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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20일 오전 8시 4분]

<승리의 날개>, <목욕하는 여인>, <최후의 만찬>, <민중을 이끄는 자유> 등 루브르박물관 감상명단에 적은 작품들은 다 불후의 명작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묘하게 마음이 끌리는 작품은 쉴리관(Sully) 3층에 전시된 <퐁파두르 후작부인>(La marquise de Pompadour)이었다. 화가 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가 5년 여에 걸쳐 완성했다는 1.7m 크기의 실물대 초상화 앞에 서자 나는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에 압도되고 말았다.

 캉탱 드 라 투르가 그린 초상화 <퐁파두르 후작부인>, 1755년 완성
 캉탱 드 라 투르가 그린 초상화 <퐁파두르 후작부인>, 1755년 완성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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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빛 피부와 단정한 이목구비, 그윽한 눈길. 화려한 무늬의 드레스를 입은 채 악보를 펼치고 의자에 앉아 있는 퐁파두르 부인의 자태는 지금 보아도 눈부시다. 그냥 아름답다기보다도 우아하고 지적이며 어딘가 기품이 넘쳐흐른다.

"예쁘죠? 34세 때의 모습이에요."

"너와 또래인데, 그래서 와보자고 한 건 아닐 테고. 설명을 좀 해다오."


아빠의 주문에 나는 마이크를 잡은 기분이었다.

"저 머리 스타일요. 앞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기는 헤어스타일을 유럽 전역에 유행시킨 장본인이 바로 퐁파두르 부인이었대요. 나중엔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의 머리에서 보는 것 같은 남자 헤어스타일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지만요."

문화의 아이콘

 머리를 깔끔히 빗어 넘긴 1954년경의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
 머리를 깔끔히 빗어 넘긴 1954년경의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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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가 아는 지식을 한껏 뽐내고 있자니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국 젊은이들 서너 명이 우리 옆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들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아빠가 물으셨다.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헤어스타일은 흔히 '올백(all back)'이라 하지 않느냐?"

"올백은 일본식 영어 '오루바꾸(all back)'에서 온 말이라던데요."

"아, 그랬던가?"

영어론 슬릭크드 백 헤어(slicked back hair)가 맞지만 보다 전문적으론 폼파도어 헤어컷(Pompadour haircut)이다. 무엇이든 그녀가 좋아하는 건 유행이 되었다. 그녀가 좋아했던 분홍색은 폼파도어 로즈(Pompadour rose)라 불리고, 그녀가 신고 있는 하이힐은 현재 시중에서 판매되는 '폼파도어 슈즈(Pompadour shoes)'의 원형이다. 문화아이콘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비데(bidet) 같은 것도 퐁파두르 부인이 청결소독제와 향수를 넣어 사용하던 뒷물대야가 발전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림 속 의상인 '로브 아 라 프랑세즈'(robe à la française)도 그녀가 유행시킨 색백가운(sack-back gown)이다.

"어둡고 장엄한 바로크 시대의 취향과 반대로 밝고 우아하고 경쾌한 이 느낌은..."

"로코코(rococo) 양식이죠. 이거 좀 보시겠어요?"


내가 핸드폰에서 찾은 작품은 프랑수아 부셰가 그린 초상화였다.

 프랑수아 부셰가 그린 초상화 <퐁파두르 후작부인>, 1756년작.
 프랑수아 부셰가 그린 초상화 <퐁파두르 후작부인>, 1756년작.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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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탱 드 라 투르가 그린 초상화보다 1년 뒤인 35세 때의 모습이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책을 읽고 있다가 창문 쪽으로 눈길을 돌린 그녀가 입고 있는, 리본과 레이스와 장미꽃으로 장식한 드레스는 보기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하다.

"저희도 보여주시면 안 돼요?"


옆에 있던 키가 작고 눈이 큰 여학생이 애교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빠는 놀라신 듯 옆을 돌아보고 나서야 젊은이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에게 핸드폰을 건네셨다.

"내 눈에 띄는 건 여자가 들고 있는 책이다. 손에 책이 들려 있음으로 해서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니?"

"저 시대의 왕족이나 귀족 초상화엔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 많던데요."

"아니, 이건 그런 종류의 연출이 아니다. 벽에 걸린 캉탱 드 라 투르의 초상화를 다시 볼까."

벽으로 눈길을 돌리니 퐁파두르 부인이 들고 있는 것은 책이 아니라 악보였다. 자세히 보면 의자 뒤에 놓인 기타도 눈에 띈다. 또 오른쪽 탁자 밑에는 무슨 판화 같은 것도 놓여 있다. 아빠의 관찰은 역시 세밀한 데가 있다. 이쯤해서 마이크를 넘겨드리는 게 옳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평민의 딸이 왕궁에 들어가기까지

"음악과 미술에 조예가 있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었어요."

"조예가 있었지. 악기 클라비코드를 수준급으로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고 아마추어로서는 뛰어난 그림 솜씨를 보였어. 그런데 그림 오른쪽에 있는 책상을 봐라. 거기 꽂혀 있는 두꺼운 책들 말이다."

아빠의 지적에 초상화를 자세히 보니 매우 사실적으로 그린 책상 위의 책들은 다름 아닌 디드로의 <백과전서(Encyclopédie)>와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 볼테르의 <라 앙리아드(La Henriade)> 등이었다.

"디드로, 몽테스키외, 볼테르는 다 계몽주의 사상가들 아니었어요?"

"왜 아니었겠느냐? 게다가 퐁파두르 부인과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었지."

"서로 대화가 통했나보죠?"

"아주 많이. 몽테스키외와 문학을 말하고 볼테르와 철학을 논할 정도로. 당시 지식인들은 그녀를 '미와 학식을 겸비한 당대의 비너스'라고 찬미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럴 정도의 학식이 있다는 건 몰랐어요. 대체 어떻게 성장한 여자였어요?"


나는 아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귀부인다웠다는 평을 들은 퐁파두르 부인의 본명은 잔느 앙투아네트 푸아송(Jeanne Antoinette Poisson)이었다. '물고기'라는 뜻의 푸아송은 생선 잡는 어부나 생선장수에게 붙여지던 성씨로 그녀의 조상이 귀족은 아니었다는 반증이라고 한다.

"그럼 아버지는 뭐 하는 분이셨어요?"

"원래 음식조달업을 하다가 사기거래죄를 저질러 독일로 야반도주한 모양이야. 이렇게 되면 보통 먹고사는 게 어려워지는 법인데 미인이었던 잔느(퐁파두르 부인) 어머니에겐 부자 애인이 있었어."

나는 아빠의 해설을 경청하기 시작했고, 옆에 있던 학생들도 대놓고 우리의 대화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잔느의 법적 보호자가 된 어머니의 애인은 왕궁을 대신해 세금을 걷어들이던 징세청부업자(fermier général) 뚜르느엠이었다. 왕궁을 대신해 세금을 거둬들이는 직업이니 얼마나 떡고물이 많이 떨어졌겠는가? 귀족을 능가하는 부를 누리던 그는 다섯 살 난 잔느를 귀족 자녀들의 교육기관이던 소녀 수녀원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아홉 살 때 잔느가 백일해에 걸려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니는 병약한 딸의 수명을 알아보려고 점쟁이에게 데려갔다. 거기서 딸이 장차 왕의 마음을 지배하는 왕비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몹시 흥분했고, 그 예언을 전해들은 뚜르느엠은 잔느에게 음악·미술·연극·시문학·수사학·예법·역사·수학·철학 등 각 분야의 최고 가정교사들을 붙여 최상의 교육을 받도록 조처했다.

잔느는 스무 살 때 결혼했고, 결혼 후엔 파리의 저명 살롱들을 순례하다가 법적 보호자 뚜르느엠으로부터 결혼선물로 받은 영지 안에 그녀 자신의 살롱을 열었다. 여기서 볼테르, 몽테스키외 같은 많은 문화적 엘리트들을 만나 교유하면서 우아한 화술과 위트 같은 것을 익히게 된다.

"왕궁에 들어가기 전부터도 계몽 사상가들과 친분이 있었군요?"

내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랬지. 어찌 보면 어릴 때 점쟁이한테 들은 왕비의 꿈을 버리지 않고 계속 그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야."

그러다 길목에서 사냥을 나가던 루이 15세와 마주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베르사유궁의 가장무도회에 초대받게 된다. 루이 15세는 그녀를 '왕의 애인(Maîtresse royale)'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이혼을 시키고 후작부인의 작위를 내린다. '퐁파두르 후작부인.' 그녀가 스물세 살 때부터 불리기 시작한 새 이름이다.

루이 15세의 비선실세, 최순실과 다른 점

 1748년경의 루이 15세 초상화. 작자미상.
 1748년경의 루이 15세 초상화. 작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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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파두르 부인이 '왕의 정부'나 심지어는 '왕의 창녀'였다고 쓴 글들이 간혹 발견되는데 이는 maîtresse(불어)나 mistress(영어)라는 단어를 잘못 해석한 탓으로 보인다고 아빠는 지적하셨다.

'왕의 애인(Maîtresse royale, Royal Mistress)'은 첩이나 측실을 허용하지 않고 일부일처제를 고수한 프랑스, 영국, 폴란드 등 기독교 국가의 왕실에서 채택한 역사적 제도이자 역사적 용어였다. 실제 지위는 동양의 '후궁' 비슷했다. 평민은 '왕의 애인'이 될 수 없으니까 루이15세 또한 그녀에게 후작부인의 작위부터 내렸다는 것이다.

"평민 출신이라 당해야 했던 멸시 같은 건 없었나요?"


옆에 있던 모자를 거꾸로 뒤집어 쓴 남학생이 질문했다.

"왜 없었겠소?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들 보았지. 하지만 그녀는 왕의 총애를 받지 못하던 왕비부터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정적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패막이로 사용했거든."

"슬기로웠네요."


"아주 총명했지. 루이 15세는 지독한 바람둥이여서 육체적 아름다움만으론 왕의 마음을 오래 붙들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학식과 교양과 지혜로 무장하기 시작했지. 이것들로 루이 15세가 자기에게 의존하는 마음을 갖도록 만든 거예요."

점차 그녀의 의견은 왕의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마침내 국정 전반을 좌지우지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나의 시대가 왔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와 3국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영국과 7년전쟁에 돌입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3국동맹은 3백 년 동안 적대관계였던 오스트리아와 손잡았다는 점에서 '외교혁명'이라 불릴 만했지만, 7년전쟁이 패전으로 끝나는 바람에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의 식민지를 잃게 되었다. 이에 낙담해 있던 왕을 그녀가 "우리 뒤에 대홍수(Après nous, le déluge : 우리 죽은 뒤에 대홍수가 나든 말든)"이란 말로 위로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기도 하나, 실제 이 말은 당시 유행하던 속담이었을 뿐이라는 설도 있다.

"프랑스의 최순실이었나봐요"

"스토리는 기황후와 비슷한데."

한국 학생들이 제각기 생각을 내놓는다. 우리는 마치 루브르박물관의 도슨트(docent)가 된 느낌이었다.

"전혀 다르지. 무엇보다도 부를 탐하지 않았거든. 오히려 작가와 예술가를 후원해 프랑스 문예를 최고수준으로 끌어올렸고, 국방을 위해 가난한 귀족 자제를 장교로 길러내는 왕립사관학교를 설립했어. 바로 이 사관학교에서 나폴레옹이 배출되는 거야. 또 수입에만 의존하던 도자기의 국산화를 위해 제작소를 설치했는데, 여기서 세브르(Sèvres) 도자기라는 세계적인 명품이 생산되었던 거고."

 양쪽에 촛대가 달린 세브르 꽃병. 1760년작.
 양쪽에 촛대가 달린 세브르 꽃병. 1760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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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헌한 게 많네요."

"많아. 나중에 가볼 콩코르드광장도 그녀가 관계했던 거야. 뭐, 소장하고 있던 책만 3천 5백 권이었다니까. 그 대부분이 정치·군사·경제 방면 책이었다는 거야. 그녀가 추구하려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한 번도 '왕의 여인'인 적이 없었다

재물은 아니다. 여러 가지 정황을 대입해보면 일종의 성취욕 같은 거였다고 볼 수 있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도 '나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다. 그러나 왕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허약한 그녀는 나이 서른부터 루이 15세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베르사유궁의 사슴공원(Parc-aux-Cerfs)에 마련된 주택들에 시종들이 파리 근교에서 모집한 소녀들이 살도록 하고, 그녀들로 하여금 왕의 수청을 들게 했다. 그녀들 가운데 루이 15세가 각별히 총애하여 애까지 낳은 마리 루이즈 오뮈르피란 소녀가 있었다.

프랑수아 부셰의 <엎드리고 있는 소녀> 카사노바가 아름다움을 극찬한 바 있는 '마리 루이즈 오뮈르피'를 모델로 하여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 프랑수아 부셰의 <엎드리고 있는 소녀> 카사노바가 아름다움을 극찬한 바 있는 '마리 루이즈 오뮈르피'를 모델로 하여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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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바람둥이 카사노바가 그 아름다움을 극찬한 바 있는 오뮈르피는 '늙은 여자'라고 경멸하던 퐁파두르 부인을 쫓아내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왕을 움직여 보았으나 도리어 궁 밖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된 건 그녀 자신이었다고 한다.

"퐁파두르 부인의 권모술수가 뛰어났던가 봐요."


"그런 것보다도 '늙은 여자'가 단순한 왕의 여인이 아니라 정치적 파트너라는 걸 오뮈르피가 이해하지 못했던 거야. 모든 면에서 뛰어난 여인이었거든. 하지만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고, 일찍 죽어. 43세 때."

7년전쟁의 패배 이후 퐁파두르 부인의 평판은 아주 나빴다. 그런 가운데 숨을 거두자 만든 이의 이름을 숨긴 그녀의 묘비명이 나돌았는데, 거기 새겨진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20년은 처녀, 7년은 창녀, 8년은 뚜쟁이였던 여자가 이곳에 잠들다(Ci-gît qui fut vingt ans pucelle, sept ans catin et huit ans maquerelle.)

"사실인 측면도 있었던 거죠?"

또 다른 여학생이 물었다.

"관점의 차이죠. 그로부터 2백년 뒤 여성해방운동을 주도한 여류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는 퐁파두르 부인을 여권운동의 선구자라고 평했지요."

"왜요?"

"시대의 한계란 벽이 없었다면 왕의 힘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노력과 도전으로 목적을 추구할 여자였으니까. 서른 살부터 왕과 잠자리를 하지 않으면서도 죽을 때까지 왕에게 필요불가결한 '친구'로 남았던 여자. 수많은 정적들로 둘러싸인 궁정 안에서 20년을 버텨낸 그녀는 '나의 삶은 끝없는 투쟁의 연속이었다'는 말을 남겼소. 평민출신으로서, 여자로서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노력했던 그녀의 치열했던 삶을 보부아르가 꿰뚫어 보았던 거요. 자, 다음 코스는 어디지?"

"<밀로의 비너스>."


"허허, 오늘은 잇달아 비너스만 보게 되는구나. 이태리의 비너스 모나리자, 프랑스의 비너스 퐁파두르 부인, 그리고 그리스의 진짜 비너스와..."

아빠랑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는데 학생들이 길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너무 재미있어요! 혹 미술사 전공이세요?"

"저희는 유럽을 여행 중인데, 부녀 여행을 하시는 분은 처음 만나요."

"그런데 두 분은 왜 같이 여기 오셨어요?"

'왜?' 라는 질문에 나는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서먹했던 아빠와의 관계개선이라고 설명하기엔 우리 부녀 사이가 제법 친근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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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