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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에어컨을 틀까 말까 고민하면서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그날 인천공항 이용객이 11만 명이 넘는다는 기사를 읽었다. 또 다른 기사에서는 국내 해수욕장에 몰려든 피서객들의 모습을 비췄다. 작열하는 태양, 부서지는 파도, 숲 속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바람, 시원한 계곡에서 보내는 오후. 나는 피서 관련 기사들을 읽으며 이런 이미지를 한 3분 정도 떠올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우리 집 에어컨을 켰다.

여름휴가 시즌이 돌아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긴 기다림 끝에 휴가를 즐기러 어딘가로 떠나고 있다. 비행기 타고, 배 타고, 차 타고. 하지만, 그들이 어딘가로 떠나고 있는 지금, 그 어디로도 떠나지 않고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

여름휴가를 얻지 못해서, 얻었지만 고작 이틀 얻은 게 다라서, 더울 땐 움직이는 게 질색이라서, 집에서 딩가딩가 노는 게 진짜 휴가라고 생각해서 등등의 이유로 떠나지 않는 사람들. 회사에 얽매여 있지 않은 이들 역시 굳이 인파 속에 섞일 이유를 찾지 못할 것 같다. 나 역시 앞에 나열한 두세 개 이유 때문에 이 더운 여름에 물에 발 한 번 담글 생각 없이 집에 쿡 박혀 있는 중이다.

집에 있더라도 지금이 여름휴가 기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지내는 건 아니다(잊지 못하겠다). 소소하지만 나름 여름휴가 기분을 누리려 작은 시도들을 한다. 평소엔 잘 보지 않는 할리우드 블럭버스터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기도 하고,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서 지운 채 하루를 무념무상으로 보내기도 하며, 냉장고에 넣어 놓은 맥주에 어울리는 안주를 사들이고, 또 무엇보다 여름휴가에 걸맞는 책을 골라 읽기도 한다.

나는 거의 늘 책을 읽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여름휴가철이 되면 유독 '이번 휴가엔 뭘 읽지' 하고 고민하게 된다. 시원한 방바닥에 배 깔고 누워 이 더위를 잊게 해 줄 책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는 즐거움, 이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일 테다. 스릴러의 'ㅅ'자만 들어도 겁을 먹는 내가 올해 고심해 고른 책은 B. A. 패리스의 <브레이크 다운>이다.

그 여자를 도와줬다면, 여자는 살았을까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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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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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 다운>은 '가스라이팅 심리스릴러'로 소개되고 있다. '가스라이팅'이란 "상황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키고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하여 결국 그 사람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심리학 용어"(<위키백과>)이다.

책은 살인 사건이 벌어진 날 밤, 소설 주인공 캐시가 곧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될 여자를 지나쳐 가면서 시작한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그날 밤, 캐시는 차를 타고 인적이 드문 숲을 통과해 집으로 가고 있었다. 엄청난 천둥소리와 수시로 나타나는 급격한 커브, 보이지 않는 시야, 그리고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웅덩이만으로도 캐시는 이미 공포에 질린 뒤였다.

그런데 그때, 캐시 눈에 차 한 대가 들어온다. 저기 저 앞 갓길에 세워진 차 한 대. 차를 지나치며 캐시는 운전석에 앉은 여자와 눈이 마주친 것도 같다. 캐시는 우선 급한대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고민에 빠진다. 돌아가서 저 여자를 도와줘야 할까. 혹시나 도와주러 나갔다가 도리어 내가 공격을 당하는 건 아닐까. 혹시 이 모든 게 함정은 아닐까. 고민하던 캐시는 결국 그냥 집으로 향하고, 다음 날, 남편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여자가 죽은 채 발견됐어."

캐시의 죄책감이 시작됐다. 캐시는 마치 자기가 그 여자를 죽인 것만 같은 느낌이다. 만약 어젯밤, 차에서 내려 여자에게 다가갔더다면 여자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여자에게 다가갔더라면 여자가 아닌 캐시가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 캐시는 어쩌면 그 살인자가 캐시를, 캐시의 차를 눈여겨봐 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포에 빠진다.

캐시는 정이 많으면서 나약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본인이 좋은 사람으로 비치길 바라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양심의 가책을 극심하게 느끼고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그날 있었던 일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다. 그래서 소설 초중반, 캐시는 혼자서 끙끙 앓으며 본인에게 닥쳐오는 시련에 홀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캐시의 이런 성격은 그 자체로 소설을 극적으로 만들어주면서 독자를 인물에 몰입하게 한다.

사실 소설 초반부에 나오는 캐시의 강박적 죄책감에 한 번에 빠져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런 성격이어야 소설이 재미있어지지' 하는 생각과 더불어 그대로 캐시에게 쑥 빨려 들어갔다. 여기에 더해 살인자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는 공포가 캐시를 덮치면서 나는 캐시와 이심전심이 되었다.

마지막 몇 십 페이지, 사이다같은 결말 

이 다음부터의 상황은, 작가도 바라고 독자도 바라는 바로 그 상황이 되었다. 책 속으로 속수무책으로 빠져들기. 심리스릴러를 표방하는 이 책의 시점 인물은 '나'인 캐시다. 그러니 독자는 어쩔 수 없이 '나'의 심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나'가 괴로워하면 같이 괴로웠고, '나'가 공포에 떨면 같이 공포에 떨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나'가 치매 증상을 보이면서부터는 나 역시 어딘가에 고립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살인자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데, 치매에 걸린 듯한 캐시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심지어 살인자가 진짜 캐시를 쫓고 있는 건지 독자인 나 역시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캐시가 여자를 죽여놓고 기억을 못 하는 건지도 모른다. 

두려움 때문에 캐시는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일을 하러 갈 수도 없다. 경비 시스템을 뚫고 들어온 살인자는 집안 물건을 만지고, 여자를 죽였던 똑같은 칼로 은근히 위협을 해오며, 남편이 집에 없을 때만 전화를 해 캐시를 옥죈다. 하지만 캐시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는 남편은 그저 캐시가 아픈 것뿐이라며 그녀에게 약을 권할 뿐이다. 이제 캐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약을 과다 복용해 스스로를 해하려 하기까지 한다. 과연, 캐시는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캐시는 용기를 내 조금씩, 천천히 사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스스로를 의심하는 대신 스스로를 믿기로 결정한다. 캐시가 사건의 정면에 다가가자 독자는 비로소 이 소설이 왜 가스라이팅 소설인지 깨닫는다.

지금껏 읽어왔던 인물들의 대화가 철저한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 역시 알게 된다. 마지막 몇 십 페이지를 남기고 캐시는 대담한 태도로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그 속으로 '그들'을 몰고 간다. 증거도 캐시 편, 소설 속 사람들도 캐시 편, 독자들도 캐시 편이다. 이젠 꼼짝없이 '그들'이 당할 일만 남았다. 모든 것이 해결됐다.

읽다 보면 절로 뒷목이 서늘해지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하는 책을 원래 읽지 못한다. 그럼에도 최근 며칠 동안엔 뒤를 돌아보는 한이 있더라도 이 더위를 잊길 바랐고, 더위와 함께 다른 걱정거리들도 잊길 바랐다. 다행히, 이 책은 뒤를 돌아보게 할 만큼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나는 더 가뿐히 책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을 것이다.

겨우 며칠뿐이었지만 살인자를 추적하느라 정신없이 살았다. 그리고 살인자는 잡혔으므로 나는 다시 일상을 살면 된다. 일상으로 돌아오니 여전히 덥다. 그래서 스릴러 책 한 권을 더 읽어보려한다. 책을 읽다보면, 어느덧 이 더위도 물러가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브레이크 다운>(저 : B. A. 패리스(B. A. Paris) ㅣ 출판사 : 아르테(arte) ㅣ 발행일 : 2018년 06월26일 ㅣ 1만1천2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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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 다운

B. A. 패리스 지음, 이수영 옮김, arte(아르테)(2018)


태그:#브레이크 다운, #심리스릴러, #가스라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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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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