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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 출범했다고 이 날을 '건국절'로 하자는 일부의 주장이 있는데, 이는 역사를 외면하는 처사일 뿐 아니라 헌법에 위배되고, 실증적 사실과도 부합되지 않고, 역사 왜곡이고, 역사의 단절을 초래할 뿐이다. 왜 우리 스스로가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독립 투쟁을 과소평가하고, 국란시 나라를 되찾고자 투쟁한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를 외면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머리가 하얗게 센 92세 노인의 목소리가 경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거침없이 건국절의 부당성을 역설하는 그에게서 일본군에 맞서 만주벌판을 누비던 기개가 느껴졌다. 지난 2016년 광복 71주년을 맞아 원로 애국지사들과 독립유공자들과 함께 청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김영관 옹은 건국절의 반역사성과 반헌법성을 저와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것도 박근혜 대통령이 면전에 앉아 있는 자리에서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 면전에서 건국절 제정을 비판한 독립유공자 김영관 전 광복군동지회장(2016.8.12)
 박근혜 대통령 면전에서 건국절 제정을 비판한 독립유공자 김영관 전 광복군동지회장(2016.8.12)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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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출신의 원로 독립운동가의 눈에는 이 땅에서 펼쳐지고 있는 건국절 논란이 못내 안타까웠을 터다. 일본제국주의에 강탈당한 조국을 되찾기 위해 목숨 걸고 젊음을 불살랐던 그에게 임시정부의 정통성과 의미를 폄하하고, 항일투쟁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연속성을 부정하며, 친일세력의 존립근거를 제공한다고 비판받는 건국절이 달갑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의 일침은 당시 커다란 화제가 됐고, 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모두가 그에게 감응했던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여전히 건국절의 당위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보수진영 일각에서는 아직도 8·15 광복절을 건국절로 기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팽배하다.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과 김성태 원내대표도 그런 부류 중 하나다. 한국당의 '투톱'인 그들이 연일 '건국절' 띄우기에 나서고 있다. 다가오는 2019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기념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에 맞서 이념 논쟁에 불을 지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김 위원장은 14일 cpbc 가톨릭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 김혜영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도 1948년 건국을 당연시해서 받아들였던 것"이라며 "기본적으로 전체 다수의 의견은 (건국을) 1948년이라고 보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1919년에 우리 상해 임시정부 그 당시에 우리가 임시정부를 세우고 국가를 세우고 한 부분에 대해서는 정식으로 전문으로 남아있고 했는데, 최근에 와서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고 그것이 그냥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명박 정부 이후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건국절 제정 움직임에 많은 사람이 동조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김 원내대표 역시 이날 원내대표단-상임위원장 간사단 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8·15 경축사와 제2의 건국추진위원회 창립 선언문에서 1948년을 건국의 해로, 노무현 대통령도 2003년 8·15 경축사에서 1948년을 건국의 해로 밝혔다"며 거들고 나섰다. 그는 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아직까지 헌법은 1948년 건국절에 기반해서 8·15 행사도 이뤄지고 있고, 광복절의 의미를 짚고 있다"며 건국절의 의미를 재차 강조하기도 했다.

자유한국당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과 김성태 원내대표(자료사진)
 자유한국당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과 김성태 원내대표(자료사진)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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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주장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역시 1948년을 대한민국 건국의 해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부각해 건국절의 일반성을 피력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건국 발언은 그 의미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봐야 한다. 왜 그럴까? 건국절 논란이 본격화되는 시기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 이후다. 그 이전에는 건국과 정부 수립을 혼재해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김대중 정부의 경우 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국가쇄신의 일환으로 '제2건국추진위원회'를 결성하는 가운데 나온 것이며,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그것은 그 세력들의 평가"일 뿐이라고 건국절을 강하게 일축한 바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1948년 건국을 당연시했다는 김 위원장과 김 원내대표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실제 노무현 정부 이전까지는 건국절과 관련된 논란 자체가 없었다. 건국절 주장은 2006년 서울대 경제학부 이영훈 교수가 <동아일보>에 기고한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라는 칼럼에서 시작됐다고 알고 있다. 이 교수의 칼럼을 기회로 뉴라이트 등 보수진영이 식민지근대화론, 친일과 독재 미화, 과거사 청산 반대 등을 앞세우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2007년 정권 교체는 건국절 제정 움직임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됐다. 뉴라이트는 보수정부였던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 첫해인 2008년 광복절 행사가 '63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0주년' 기념식으로 치러지면서 정치·사회적으로 격렬한 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이후 보수진영의 건국절 제정 움직임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진행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6년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아예 '건국 68주년'이라며 건국절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보수진영의 건국절 주장은 논리가 모순되고 근거가 빈약하다.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제헌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보수진영이 '국부'로 추앙하는 이승만 정부 역시 제헌헌법 전문이 실린 관보 1호의 연호를 '대한민국 원년 9월 1일'이 아닌 '대한민국 30년 9월 1일'로 표기했다. 그런가 하면 이승만은 초대 국회 개원 행사에서는 "민국 연호를 기미년으로 기산하여 '대한민국 30년'에 정부수립이 이루어졌다"고 축사를 하기까지 했다. 이는 대한민국이 임시정부 수립으로 건립됐고, 1948년 민주독립국가로 재탄생됐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명백한 증거다.

보수진영의 건국절 주장은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된 현행 헌법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다른 한편으론 1919년부터 대한민국 건국까지 30여년의 역사가 송두리째 부정돼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응할 명분과 근거가 사라지게 되는 문제점도 안고 있다.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제정할 경우 파생되는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빌미가 된다는 점, 38선 이남만이 국토로 인식돼 한반도 전체를 영토로 규정한 현행 헌법의 영토 규정과 충돌한다는 점, 남북 단절이 공식화됨으로써 분단체제 극복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 등 건국절의 반역사성과 반헌법성을 입증할 사례들은 한 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당을 필두로 보수진영 일각에서는 여전히 건국절 제정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논리도 근거도 희박한 건국절 주장의 이면에 어떤 정치적 의도가 도사리고 있는지 삼척동자가 다 알고 있는 데도 말이다. 저들에게는 박 전 대통령의 면전에서 건국절을 호되게 꾸짖은, 아직도 귀에 생생한 김영관 옹의 날선 일침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 '바람 부는 언덕에서 세상을 만나다'에도 실렸습니다.



태그:#광복절 논란, #뉴라이트 역사왜곡,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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