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최늘샘

관련사진보기


애리조나에서 시작한 히치하이킹 모험을 좀 더 해보고 싶었으나 계속되는 야영으로 몸이 많이 지쳤다. 걱정하고 만류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심지어 '어떤 주에서는 히치하이킹이 불법'이라고 얘기하는 미국인도 있었다. 상상과 모험의 꿈을 잠시 접고, 플래그스태프에서 워싱턴 D.C.까지 가는 장거리 버스표를 끊었다.

6월 12일 오전 2시부터 14일 오전 10시까지 무려 56시간의 버스 여행. 누울 수 있는 슬리핑 버스가 아닌 딱딱하고 약간은 지저분하기도 한 그레이하운드 최저가 일반 버스다. 몇 시간에 한 번씩 꼭 도시와 교통 중심지들에 정차하는 그야말로 완행버스. 그 딱딱함과 불편함, 분주함이 점점 익숙해졌다.
 플래그스테프 정류장의 사람들
ⓒ 최늘샘

관련사진보기


플래그스테프는 미국 중산층 가족 시트콤에 나올 듯이 깨끗하고 풀밭이 많고 노숙인이 보이지 않는 마을이었지만, 중심가 변두리 조그마한 그레이하운드 터미널에는 넝마주이와 떠돌이, 혼잣말을 중얼대는 사람, 땀 냄새나는 초췌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터미널의 밤을 지키는 매표원 조시 워커 씨는 관리용 CCTV 아래에서 매표와 스낵 판매, 수화물 처리, 화장실 청소를 모두 혼자 담당했다. 일주일에 사흘씩 밤을 새워 일한다고 했다. 학창 시절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가 떠올랐다. 사회학과 대학을 졸업하고 밴드에서 기타를 치는 조시 씨는 좋은 뮤지션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매표원, 뮤지션 조시 워커 씨
ⓒ 최늘샘

관련사진보기


"그레이하운드는 하위 계층 사람들이 많이 이용해. 6개월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데 밤 새우는 건 피곤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건 좋아."

ⓒ 최늘샘

관련사진보기


소위 저개발 국가로 불리는 인도의 기차가 연착이 심하다고들 말한다. 미국 버스의 연착에 대해서는 전에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2013년 인도와 2018년 미국 여행에서 경험한 바로는, 인도 기차보다 미국 장거리 버스의 연착과 일정 변경이 훨씬 심했다. 플래그스태프 터미널에서 예약한 노선을 확인하자 조시 씨는 해당 버스의 엔진이 고장 나 언제 올지 알 수 없다며 전체 경로를 변경한 새로운 티켓을 끊어주었다.

56시간 동안 6번, 버스를 갈아탈 때마다 이런 식의 연착과 변경이 계속되어 매우 힘들고 피곤했다. 하마터면 하루가 늦어져 예약한 호스텔의 하루 치 금액을 날려야 할 판이었다. 터미널 와이파이존에서 호스텔에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설상가상. 때론 엎친 데 덮치는 게 여행이다.

 변경된 티켓 한 뭉치를 받고...
ⓒ 최늘샘

관련사진보기


플래그스태프, 알부커커, 오클라호마시티, 멤피스, 내쉬빌, 샤로츠빌에서 연착된 버스에 대해 항의하고 승객 한 명 한 명 줄을 서서 경로와 시간을 변경하는 과정을 거쳐 겨우겨우 동부의 끝 D. C.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동승한 승객들 대부분 큰 문제 제기 없이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라, 미국 사람들 인내심도 대단하다 싶었다. 한편으로는 하위 계층의 만연한 체념처럼 느껴져 서글프기도 했다.

ⓒ 최늘샘

관련사진보기


내쉬빌에서 갈아탄 야간 버스에서 머나먼 볼리비아 수끄레에서 온 이주노동자 청년 모리셔스와 그의 동생을 만났다. 핸드폰도 손목시계도 없고 영어를 전혀 모르는 그들은 연착되고 변경되는 버스 때문에 나보다 더 불안해하며 자주 시간을 물었다. 이방인으로서의 동질감이 느껴졌고 휴게소에서 산 두 개 1달러짜리 바나나를 나눠 먹었다. 몇 시간 만의 음식이었는지 모른다.

모리셔스와 그의 동생은 버지니아주 스프링필드에서 하차했다. 그들에게 일거리를 줄 사람이 터미널에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이주민에게 미국은 여전히 기회의 땅, 아메리칸 드림의 현장일 것이다. 대부분 이주노동자가 최저임금이나 그 이하의 임금을 받고, 주류 선주민들이 피하는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은 세계인들 모두가 알고 있는 지구촌 전체의 불평등이며 슬픈 진실이다.

스프링필드 spring field, 봄의 들판, 볼리비아에서 버스를 타고 온 모리셔스 형제에게 부디 미국이 희망의 들판이 되기를.

ⓒ 최늘샘

관련사진보기


"부에나 수에르떼 Buena suerte 당신의 길에 행운이 있기를!"

스마트폰 사전으로 처음 찾아서 건넨, 나의 첫 스페인어 인사다.




태그:#세계여행, #세계일주, #미국횡단, #모이, #유최늘샘의세계방랑기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남쪽 바다 미륵섬에서 유년기를, 지리산 골짜기 대안학교에서 청소년기를, 서울의 지옥고에서 청년기를 살았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827일 동안 지구 한 바퀴를 여행했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생활놀이장터 늘장,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 섬마을영화제에서 일했다. 영화 <늘샘천축국뎐>, <지구별 방랑자> 등을 만들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