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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있다'라는 말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질 때가 있다. 요즘 부쩍 그랬다. '불법 촬영물 편파 수사 규탄 시위'에 참여한 7만 여성이 광화문 광장에서 "동일 수사 동일 처벌"을 부르짖는 걸 보며 가슴이 울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이라는 변명으로 현장에 가지 못했던 나는 유튜브에서 오디오로 생중계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나마 마음을 보태야 했다(운영진의 허가를 받지 않은 취재 및 촬영은 할 수 없었다). 그렇게라도 함께하고 싶었다. 나 외에도 많은 여성들이 실시간 채팅창에서 서로를 응원하고 위로하며 시위에 참여했다.

 <체공녀 강주룡>
 <체공녀 강주룡>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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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고공 농성 운동가 강주룡을 알게 된 건 그래서 감사한 일이었다. 먼저 싸움을 시작한 이가 있었다는 것은 뒤따르는 자들에게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구로 동맹 파업을 지휘했던 심상정, 주룡처럼 고공에 올라 309일을 투쟁했던 김진숙, 12년이란 고된 싸움 끝에 끝내 승리를 거머쥔 KTX 승무원들, 혜화역과 광화문의 12만 여성들... 소설 <체공녀 강주룡>을 읽는 건 그 모든, 싸우는 여성들을 호명하는 일이었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체공녀 강주룡>은 1931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공농성을 벌인 여성 노동자 강주룡의 일생을 서사로 엮어낸 작품이다. 강주룡(1901~1931)은 평양 평원 고무공장 파업을 이끄는 과정에서 을밀대 지붕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여 '을밀대 체공녀'라고 불린 실존인물이다. 당시 잡지에 인터뷰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주룡의 삶을 관통하는 단어가 있다. '싸움'이다. 그건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것들을 깨부수는 일이다. 세상을 박살 내지 않고서는 여성으로서, 노동자로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주룡은 몸으로 알고 있었다. "너는 네가 바라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아끼는 동생에게 건넨 그 한 마디가 주룡이 싸우는 이유였다.

주룡은 여성 같은 약자를 악용하거나 착취함으로써 돌아가는 남성 집단을 거침없이 고발한다. 여성을 희롱하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는 집단이라면 다 망해버리라고 일갈하거나 피해자인 여성을 배제한 채 공장 측과 졸속 협정을 감행한 남성들에 분노한다.

"그렇지만 그따위 결속이 다 무어란 말인가. 여자 하나를, 어린 남자애 하나를 우스개로 만들지 않고서는 유지할 수 없는 결속이라면 그따위 것 없는 게 백번 낫지 않은가" (p79)

남성 집단의 허위 의식을 폭로하는 주룡의 거센 호통은 독자가 절로 "그렇지!" 하며 주먹을 꽉 쥐게 하는 힘이 있다. 폭포처럼 시원하고 목울대를 뜨겁게 하는 힘.

"여기 사람이 있다"

주룡은 한번도 주저 앉은 적이 없었다. 독립 운동을 위해 야반도주 할 때도 남편을 앞장서서 걸었고 남편이 떠나라고 할 때도 후회할지언정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가 늙은 영감에게 자신을 팔았을 때도 기어이 도망쳤고 파업이 실패해도 자신만은 을밀대에 올라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주룡의 목숨은 끊어졌으나 그의 뜨거운 열망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

여전히 세상에는 여성이 결혼해 '현모양처'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내조도, 육아도, 가사도, 직장 일도 모두 잘해내길 바란다. 그러나 여성들은 이제 순순히 무릎 꿇지 않는다. 여성의 고통은 다른 여성에게 전해지고 더 끈끈한 유대로 이어진다. 여성은 서로 연결된다.

주룡은 아기를 뺏길까봐 파업단을 탈퇴하는 삼녀를 대신해 파업단에 가입하며 말한다.

"삼이 니, 내 우에 계속 가입 미뤘는디 모르갔어? 내래 일생을 걸 결심이라야 가입하는 거이 마땅하다 여겨서 여즉 가입 안 한 거이야. 기런데 니가 나간다니 내가 들어가지 않구 배기갔니. 내 니 때문에 조합 들어가는 거이구, 니가 나 가입시킨 거이다 (...) 네 한 사람 나가구 내 한 사람 가입하는 거이 아이디. 내래 일당백 일당천 할 거이니까네, 삼이 네 덕에 파업단에 백 명 보탬 되구 천 명 보탬이 된 거이다. 알갔어?" (p177)

평생을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자 했던 주룡이 생애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이 있다"라는 말은 그래서 참 모질고 안타깝다.

서른, 짧게 살았다. 그러나 활활 불타서 지금 여기 사람들에게 다신 없어지지 않을 화상 자국처럼 남았다. 그 자리가 아파서 책을 덮고 난 뒤에도 가슴을 내내 쓸어야 했다. 을밀대에 오른 주룡에게, 싸우는 모든 여성들에게 이 책을 함께 읽자고 건네고 싶다. 그들의 손잡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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