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든 컨텐츠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할 지도 모른다. 한 판타지 소설이, 10년 동안 영화로 전편이 제작되며 전 세계를 사로잡은 것을 목도한 것이 우리 세대다. 영화로 끝나지 않고 이는 전 세계에 스튜디오를 만들며 관광 상품이 되기도 했다.

이로 그치지 않고, 작가는 후속작을 희곡으로 내며 그것은 연극으로 제작됐다. 그 연극은 '그' 웨스트엔드에서 오픈 이래 매일 전석 매진을 이뤄내며 이젠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했다. 이젠 호주 멜본과 미국 샌프란시스코, 독일 함부르크에서도 공연을 할 예정이라 하니, 이 컨텐츠가 가지는 영향력과 경제력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으리라. 이건, 우리가 모두 최소한 들어는 봤을 법한 이야기 '해리 포터'다.

우연성에 기댄 전개

 <해리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 공연이 진행 중인 영국 런던 팔라스 극장.

<해리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 공연이 진행 중인 영국 런던 팔라스 극장. ⓒ 조민형


<해리 포터> 연극을 보러간다 생각을 했을 땐 기대가 크다. 단순히 흥행한 컨텐츠라서가 아니라, 서사의 완결성을 봤을 때 이는 아쉬움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전 시리즈에서 롤링이 보여준 작가로서의 훌륭함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중 하나는 자신이 뿌린 '떡밥'을 잘 챙긴다는 점이었다. 인물을 넘어서, 소품이나 오브제도 뜬끔없이 등장하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누가 론의 강한 애착을 받는 것으로 꽤나 인상 깊게 보이던 쥐가 실은 사람이었다고 짐작 했겠나. 스쳐지나가는 호그와트 학생 중 하나일 줄 알았던 네빌 롱바텀이 볼드모트의 뱀을 죽일지는 누가 알았을까. 이런 이야기 전개는 이야기의 필연성을 더욱 견고히 했다. 이는 수많은 수용자를 서사에 무리 없이 진입, 몰입시키기도 했다.

<저주 받은 아이> 시리즈에서 이 미덕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고 그 흔한 복선마저 없던 볼드모트와 벨라트릭스 사이 딸의 존재부터 그러하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엉성하니 관객들은 '반전'이 드러날 때 납득보다 황당함을 겪는다. 백번 양보하여 델피의 존재를 복선으로 깔기에는 무리가 있었다고 인정을 한다 해도, 여전히 서사는 물음표 투성이다.

그 예로, 델피에 이끌려 타임 터너를 통해 과거로 돌아간 알버스와 스콜피우스가 해리에게 자기가 존재하는 시간을 알리는 때를 보자. 그들은 릴리 포터, 해리 어머니의 유일한 유품인 담요를 통해 해리에게 자신들의 위치를 알린다. 물론 이 편에서 담요는 미리 언급된다. 허나 그렇다고 개연성이 생겨난 건 아니다. 도대체 저 두 아이는, 무슨 확신으로 해리가 그 시간 내에 담요를 '반드시' 볼 것이라 생각하고 메시지를 남기는가. 그리고 현재를 사는 해리는 또 그것을 우연히, 필요한 때에 읽는가.

또한 갑자기 등장하는 또 다른 타임 터너의 존재도 그러하다. 도대체 타임 터너를 완전히 없애자고 이야기가 나왔을 때, 왜 드레이코는 자신에게 또 다른 타임 터너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아니면 아이들이 또 다른 시간대로 이동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즉각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갑자기 해리를 찾아가서는, 드레이코에게 이야기되는 또 다른 타임 터너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느껴진다. '시간 속으로 사라진 아이들', 이는 말만 들어도 어마어마하다. 이 어마어마한 난간을 너무 쉬이 해결하는 인물들, 이야기는 엉성하며 허무하다. 

모든 사건이 해결되고 난 후 델피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아즈카반으로 보내는 것을 택하는 결말 또한 아쉽다. 그녀는 볼드모트보다 더 비범한 인물이리라. 호그와트나 마법 학교에 가지 않은 채 해리를 위협할 수 있는 마법을 쓰고 이 시간을 모두 뒤집는다. 게다가 이야기에 의하면, 그녀는 볼드모트가 절대 알 수 없었던 '사랑'조차 알지 않는가. (사실 이 또한 설득력이 부족하다. 차라리 부모가 있더라면, 자신이 이렇게 소외되어 살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개인적 욕망으로 푸는 것이 말이 될 법 했다) 아이들의 왜 델피를 죽이지 않냐는 말에, 어른들은 "우린 쟤보다 나은 존재다", "짜증나게도 우리가 평생 배워온 것이 이런 것 아니냐"고 응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볼드모트를 이미 죽였었다. 죽은 볼드모트는 이 시리즈의 반동 인물의 욕망의 원천이기도 했다. 이런 전제 속 '죽음을 죽음으로 되갚는 것은 악당이나 하는 짓이다'라는 기계적 호소는 관객들에게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서사의 결말로 채택된 '일상으로의 회귀'를 방해할 정도다. 이미 볼드모트보다 더한 딸이 살아있으니 말이다.

타임 터너, 시간에 관한 이야기, 하지만...

타임 터너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간을 돌리는, 일종의 시간 여행 도구다. 오늘 날은 꽤나 보편화된 소재지만, '시간 여행'이 특히 서구적 서사에서 등장하며 불러 일으킨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와 함께 서구의 시간은 직선적으로 흘러갔다. 시간은 돈이 됐고, 어제보다 오늘은 나아지고 오늘보다 내일은 나을 것이라는 특유의 근대적 낙관까지 생겨났다. 그러한 직선형의 시간에 균열을 낸 것이 시간 여행이라는 개념이었다. 그리고 이 시리즈는 타임 터너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들의 연속으로 구성됐다. 근대적 시간관에 대한 통찰을 기대할 법도 하다.

이야기는 <불의 잔>편에서 죽은 세드릭 디고리라는, 해리포터의 영웅적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해 희생된 인물을 살려야 한다는 목적 의식 하에 진행된다. 이러한 소재는 분명 더 나은 질문 거리로 나아갈 수 있었다. "대의를 위해 이뤄지는 누군가의 희생은 올바르냐"고 말이다. 이 때 대의라는 명사에 분명 '시간' '근대적 발전' 등의 개념어도 대입될 수 있다. 도출된 질문은 희생된 자를 복원하고, 현재의 삶이 최선이 아닐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마찬가지로 시간관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었다.

 연극 <해리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 사진은 미국 뉴욕 공연 당시 모습.

연극 <해리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 사진은 미국 뉴욕 공연 당시 모습. ⓒ AP/연합뉴스


하지만 <저주받은 아이>는 시간관에 대해 도전하다가, 갑자기 '하지만 현재가 최선이다'라는 결말로 주제를 틀어버린다. '만약'이라는 문법으로 기존 서사를 재구성하는 데 있어서, 여태껏 전개되어온 시리즈의 플롯이 이 세계관에서 가장 현실 가능한 긍정적 세계라는 점을 돋보이며 말이다. <저주 받은 아이>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세계는 세드릭 디고리의 생존이라는 점이 나비 효과처럼 다른 사건들에 영향을 미쳐 결국 볼드모트가 지배하고 엄브리지가 호그와트의 교장이 되었으며, 슬리데린이 '머글 고문'을 심심치 않게 해내는 곳이다. 객석까지 날아다니는 디멘터는 그 세계의 참혹성을 더욱 부각한다. 해리포터 승리 이후 맥고나걸 교장 하의 호그와트와는 대조되는 풍경이다.

<저주 받은 아이>의 선·악은 이렇게 현재와 만약의 세계, 새로운 상상력의 세계로 구분된다. 상상력의 가능성을 모두 차단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현재가 '가장 발전한', '최상'의 시간이라는 낙관적인 태도는 근대, 서구적, 더 나아가 자본주의적 시간관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최선의 시간은 특히나 '하나의 구원자로 모든 문제가 극복'되는 서구적 세계관을 더욱 부각한다. 더 나아가 새로이 보이는 세계가 세드릭 디고리의 희생이 있어야만 가능한 세계라는 점에서 해리포터는 발전을 위해 소수의 희생은 필연적이라 이야기하는 공리주의적 가치를 재생산하고 있기도 하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 나은 세계가 됐다, 그들에게 미안해 하며 살아가자'가 아니라, '어떤 영웅 같은 인물이 등장하여 악의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수적이다, 누군가가 선인일지라도'에 방점이 찍힌 <저주 받은 아이>는 꽤나 비윤리적이다.

캐릭터 붕괴

<저주 받은 아이>를 본 해리포터 팬들 사이에는 '볼드모트가 딸이 있다니, 심지어 그 딸은 코가 멀쩡하게 있어'와 같은 농담이 있었다. 숨겨진 딸로서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딸이라니, 이 무슨 아침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설정인가. 해리포터 팬덤은 <저주 받은 아이>의 이러한 서사적 '무리수'에 주목한다. 하지만 볼드모트의 딸, 델피만이 비판의 요소는 아니었다.

<저주 받은 아이>에서 주인공처럼 부각되는 두 인물이 알버스 세베루스 포터(해리포터의 아들), 스콜피어스(드레이코 말포이의 아들)라지만 결국 이 이야기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일환이다. 아무리 다른 인물이 부각된다 할지라도, 이야기의 중심이자 주인공은 해리 포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리포터의 캐릭터는 10년 동안 매 시리즈가 발간되고 개봉되며 독자와 함께 성장했고, 단단히 구축됐다. 해리포터는 사랑을 아는 인물이었다. 그것이 볼드모트를 이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허나 이 편에서, 해리 포터에게서 주로 보이는 모습은 가부장적 아버지로의 해리 포터뿐이다. 그는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알버스와 해리 사이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간다. 알버스는 아버지의 명예와 달리 대단한 성과를 보이지 않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가지고, 해리는 알버스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 아들과의 논쟁에서 '넌 최소한 아버지가 있잖아'라고 고함을 치며 '난 네가 내 아들이 아니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고 고백하는 해리는 당황스러운 '캐릭터 붕괴'다. 가부장제는 사랑의 대척점에 선다 하지 않던가, 설령 이 말을 수용하지 않는다 해도 해리의 모습은 다분히 가부장적으로 그려진다.

해리도 아버지가 처음이니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를 것이라고 반론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기에 해리는 오로지 알버스와 관계에서 문제를 보인다. 이전 편을 굳이 따지지 않고 이 편에서만 봐도 그러하다. 첫째 아들 제임스와 딸 릴리와 해리는 커다란 문제가 없어 보인다. 오로지 해리의 속을 썩히는 것은 알버스고 해리가 '사랑을 모르는 아버지'가 되는 것도 알버스다. 심지어 그들은 서사에서 비중도 없다. 굳이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는 설정이 왜 존재하는지 무색할 정도다.

가부장적 서사와 여성 괴물

<해리 포터>의 이전 시리즈는 이 시리즈가 다수의 어린 독자, 관람객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인지해서인지 다분히 도덕적인 교훈들을 이야기에 심어뒀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사랑과 우정, 연대가 그 대표다. 여성 인물의 활용이 '더 발전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저렇게 똑똑한 헤르미온느가 왜 해리나 론이랑 다니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존재하긴 했지만, 비판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남성 인물 해리포터가 남성 빌런 볼드모트와 갈등하는 것이 전체 시리즈를 관통한다지만, 헤르미온느나 맥고나걸 교수의 존재는 빛났고 여성 빌런 벨라트릭스는 헬레나 본헴 카터의 광기 어린 연기로 매력적인 악당이었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서는 그러한 도덕적 교훈이 돋보이지 않는다. 가부장적인 해리만이 문제가 아니다. 젊은 신세대로 등장하는 알버스와 델피는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행동 동기는 모두 아버지로부터 기인한다. 각자 상반되는 이유로서. 알버스는 아버지의 명예를 뛰어넘고자 세계관을 뒤흔드는 모든 무모한 짓을 벌인다. 델피는 아버지의 명예를 따르고자 한다.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사랑보다 복종, 충성으로 보인다. 아무리 'Lord Voldemort'가 하나의 명사처럼 굳어졌다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라면서. 아버지를 주구장창 'Lord'로 부르며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는 주종관계를 수행하는 듯한 델피는 기괴하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이 서사에서 강력한 여성 인물 델피는 또 한 번 가부장적 시선에 포착된다. "나는 새로운 과거이자 미래다, 나는 이 세계가 찾고 있던 해답이다"라는 대사를 여성 인물의 입을 통해 나오게 했다는 점은 훌륭하다, 만약 이 인물이 가부장적 시각에서 보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프로타고니스트들이 해리, 알버스, 스콜피우스로 모두 남성들인 이 서사에서, 그녀는 새로운 유형의 매력적인 여성 인물보다 가부장적 시각에서 비-정상성의 범주에 속한 '여성 괴물'로 비춰진다. 마법 세계의 무기이자 힘인 마법 지팡이를 남성 인물로부터 빼앗아 부수고, 해리를 죽일 수 있게 위협하는, 즉 남성의 권한과 힘을 모두 빼앗으며 세계의 질서를 뒤흔드는 여성 괴물 말이다.

아쉬운 서사, 훌륭한 연극

허나 이 부실한 서사는, 영화로 촬영됐다면 전 시리즈의 명성을 깎아먹었을 테지만 (실제 <해리포터> 팬들도 '저주 받은 아이' 편에 대해서는, 서사적으로 비판을 많이 하는 편이다) 연극으로 공연되며 용인이 된다. 오히려 팬들에게 또 하나의 팬 서비스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이 엉성한 서사. <해리포터> 시리즈의 미덕을 축소하고, 작품이 내포하는 가치의 윤리성으로도 아쉬운 서사를 포장하는 것은 연극이라는 장르다. 이미 영화 내에서 마법을 쓰는 것은 <해리포터> 첫 시리즈가 개봉될 때부터 가능했다. 관객들은 더 이상 새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무대에서 사용되는 마법은 다르다. 거대 자본으로 이뤄낸 다양한 무대 효과들, 와이어를 쓴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움직임은 아주 자연스럽다. 델피가 해리를 위협할 때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를 사용하여 교회 의자를 들어 올릴 때는 그 현실감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배우의 손짓에 맞추어 마법 전투 중 배우는 공중으로 치솟고, '루모스'에 불이 켜지기도 한다. 타임 터너로 시간이 전환됐음을 알릴 때, 대체 어떻게 조명 효과를 쓰는 건지 무대 전체가 흔들린다.

이는 무대 내에서만 활용되지 않고 극장 전체로 확장된다. 디멘터는 무대 밖, 객석 앞과 위에서 공연장을 날아다닌다. 델피의 방에서 볼드모트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는 낙서들이 보여질 때, 연극은 단순히 무대 위의 벽에 그 낙서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공연장 전체에 비춘다. 이는 두가지 효과로 이어진다. 하나는 스펙타클로 환상적이다. 좌중을 우선 압도한다. "이렇게 마법을 쓰는데 말이 안 될 수도 있지"라고 합리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단순히 마법 세계를 바라보는 관람자로 설정된 관객의 한계성을 뛰어 넘는다. 관객들은 이 세계에 일환이 된 것 같다는 착각을 받는다. 단순히 관람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그 세계의 한 부분이 된 것 같다 느끼니 말도 안 될지라도 "그럴 수 있다"라고 대답하게 된다.

장르적 특색으로 서사적 한계성을 극복한 이 서사는 연극의 제의적 성격을 온 몸으로 보여주기에 이른다. 워낙 티켓을 구하기가 힘든 탓에, 이 연극은 그냥 시간이 남기에 아무 배경 지식 없이 보러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연장은 해리포터의 성장을 모두 지켜본, <해리 포터>에 대한 나름의 애정이 있는 관객들이다. 관객들은 한 시대를 풍미한 한 서사의 후속작을 보기 위해 이 긴 연극을 보고자 했다. 감히 말하자면, 이 연극은 그 시대를 풍미한 시리즈에 대한 예배나 제사가 된 셈이다.

다시금, 영국적이던 서사

다시 '문화적 컨텐츠'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 연극은 성공하여 해외 수출까지 해냈지만, 그럼에도 공연 효과는 영국에서 가장 클 것이다. 당장 공연장을 나서서 튜브를 조금만 타고 가면, '킹스크로스'역이 있는 런던 소호 시내 한복의 연극 아닌가. 소설·영화로서 <해리 포터>는 전통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영국적 서사'가 되었고 수익을 얻으며, 그것을 토대로 연극까지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다 보면 결국 한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소비자로서, 앞으로 한국의 컨텐츠를 더 바라게 된다. 문화적 컨텐츠는 단기적으로는 돈을, 장기적으로는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며 사람들의 인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영미권의 서구적 언어과 문법으로 구성된 <해리포터> 말고, 새로운 언어로 쓰여질 한국적 컨텐츠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비단 홀로의 생각이 아니리라.

<해리포터>의 여태까지 장점은 영국적인 이야기를 하는데에 굳이 전통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해리포터> 시리즈는 지극히 현재의 이야기를 해냈다. 이는 같은 시대를 사는 수용자들에게 나와 동떨어진 마법 세계가 아니라, 어쩌면 내가 모르는 어느 곳에 저 환상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발상으로 흥미롭게 다가간다.

'한국적인 컨텐츠'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직 우리는 왠지 한복을 입어야 할 것 같고, 시대적 배경은 역사를 토대로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러다보니 주로 '한국적'이라 여겨지는 서사는 사극 드라마나, 공연계에서는 조선 시대, 혹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 다수를 이룬다. 하지만 좋은 것은 우리도 수용하여 상상력의 한계를 깨자. '한국적 서사'라는 것의 가능성은 더 크다. 'K팝' 열풍이 불고 문화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이 시대, 이 한계를 넓히다 보면 많은 아쉬움이 있던 <저주 받은 아이>보다 더 나은 컨텐츠를 창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조금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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