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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책 제목을 보았을 때 나는 오래전 그 언덕이 떠올랐다. 초여름의 붉은 해가 자취를 감추고 채 어둠이 찾아오기 전, 푸른 바다 빛을 머금은 하늘에서 파도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어스름한 저녁의 언덕길. 옆 동네 마을에서 벌였던 작은 축제 프로그램 중 반딧불이 체험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서둘러 나선 길이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마을 뒷산으로 올라갈 때부터 아이들의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지난겨울 일출을 보러 갔을 때의 일을 떠올리며 이번에도 허탕을 칠까봐 조바심이 나는 모양이었다. 집 앞 개울가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을 억지로 차에 태우고 왔으니, 만약 반딧불이를 보지 못한다면 그 원망은 모두 나에게로 쏠릴 기세였다.

언덕에 다다랐을 때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반딧불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되었을까. 어둠 속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뜯어진 실밥처럼 조금씩 새어나왔다. 정적은 한 순간에 무너졌고, 아무리 기다려도 반딧불이는 날개를 펼치지 않았다.

허탕의 묘미는 거기에 있다. 보고 싶었던 순간에 볼 수 없었던 아련함.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아이들은 엄마는 거짓말쟁이라고 놀렸지만, 나는 아이들과 함께 아련한 추억 하나를 그렸다고 생각했다. 삶이란 어딘가에 있을 반딧불이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었고, 아름다운 불빛 한 점을 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반딧불이>  무라카미 하루키 / 권남희 옮김
▲ <반딧불이> 무라카미 하루키 /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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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나는 반딧불이를 다시 볼 생각은 하지 못했고, 아직까지도 보지 못했다. 깜깜한 숲속 언덕길을 올라도 보지 못한 반딧불이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 <반딧불이>에서는 아주 쉽게 발견한다. 대학 기숙사 옆 호텔 관광객을 위해 풀어놓은 반딧불이를 룸메이트가 잡아 담아놓은 유리병을 보았을 때의 느낌이란 이랬다.

"병 속에서, 반딧불이는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은 너무도 약했고, 그 색은 너무도 엷었다. 내 기억 속에서 반딧불은 좀 더 뚜렷하고 선명한 빛을 여름의 어둠 속에 뿌렸다. (중략) 아마 내 기억이 잘못됐을 것이다. 반딧불이의 빛은 실제로는 그리 선명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저 그렇게 믿고 있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때 나를 둘러싸고 있던 어둠이 너무나 깊었던 탓인지도 모른다."(45쪽)     

병 속 반딧불이의 빛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반딧불이의 불빛과 다를 수도 있겠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줄곧 따라다니던 생각은 이것이었다. 어떤 시간 어떤 공간 속에 갇혀 있는 존재는, 즉 어떤 기억 속에 머무는 존재는 반딧불이의 불빛처럼 시시때때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살한 친구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불안한 기억들이 한 점 불빛처럼 뜨겁게 타오르다가도 이내 사그라들고 멀어지다가도 가까워졌던 것처럼.

소설 <헛간을 태우다>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의 원작으로 알려진 작품인데, 헛간을 태우는 이상한 버릇을 가진 젊은 부자의 말을 전해 듣고 그 이야기에 집착하는 중년의 소설가가 등장한다. 타자의 욕망이 어떻게 전이되고 발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이 소설 속에 현대인의 내면 심리가 묘사돼 있다.

"가끔은 그가 내가 헛간을 태우게 만드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즉 헛간을 태운다는 이미지를 내 머릿속에 집어넣고 나서, 자전거 타이어에 공기를 넣듯이 그것을 점점 부풀려가는 것이다. 솔직히 가끔 나는 그가 태우기를 가만히 기다리느니 차라리 내가 성냥을 그어 태워버리는 편이 빠르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저 낡아빠진 헛간이었으니까."(74쪽)     

살면서 견디지 않으면 안 될 것들이 타자의 욕망일 수도, 타자의 죽음일 수도 있겠지만, 궁극에는 타자를 바라보는 나 자신에게로 귀결된다. 1980년대 초반에 발표된 이 책의 소설들이 지금의 현실에서도 빛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도 놀라웠지만, 다른 서사를 갖춘 소설들이 같은 결을 가진 이야기처럼 읽혀져 이상야릇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다섯 편의 단편소설들은 아련하고 쓸쓸하고 허무한 느낌을 던져주었다.
"넌 몇 번이고 이길 수가 있어. 그러나 지는 건 단 한 번이야. 내가 한 번 지면 모든 것은 끝난다. 그리고 넌 언젠가 반드시 진다. 그걸로 끝이야. 알겠어? 나는 그걸 계속 기다릴 거야."(117쪽)     

소설 <춤추는 난쟁이> 중 내기에서 이긴 젊은 노동자에게 난쟁이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이 문장들 속에서 나는 한동안 멈춰 있었다. 한 번 지면 회복이 불가능한 위태로운 삶의 구조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일면이었다.

난쟁이의 멋진 춤만 있다면 세상의 어떤 여자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지만, 여자와는 어떤 말 한마디도 섞어서는 안 된다는 그 내기라는 게 이 시대의 자본의 속성을 닮은 듯했다.

사랑을 하기 위해 춤동작이 필요한 건지, 아니면 다른 언어가 필요한 건지 아리송한 물질문명의 세계에서 사람들을 유혹하는 난쟁이의 춤사위는 나날이 현란해졌고, 말보다는 움직임 즉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더 선호하게 됐다.

춤사위를 쫓다 저지른 실수로 자신의 몸을 난쟁이에게 빼앗기는 경우는 주변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었다. 외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난쟁이의 춤에 빠져들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결국 이런 바람에 다다른다. 허탕을 치는 일이란 꼭 재미있으리란 보장도 없고, 반딧불이를 보러 가는 길에 감지했던 나무 냄새나 풀잎 스치는 소리가 반딧불이만큼 아름다울 수도 없겠지만, 힘겹게 오른 언덕길 끝에서 반딧불이를 보리라는 기대가 무너져도, 인생이란 그런 거지 뭐 라는 가벼운 농담을 던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반딧불이를 보지 못했던 그 언덕길이 곧 인생길이라는 개똥철학 하나를 꾸역꾸역 가슴 한 구석에 챙겨두고, 타자의 욕망인지 나의 욕망인지를 끝없이 혼돈하며 살아갈 뿐이다. 문득 세상의 사물과 현상을 생각하다가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지만, 심각하게 사유한 "그 결과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뭔가를 강요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반딧불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보여주는 사람들의 내면이란 한 여름 밤의 반딧불이 같은 것이었다. 보이다가 보이지 않기도 하며, 밝아졌다가 옅어지기도 하는 아스라한 마음의 불빛들.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했지만,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삶의 장면들이 마음속에 걸려있다. 그것이 기억의 다른 이름이거나, 아련함이나 아쉬움의 범주일 수 있겠다.

마음속에 불을 지피며 나를 이끄는 사유의 과정들이, "판단은 하지 않고 관찰"만 하는 도구로 전락해서도 안 되지만, "뭔가를 강요하는 일"에 부합돼서도 안 되었다. 옳다고 판단한 것들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방식의 삶과는 이별하고 싶다. 불행의 시작은 타인이 나의 바람대로 행동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 생각대로 타인이 행동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므로.

한 여름 밤, 한 점의 불빛을 꽁무니에 밝혀두는 반딧불이의 체온은 몇 도쯤일까. 나의 겨드랑이처럼 반딧불이의 날개도 땀에 젖어 축축할는지도 모를 일. 올 여름이 가기 전에 반딧불이의 아련한 불빛을 두 눈 속에 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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