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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영덕 신돌석 생가
 경북 영덕 신돌석 생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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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11월 '13도 창의군'이 결성된다.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13도의 의병들이 총집결한 것이다. 이때 신돌석은 교남(영남) 창의대장에 선임되었다. 허위는 진동(경기, 황해) 창의대장, 이강년은 호서(충청) 창의대장을 맡았다. 총대장은 이인영이었다.

서울 전쟁기념관은 삼국 시대 이래 1945년 독립까지의 긴 세월에 걸쳐 선정한 '호국 인물 22인'의 흉상을 전시하고 있다. 을지문덕, 김유신, 계백, 강감찬, 서희, 윤관, 최영, 김종서, 권율, 이순신, 곽재우, 조헌, 이강년, 김좌진, 유인석, 신돌석, 홍범도, 이청천, 강우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이 그 스물두 분이시다.

우리나라 반만 년 호국 영웅 22인 중 한 사람

글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그만큼 신돌석이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하지만 이런 구구한 설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간명하게 신돌석의 존재감을 명쾌히 정의 내린 이가 있다. 1908년 당시 옹기를 진 채 동해안의 후천재 산길을 걷고 있던 어떤 노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노인은 신돌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울부짖었다.

"우리들이 구차하게 산 것은 신 장군이 일본군을 소탕하리라 기대한 때문인데 이제 모든 것이 끝이로구나!"

노인의 울부짖음은 1908년 당시 영해(당시 영덕의 중심부) 경찰서장 경부산본구가 통감부 경무국장 송정무에게 올린 <1908년 비도 수괴 신돌석에 대한 수사 보고>에 실려 있다. 이 울부짖음은 김희곤의 <신돌석, 백 년 만의 귀향>(푸른역사, 2001년 초판 발행)에 재수록되어 있다.

신돌석의 고향 후배 소설가 영릉의진 소재 소설화 계획

신돌석의 고향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백상태 소설가가 '<신돌석, 백년 만의 귀향>과 신돌석에 관한 여러 전설들을 뼈대로 삼고, 상상력과 추론으로 살을 붙인' 장편소설 <소설 신돌석>을 펴냈다.

정확한 역사 복원력과 치밀한 갈등 구성력이 돋보이는 <소설 신돌석>을 발표한 백 소설가는 '오래전부터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에 대한 소설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다'면서 '소설에 나오는 영릉의진 대원들은 모두 실존 인물의 실명 그대로'라고 밝혔다.

영릉의진은 신돌석 의병부대의 명칭이다. 이 이름은 신돌석과 함께 창의군을 일으킨 백남수가 작명했다. 영릉의진이라는 이름에는 '영해에서 시작하여 태백산 줄기의 동서를 바탕으로 북쪽의 강릉까지를 망라하자는 의미'가 들어 있다.

 경북 영덕 신돌석 유적지 전경
 경북 영덕 신돌석 유적지 전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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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은 신돌석이지만 그외 영릉의진군의 많은 장졸들을 두루 주요인물로 설정한 백상태 소설가의 성심에 부응하기 위해 이 소설을 다른 인물 중심으로 해설해본다. 아래 글은 백남수와 강업이를 주축에 놓고 풀어본 해설이다.

백남수(1875-1950)는 신돌석(1878-1908)보다 나이도 세 살 많을 뿐더러 서울에서 궁내부주사라는 벼슬도 했던 양반 신분이지만 의병대장 자리를 사양한다. 특히 그는 의병을 일으켰을 때 필요한 군자금까지 논밭을 팔아 조달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백남수는 신돌석이 자신에게 의병장를 맡으라고 하자 이렇게 대답한다.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우리가 모병한 사람들이) 예순 명가량 되는데 이 가운데서 내가 모은 인사가 열 명 안쪽이고 자네가 모은 사람이 쉰 명 전후일세. 이들이 다시 새끼를 쳐서 한 명당 두 명을 모으고 (그런 일이 자꾸 반복되면) 향후에 우리 영릉의진의 병력이 더욱 빨리 늘어날 텐데, 그렇다면 누가 대장이 되어야 하는지 자명한 이치 아닌가? 긴말 필요없네. 오늘부터 신태호(신돌석은 신태호의 아명) 자네가 대장일세!"

영릉의진군의 중군대장을 맡아 한창 활약하던 백남수는 잠시 집에 들른 길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체포된다. 그가 감옥 바깥으로 일시 나오는 때는 신돌석이 친인척으로부터 암살을 당한 직후이다.

일경은 그를 끌고가 죽은 인물이 신돌석인지 여부를 확인시킨다. 신돌석이 무슨 이유로, 어떤 경로로 이토록 처참하고 허망하게 세상을 떴는지 알 수 없는 백남수는 '그저 하늘을 우러르며 눈물을 훔쳤다.'

 <소설 신돌석>의 표지
 <소설 신돌석>의 표지
ⓒ 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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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수는 신돌석의 시신을 떠나 감옥으로 돌아올 때 아이 하나를 만난다. 열두 살 먹은 강업이가 일본군에 이끌려 역시 신돌석의 시신을 확인하러 가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일순 눈길이 마주치지만 대화를 나누지는 못한다. 일찍 부모를 잃고 우여곡절 끝에 영릉의진군에 들어와 심부름도 해가며 보살핌을 받던 강업이는 해방 이후 홀로 사는 백남수를 오히려 보살피는 존재가 된다.

백남수의 임종도 강업이가 지킨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 임종을 앞둔 백남수는 젊은 날 신돌석과 더불어 항일 투쟁을 결의하던 시점에 자신이 읊었던 시 한 수를 떠올린다.

신돌석과 함께 창의를 다짐하면서 복디미마을에서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의기투합했었다.

복사꽃 피어날 땐 술잔 들기 어려워라
옛 벗 다시 만나 시를 어찌 안 지으리
남쪽 고래산 바라보니 울타리 몇 천인가?
시국 생각할 때마다 저 혼자 서러워라


백남수는 일제에 고문을 당해 손톱도 없어진 손으로 어렵게 쓴 100여 쪽의 문서를 강업이의 손에 쥐어주고 숨을 거둔다. 강업이는 '중군대장님' 하고 부르짖으며 눈물을 토한다. 이미 40년 전의 일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영릉의진군의 일원으로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혈혈단신 무학의 할아버지가 물려준 한문 저작

할아버지 강업이로부터 <영릉의진 유사>를 물려받은 강승찬은 영덕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가난한 농민이다. 강승찬은 겨우 중학교를 마쳤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학력인 중학교의 동기동창 소설가에게 백남수의 기록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천애의 고아로 자라 언문이나 겨우 깨친 할아버지가 이런 글을 썼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중략) 해방후 의병이나 그 후예들이 이 나라에서 받은 허름한 대접을 생각하면 (이 한문 기록을 세상에) 별로 내놓고 싶지 않더라"면서 "(비행기를 일본에 헌납하는 등) 친일에 미쳐 날뛰던 후미아키 기이치로(백남수가 해방 이후 줄곧 공원으로 일했던 회사의 사장으로 한국인임)의 후손은 몇 선 국회의원에 장관까지 했다." 

 경북 영덕 신돌석 유적지 내 신돌석 초상
 경북 영덕 신돌석 유적지 내 신돌석 초상
ⓒ 신돌석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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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태 소설가의 치밀한 구성력은 허구의 인물인 강승찬의 배치에까지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다. 중학교 동기동창인 소설가에게 <영릉의진 유사> 원본을 보여주었던 강승찬은 '한글로 번역된 책이 나오거든 나에게도 꼭 보내주게'라고 말했지만 번역본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이미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물론 <소설 신돌석>도 보지 못했다.

그는 <영릉의진 유사>에 실려 있는 할아버지 강업이의 열한 살 이후 행적이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 역시 호의호식을 한 친일파의 자손이 아니라 일제에 맞선 의병의 후손에 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으니 한문 문서를 해독하는 것은 애당초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결국 그는 할아버지의 삶이 어떠했는지 알지 못하는 채로 이승을 떠났다. 그렇다면...? 오늘날 보통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그 이후 친일청산은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얼마나 알고 있을까? 강승찬을 통해 백상태 소설가는 그 말이 정말 하고 싶은 듯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백상태 <소설 신돌석>(나남, 2018년 7월 15일), 신국판 378쪽, 1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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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장편소설 <딸아, 울지 마라><백령도><기적의 배 12척> 등을 썼다. <집> 등 개인 사진전을 10회 이상 열기도 했다.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 역임, 전교조 활동으로 5년간 해직교사 생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