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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더라, 아마도 올 초인 듯하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첫째 까꿍이가 새 학기가 시작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사랑을 했다 우리가 만나~"

그 뒤 노랫말은 없고 "사랑을 했다 우리가 만나~" 부분만 무한 반복했다. 단순한 선율로 두 동생들도 금방 따라했다. 고작 열 살인 아이가 "사랑을 했다~"라고 노래를 부르다니. 듣기가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큰 아이를 시작으로 아이들은 주문처럼, 혹은 버릇처럼 "사랑을 했다~"를 불러댔다.
까꿍이의 독학 리코더를 멋지게 불고싶은 까꿍이의 노력.
▲ 까꿍이의 독학 리코더를 멋지게 불고싶은 까꿍이의 노력.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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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쓸쓸한 "사랑을 했다"

"사랑해"도 아니고 "사랑했다"도 아닌 "사랑을 했다"라니. 조사 '을'이 들어간 과거형 문장은 목에 뭔가 걸린 것처럼 쓸쓸하게 들렸다. 20대 시절 지지부진한 연애 중에 소주잔을 앞에 두고 중얼거리던 기형도, 이성복, 곽재구, 함민복 등의 시처럼 들리는 '사랑을 했다'.

마흔이 넘은 엄마가 20대 시절로 돌아가 궁상을 떨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그저 재미나서 두 마디의 노래를 반복했다. 그러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때 이른 더위가 찾아온 어느 봄날, 두 마디의 노래는 세 번째 마디를 넘어 1절까지 발전했다.

오랜만에 동네 아이들과 가족들이 모여 독립영화 함께 보기를 하고 수건 돌리기를 하며 놀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어린 아이들도 있어 전국민이 아는 <곰세마리>로 수건을 돌려볼까 했는데 누군가 "사랑을 했다"를 외쳤다. 그 자리에 있던 어른들은 모르는, 다섯 살부터 열세 살까지 모든 아이들은 아는 노래가 울려 퍼졌다. 수건 돌리기가 목적이 아니었다.
늦게 자고 싶은 아이들 여행지에서 하룻밤, 어른들의 밤이 궁금한 아이들
▲ 늦게 자고 싶은 아이들 여행지에서 하룻밤, 어른들의 밤이 궁금한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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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잔치 축하 떼창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둘째 산들이의 반생일 파티가 지난 6월 초에 열렸다. 친한 친구들 몇몇 집으로 초대해 엄마표 생일상을 차리는 건 30년 전 이야기.

3년 전 첫째 생일파티 때 '생파(생일파티)', '생선(생일선물)'으로 줄인 말을 이해 못하던 초보 학부모에서 벗어나 '문상(문화상품권)' '키카(키즈카페)'라는 단어까지 자연스럽게 구사하며 산들이 생파를 준비했다. 레크레이션을 진행하는 키카에 의뢰해 봄생파를 준비했다.

레크레이션이 끝나고 엄마들이 간단한 생일상을 차리고 생일초 불을 껐다. 촛불이 꺼지자 키카의 미러볼이 돌아가며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사랑을 했다~ 우리가 만나~ 이루지 못할 추억이 됐다~
볼만한 멜로드라마 괜찮은 결말 그거면 됐다
널 사랑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떼굴떼굴떼굴떼굴 도토리가~"만 나와도 춤을 추던 아이들이었는데, "이루지 못한 추억"을 운운하며 "괜찮은 결말 그거면 됐다"는 "사랑" 노래를 미러볼 아래에서 목 놓아 부르고 있다니!
이젠 바다가 두렵지 않아 튜브 따윈 필요없어!
▲ 이젠 바다가 두렵지 않아 튜브 따윈 필요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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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계곡도 무섭지 않아! 잠수도 거뜬하다구!
▲ 이젠 계곡도 무섭지 않아! 잠수도 거뜬하다구!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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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창에 '리코더'를 치면

3학년이 되어 학교에서 리코더를 배우고 있는 까꿍이는 거의 매일 리코더를 불고 있다. 아직도 틀리는 맞춤법을 리코더만큼 공을 들인다면 금방 깨칠 텐데. 시간만 나면 리코더를 불고 있는 까꿍이에게 잔소리 한두 마디 해보지만 얼마나 좋으면 끼고 살까 싶어 내버려 두었다.

처음엔 학교에서 배운 노래들을 불렀다. 유치원 때 핸드벨 발표회를 하며 계이름을 외운 <오버 더 레인보우>도 이어서 불렀다. 그러다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는 내 옆에 슬그머니 다가와 노트북을 10분만 쓰게 해 달라 부탁을 했다. 컴퓨터를 이용한 학교 숙제를 제외하곤 처음 하는 부탁이었다.

선뜻 노트북을 내어주고 지켜봤더니, 검색창에 '리코더'라는 단어를 입력했다. 검색 자동 기능으로 이어 뜨는 검색어는 '사랑을 했다 리코더 악보'였다. 까꿍이는 여러 악보를 살펴보고 '사랑을 했다' 리코더 동영상도 검색했다. 틀린 글자 다시 쓰라고 할 때는 그렇게도 미루더니 빛의 속도로 계이름을 받아 적었다.

▲ 온 가족이 부르는 "사랑을했다" 아빠의 리코더반주에 맞춰 즐거운 한때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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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만에 알게 된 가수 이름

이런 아이들을 본 남편은 '사랑을 했다' 음원을 다운 받아 차에서 자주 틀어줬다. 이동하는 차안에서 플레이 리스트를 보고 그제서야 가수 이름이 아이콘이란 걸 알게 되었다. 몇 달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자 더 이상 쓸쓸하지 않은, 동요처럼 들리게 된 '사랑을 했다'.

아직 노랫말을 다 몰라 끝 글자만 따라 뭉개며 부르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가사를 출력해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첫영성체 교리를 받으며 기도문 외우느라 몇 달째 씨름 중인 까꿍이는 출력물을 받아들자마자 계이름까지 순식간에 외워냈다. 역시 동기부여가 중요하다.

그때 즈음 인터넷에 '사랑을 했다 유치원 떼창'이라는 검색어가 오르고 아이들이 쓴 노랫말 사진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입에 완전히 익은 이 노래는 개사의 영역으로 발전했다. "정치를 했다~ 순실이 만나~"를 시작으로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이 선율을 탔다.

"화장실 갔다 휴지가 없다 잊지 못할 추억이 됐다", "집으로 왔다 엄마가 없다 우리 신나게 놀자", "방학을 했다 이젠 자유다 우리 늦잠을 자자" 등등 아이들은 쓰라는 일기 대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개사를 하며 배를 잡고 웃어댔다.

막둥이의 독서 저렇게 두꺼운 책을 보다니, 막둥이까지 다 컸다. (아직 글을 몰라 그림만 본다는게 함정이지만, 그마저도 보다 잠드는 게 주제이지만 ^-^)
▲ 막둥이의 독서 저렇게 두꺼운 책을 보다니, 막둥이까지 다 컸다. (아직 글을 몰라 그림만 본다는게 함정이지만, 그마저도 보다 잠드는 게 주제이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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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있는 떼창

'사랑을 했다'가 어린이들 사이에서 예상 밖의 인기를 끌자 인기 요인을 분석하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따라 부르기 쉬운 선율, 아이돌 노래 치고 느린 템포, '멜로드라마', '러브 시나리오' 두 단어 외엔 영어가 없는 쉬운 한글을 인기요인으로 분석했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평범하지 않은 음색, 약간 건방지게 들리기도, 장난을 치는 개구쟁이 목소리 같기도 한 음색이 아이들을 잡아끌지 않았을까? 떼창을 하는 아이들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껌 하나 질겅질겅 씹는 듯한 얼굴로 목소리를 왜곡시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난 이제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는 표정으로.
1인 1냉면 완냉하는 아이들. 정말 다 컸다. 이젠 '빼박' 5인분을 시켜야 한다.
▲ 1인 1냉면 완냉하는 아이들. 정말 다 컸다. 이젠 '빼박' 5인분을 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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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세계로 성큼 한 걸음

내가 처음 부른 가요가 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러나 동요가 아닌 가요를 처음 부를 때, 특히 친구들과 떼창을 할 때의 기분은 아직도 생생하다. 금기시 된 것을 깨트린 쾌감과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일탈을 넘어 세력을 만들어 낸 성취감 비슷한 그런 어른들의 세계, 세상의 중심으로 한 발 다가선 기분이었다. 한 마디로 어른이 된 뿌듯함이 몇 달 동안 이유 있는 떼창을 울려 퍼지게 하고 있지 않을까.

머지않아 아이들은 진짜 연애를 하고 실연의 아픔을 겪으며 '사랑을 했다'를 목에 힘주어 부르는 떼창이 아닌 마음으로 곱씹으며 부르는 날이 오겠지. 그런 날이 조금은 더디 오길 바라며 삼남매의 귀여운 한때를 나도 즐겨야겠다.

"결혼을 했다~ 애를 셋 낳아~ 삼남매의 엄마가 됐다~
볼만한 휴먼드라마 괜찮은 행복 그거면 됐다
남편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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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변두리 마을에서 세 아이를 키우며 가끔 공연대본도 쓰는 극작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