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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을 언제 가나? 고민이었다. 목요일(7월 26일) 아침, 서울로 출근하는 남편의 차를 타고 가서 조문할까 생각했다. 목요일 오후 3시엔 동네 아이들과 자연놀이 강의가 있다. 고 노회찬 의원의 빈소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오후 1시는 될 것이다. 그때 오면 수업을 준비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저녁에 조문을 가는 것이 더 현실성 있어 보였다.

수업을 끝내고 오후 7시가 돼 집에서 출발했다. 남편에게 추도식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지하철에서 노회찬과 남편에 대해 생각했다.

1987년 대선에 남편은 백기완 선대본부에서 대학생 운동원으로 활동했다. 노회찬이 갔던 그 길을 남편도 함께했다. 그때의 슬로건은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였다. 남편이 참석한 첫 유세에 딸랑 300명의 사람이 모였다. 그때 남편은 자신이 내뱉은 슬로건 '민중의 시대'의 실현 가능성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따졌다면 아마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백기완 선대본부에서 활동하던 남편도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취직 걱정을 했다. 남편이 자신의 가치관을 버리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선택한 회사는 언론사였다. 열심히 언론고시를 대비했다. 그때 남편은 취업해서 첫 월급을 받으면 백기완 선생님의 보약을 한 채 지어 드려야겠다고 마음 먹었단다. 3년 정도 준비를 하고 남편은 언론사에 들어갔다.

기다리던 첫 월급을 받았는데 보약을 지을만한 돈이 못 돼 보약을 못 지어 드렸다고 한다. 그렇게 남편은 힘겨운 생활인이 돼 간다. 월급으로 서울의 고시원 월세를 내야 했고 새로 옮긴 하숙집의 하숙비도 내야 했다. 그 월급으로는 서울에 자기 몸 하나 누일 공간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겨우 전세금을 마련해서 나와 결혼하고 아이를 셋을 낳았다. 경기도 반지하 전세방에서 시작한 우리 부부는 결혼 23년이 지난 지금, 경기도의 한 낡은 아파트의 주인이다.

남편과 나는 단체 몇 곳에 매달 후원을 한다. 가끔은 진보정당의 정치인에게 '10만 원'의 후원금을 보낸다. 물론 세액공제로 돌려받을 수 있는 돈의 크기 딱 그 만큼이다. 그렇게 위안을 삼았다. 생활인인 우리가 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이나마 하고 있다고.

27년간 '나의 투표사'를 보면 나는 할 수 있는 한 '진보정당'에 내 표를 줬다. 물론 남편과 나는 끊임없이 싸웠다. '사표인가, 아닌가? 당선 가능성이 있는가, 없는가?'를 가지고. 우린 그렇게 30년 동안 생활인이 돼 갔는데, 노회찬은 그 자리에서 허무맹랑하던 꿈을 현실로 만들어 내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었다.

내게 투표권이 생기고 처음 들었던 '민중의 정치 세력화'를 목표로 한 진보정당 구호의 실현 가능성을 나는 눈꼽만큼도 믿지 않았다. 그건 당위의 구호일 뿐 현실 가능한 구호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회찬은 그 구호를 30년간 내리지 않았고, 그것을 위해서 맨 앞에서 행동했다.

그가 아무리 굳건했다 하더라도 생활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어려움에선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이슬만 먹고살 수 없으니까. 게다가 그는 꽤 유능한 정치인이었다. 유능한 정치인은 정책 연구에 돈을 써야 한다. 그 정책연구원도 이슬만 먹고 살 수는 없으니까.

노회찬 추도식 사진 추도식이 열리는 대강당 밖에도 사람으로 꽉 차 있다
▲ 노회찬 추도식 사진 추도식이 열리는 대강당 밖에도 사람으로 꽉 차 있다
ⓒ 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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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에 도착하니 이미 오후 9시가 다 됐다. 연세대 정문에 들어서니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남편은 학교 은행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남편과 은행 앞에서 쏟아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중에 아는 사람들도 꽤 있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옆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OO이 엄마!"

'OO이 엄마'라면 한때 나의 호칭이다. 'OO이'는 우리 첫째인데... 순간 누군가 내 손을 잡는다. 아들이 다녔던 대안학교의 학부모님이다. 가까운 사이였는데... 반가운 얼굴이다. 만난 지 5~6년이 된 거 같다.

남편의 학교 후배도 지나다가 인사를 한다. 사람들과 '다음에 언제 한번 모이자' 말하고 헤어졌다. 과거에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모두 안타까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 온 것이리라.

남편에게 조문하고 가자고 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을까 걱정이 됐지만, 빈소를 코앞에 두고 그냥 가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니 왼쪽엔 부의금 봉투를 쓰는 사람들이 보인다. 한층 내려가니 사람이 둘러서 섰던 에스컬레이터가 보인다. 다행히 에스켈레이터엔 사람들이 서 있지 않았다.

예상보다 조문을 기다리는 사람이 적다. 부모를 따라온 어린이도, 나이 지긋한 분도 보인다. 조문 오는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까 빨리 진행이 되게 많은 부분을 생략한 듯하다. 조문을 끝내고 나오는 사람들 눈은 벌겋게 부풀어 있다. 우리 순서도 금방 돌아왔다.

20명 정도 되는 사람과 빈소 안으로 들어섰다. 노회찬의 영정 사진이 보인다. 우린 노회찬을 잃어 슬픈데 사진 속 노회찬은 환하게 웃고 있다. 이제 우린 저 미소를 다시 볼 수 없다. 사진을 찍을 땐 영정 사진이 될 줄 몰랐을 텐데... 목례를 마치고 유족을 향해 몸을 돌렸다.

노회찬 추도식 사진 추도식이 열리는 연대 안
▲ 노회찬 추도식 사진 추도식이 열리는 연대 안
ⓒ 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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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작가가 대표로 인사말을 한다. '먼 곳에서 바쁘실 텐데 노 의원 가는 길 외롭지 않게 와 주셔서 감사하다'는 요지의 말이다. 다시 목례를 마친 사람들이 빈소를 나선다. 그 대열을 따라서 나가려다 갑자기 무언가를 빼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노회찬 의원과 함께 30년 진보정당 운동을 함께 했던 심상정 의원에게 '힘내시라' '용기 잃지 마시라' 말씀을 드리는 거다.

그 말을 전하려고 며칠 전 심상정 의원 홈페이지에도 들어갔는데 게시판의 마지막 글이 노회찬 의원이 돌아가시기 전 글이라 '글쓰기' 버튼이 쉬이 눌러지지 않아 포기했었다.

유족 자리에 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 기다리는 사람들 옆에 나도 가서 섰다. 이정미 대표에게 "힘내세요" 말씀을 드리고 악수를 했다. 눈물이 말과 함께 나왔다. 그리고 옆에 심상정 의원에게 "힘내세요" 말씀드리고 손을 잡는데 힘겹게 서 있는 심 의원의 작은 어깨가 보였다. 안아 드리고 싶어서 다가가는데 심 의원이 되려 나를 안아주며 토닥여 주신다.

노회찬은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정의당은 멈추지 말고 가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과연 노회찬 없는 정의당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노회찬 없는 심상정은 가능할까? 아마 심상정 의원은 자신의 한쪽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정의당을 위해, 노회찬의 꿈을 위해, 생활인인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세상 누구보다 노회찬을 잃어 슬픈 그의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될 일을 찾아 무엇이라도 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정의당 홈페이지에 들어가 당원 가입 버튼을 눌렀다.

 서울 엠엔피 챔버오케스트라 단원들이 26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빈소에서 고인을 위한 추모 연주를 하고 있다.
 서울 엠엔피 챔버오케스트라 단원들이 26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빈소에서 고인을 위한 추모 연주를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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