 일컫기도 하고 논리라 부르기도 했다. 지혜는 다음 세대로의 전승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관광하며 보는 유물과 유산일 것이다. 반면에 논리라 부르는 것은 한 가지 의미로만 정의할 수 없다. 오히려 한 가지만 강요하던 시절에 위험을 우리는 근 현대의 오랜 질곡의 역사에서 배웠다. 그것을 전체주의라는 다른 말로 말이다.

흥망성쇠의 역사 속에 살아남은 논리는 버티기만 한 것이 아니다. 논리는 모래성의 누각처럼 걸터앉아 있었다. 그것은 기회주의적 편협함이 아니다. 보다 넓은 용서, 화해를 비롯한 역사적 타협을 이루려는 자세였다. 상대를 보고, 때론 공간을 보고 독단이니 아집이니 평 하는 것, 시대적 착오니 하는 것, 그것은 다양한 가치와 그 가치를 담을 준비가 된 사람의 입에서 나와야만 다음의 올바른 기능을 발휘할 것이다.

말로만 쌓은 성(城)은 너무 쉽게 허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의 몫 아니겠는가. 공간적 구조 속에 덧이어 꿴 누더기, 그 누더기를 모아 새 옷을 만드는 일, 이것이 지역에 사는 사람의 할 일이자 앞으로의 삶을 짚어나가는 방법 아니겠는가.

책을 읽다가, 제네바의 천덕꾸러기가 된 루소를 만났다.

루소는 제네바에 극장을 건립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연극이 아니라 시민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애국심을 함양하는 대중적인 축제를 열자고 제안한다. 루소가 어린 시절 "장 자크야, 네 나라를 사랑해라. 이 선량한 제네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느냐, 그들 모두 친구이고 형제다. 기쁨과 화합이 그들 사이에서 넘쳐 흐르고 있다."(<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던 것도 시민군이 기동훈련을 마친 후 남녀노소가 생제르베 광장에 모여 포도주를 마시고 춤을 추는 축제에서였다. 이런 발언 때문에 루소는 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억누르면서 프랑스라는 외세를 빌려 과두정치를 공고히 하려는 제네바 권력자들의 반감을 샀고, 문명의 발전을 통한 세계주의를 지향하는 계몽주의자들과도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133쪽) 

우리가 대세라고 부르는 당시의 유행을 루소는 거부했다. 그 결과 루소는 모티에서 추방당해 영국으로 피신했다. 핍박이라 여긴 루소는 말년에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자서전 집필에 온 힘을 쏟았다.

계몽이란 루소의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높은 도덕률을 요구하며 누군가에게 무언가 가르쳐 깨우치겠다는 발상은 여전히 이 시대 지역성에 도드라진 모습 중에 하나다. 제집 앞마당에 깨진 화분은 내팽개치고 서울 중심의 사고는 늘 있어왔다. 돌아와서 남은게 무엇인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오랫동안 공감할 에너지를 얻지 못했다. 그저 파도가 일 듯 바람이 일고, 또 아스라졌다.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축제란 그 말 그대로 가르쳐서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끼리 어우러져 스스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인덕을 얻는 것이기도 했다. 당장에 성과가 보이지 않는 일이었다, 당시 위정자들은 군중이 모이면 불안한 생각을 품고, 그들을 타이르기 위해 '예'를 말했는지도 모른다. 세상과 결별을 선택한 선지자의 판단은 당연지사였다. 스스로를 달랠 시간,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전체 5부로 구성된 책의 마지막은 한국을 다뤘다. 서구 도시의 발전은 동양 도시의 희생 없이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그 가운데 18세기 한국의 역사는 민족의 뼛가루를 빻는 고통이 있던 시기 아니었던가. 내부적으로는 서민의식의 성장이 있었고 밖으로는 빠르게 움직이는 세계의 정세가 있었다. 신문물이 유입되고, 그 대표적인 것이 천주교였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정조 시대 건설한 수원 화성의 신도시였다. 총괄 디자이너 정약용이라는 표현도 새롭게 보였다. 축성하기 위해 고안한 거중기는 당시의 최신 기술의 수준을 짐작케하는 지표였다. 하지만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화성의 신도시를 단순히 조선후기 유산으로만 보지 않을 것이다. 화성 신도시는 확장을 지향하는 도시가 아니다. 내부적으로 군사 행정 상업기능을 고루 갖추면서 자연과 어우러지는 것을 감안한 생태 도시였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매우 크다. 큰 건물을 으리으리하게 외곽으로 짓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산을 관통하는 절경과 도심의 물줄기를 고려한 가옥의 배치, 또한 함부로 백성들의 보금자리를 철거하지 않은 애민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개발을 왜 하는 가에 대한 물음에 관한 답이었다. '화산이 바라뵈고 물길 따라 버드나무가 우거진 도시'속에는 불통과 소외가 없길 바라는 철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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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졸업.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전공 석사과정. 전남지역에서 글쓰기 및 문화예술교육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