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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올프렌즈센터에서는 2018년 7월 9일부터 13일까지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친구 고향집 방문'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이주노동자를 대신해 가족과 친척들을 만나 안부를 전했고 한국에서 일을 마치고 본국으로 귀국한 전직(?) 이주노동자의 집을 찾아가 그들의 변화와 성공을 축하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 기자말
성공한 여사장이 된 이주노동자 짜리야
 성공한 여사장이 된 이주노동자 짜리야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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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일하고 있거나 일을 마치고 귀환한 캄보디아 노동자와 그의 가족을 만나러 가기 위해 캄보디아로 출국하는 날. 페이스북에 '4년 전 오늘'이라는 알림이 울렸다. 무심코 '확인'을 눌렀고 동시에 뜬 사진을 보고 잠깐 소름이 돋았다. 4년 전 오늘 그러니까 2014년 7월 9일이 짜리야를 처음 만난 날이었던 것이다.

4년 전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취재하기 위해 공장, 농장,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니다가 만난 친구가 짜리야였다. 착하고 순하게 생긴 짜리야는 대뜸 나를 '언니'라고 불렀다. 기자님, 선생님, 팀장님 보다 얼마나 따뜻하고 친근한 호칭인지 나도 단박에 그녀를 '동생'이라 부르기로 했다.

4년 전 페이북에 올린 짜리야와의 첫만남
 4년 전 페이북에 올린 짜리야와의 첫만남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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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녀의 나이는 28살. 고등학교를 마치고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였던 그녀가 한국에 온 건 다 가난 때문이다. 월 100불에도 미치지 못하는 교사 월급으로는 도저히 대를 잇는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더욱 놀랐던 것은 3살 된 아들을 둔 엄마라는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아들을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생판 낯선 땅 한국에 온 용감한 엄마. 4년 전, 당시 그녀가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저는 가난해서 공부를 많이 못했어요. 배부르게 많이 먹어본 적도 없어요. 제 아들은 그렇게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아요. 아들은 공부도 많이 시키고 한국 사람들처럼 잘 살게 하고 싶어요. 한국에서 돈을 벌어서 부모님 집도 지어주고 우리 집도 짓고 잘 살고 싶어요. 그리고 저도 선생님들처럼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어려도 속이 꽉 찬 여성인 짜리야의 일터는 경기도 광주의 비닐하우스 농장이었다. 호텔이나 음식점에 납품하는 특수 채소를 키우는 농장이라는데 마트에서 흔히 보는 채소는 아니고 고급 요리에 들어가는 고부가가치 작물인 모양이었다.

짜리야를 만나러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맑은 날은 비닐하우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차를 대고 시동을 끈 채로 그녀가 올 때까지 숨죽여 기다려야 했다. 혹시라도 사장님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짜리야는 그날부터 감시를 받고 외출 금지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은 감시가 소홀해서 짜리야가 거처하는 비닐하우스 근처까지 차를 가지고 갈 수 있지만 밭또랑 진흙탕에 차가 빠져서 오도 가도 못하는 낭패를 각오해야 한다.

"사장님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해요. 한국사람 만나지 말라고 하고 센터같은데 절대 가지 말라고 해요. 또 같은 캄보디아 친구들과 연락하고 만나고 그러는 것도 싫어해요. 지난번에 센터에 가다가 사장님에게 들켜서 잡혀간 적 있어요. 사장님한테 혼나는 거 무섭지만 그래도 센터에 가고 싶어요.

센터에 가면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할 수 있고, 방에서 편하게 쉴 수 있고 한국말도 배우고, 선생님들이 해주시는 맛있는 밥도 먹을 수 있고 캄보디아 친구들 만나서 고향말로 실컷 이야기 할 수 있어서 좋아요. 안 그러면 너무 외롭고 슬퍼요. 아기 보고 싶고 남편 보고 싶고 부모님 보고 싶고 고향생각 나서 만날 울어요. 센터에 오면 슬프지 않아요. 즐거워요."

이주노동자를 고용한 한국 사장님들은 대부분 이들이 기숙사(기숙사라고 해봐야 비닐하우스나 컨테이너 하우스가 대부분이다)를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몇몇 노동자들이 사장님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고 다른 회사로 가버리거나 도주하는 경우가 있어서 피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또 자신들이 이주노동자를 대하는 태도(욕을 하거나 폭력을 사용하기도 하는 등의 부당한 대우)를 외부인들이 함부로 비판하는 것에 대해 지극히 불쾌함을 표한다. 폭력이나 욕설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것이고, 욕설이라고 하지만 평소에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기 때문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말라는 투였다.

짜리야와 함께 찾은 마을 회관. 120여명의 아이와 어른이 한국손님을 맞았다. 우리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한국사람이었다고 한다.
 짜리야와 함께 찾은 마을 회관. 120여명의 아이와 어른이 한국손님을 맞았다. 우리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한국사람이었다고 한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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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이렇다보니 자칫 이주노동자들을 도와준다고 섣불리 개입했다가는 오히려 그들을 더 힘들게 할 수도 있었다. 사장님이나 한국 관리자들 눈밖에 나면 한 곳에서 일을 하기 어렵고 그래서 자주 일자리를 옮기면 강제 출국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 깊이 개입해 관여하기 보다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아파해 주는 '친구'가 되어주고 어려울 때 찾아 올 수 있는 '비빌 언덕'이 되어 주기로 했다.

짜리야는 눈치가 빠르고 영리해서 사장님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국어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비닐하우스 노동자들을 모아 센터로 데려오고 한국 생활에 익숙하지 않아 어려움을 당하는 어린 동생들을 도와주었다. 또 급한 도움이 필요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에게 전했다. 그렇게 우리 센터를 알게 되고 오게 된 친구들이 적지 않아서 짜리야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계의 마당발로 통하는 재주꾼이다.

인정도 많고 바지런 한 짜리야는 자신이 일하는 비닐하우스 한쪽에 밭을 일구고 거기에 캄보디아 채소를 심어 강원도에도 전라도로 보내기도 했다. 짜리야는 한국으로 일하러 온 고향 동생들을 위해 손수 채소를 길러 보내는 마음 따뜻한 누이이며,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는 화상통화로 글을 가르치는 열혈 엄마였다.

요즘 같은 여름이면 더위를 피해 해가 뜨기 전부터 비닐하우스에 나가야 하고 겨울이 되면 일이 없어 남쪽 지방의 다른 농장에 일당 노동자로 팔려 다녀야 하는 고된 삶이었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 그녀의 단단함에 감동했다.

혼자 벌어서 가난을 이겨내긴 쉽지 않을 터, 짜리야가 오고 난 후 1, 2년 남편과 언니도 차례로 한국에 들어왔다. 온 가족이 힘을 합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던 짜리야의 귀국을 미처 알지 못했다. 이리저리 바쁘다 보니 짜리야가 돌아가고 난 몇 주 후에야 알게 된 것이다.

미안하고 섭섭한 마음에 짜리야 아들에게 줄 옷과 신발 가족들에게 줄 화장품 몇 가지를 챙겼다. 선물을 받고 좋아할 짜리야의 얼굴이 떠올랐다. 특유의 하이톤 목소리도 귀에 들리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캄보디아에 도착하자마자 짜리야의 연락을 받았다. 한국에서 선생님들이 간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전부터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선생님 잘 도착 하셨지요?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제일 먼저 저희 집으로 오셔야 해요. 엄마와 제가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어요. 한국에서 매주 선생님들이 저희에게 식사를 대접해 주셨으니 저도 선생님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드릴 거예요. 캄보디아 음식이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어요."

짜리야는 우리를 자신이 지은 농자재 상점으로 안내했다. 시골 벌판에 100평도 넘어 보이는 상점은 창고처럼 양철과 판넬로 지었지만, 인근에서 가장 크고 현대적인 건물이었다. 누가 봐도 성공한 여사장이 분명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우리 짜리야랑 사위랑 짜리야 언니까지 잘 대해주시고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많이 드세요. 캄보디아 음식 많이 드시고 가세요. 여기 바나나 잎에 싼 밥하고 대나무에 넣은 밥은 싸가지고 가셔도 되요. 이건 날씨가 더워도 상하지 않아요. 들고 다니면서 배고플 때 드세요."

딱 우리네 엄마 같은 짜리야 엄마가 한도 끝도 없이 음식을 권한다. 한국에서 당신의 딸들과 사위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라니 음식으로라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것이다.

"한국에서 번 돈으로 이걸 지었어요. 재래식 집도 신식 집으로 바꾸고 남편이랑 언니가 돈을 벌어서 보내면 더 크고 좋게 만들려고 해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돈이 많이 벌리지는 않지만 열심히 하면 잘 살게 될 것 같아요. 한국에서 돈 벌지 않았으면 이런 가게는 꿈도 꾸지 못했을 거예요. 한국, 한국 사람 다 고마워요. 남편이랑 언니도 한국에서 돈 벌고 있으니까 이제 우리 잘 살 거예요. 저도 선생님들처럼 가난한 아이들 가난한 노인들 도와주고 싶어요."

착하고 기특한 짜리야. 힘들고 어려운 이주노동자의 시간들을 억척스럽게 이겨 낸 나의 캄보디아 동생. 짜리야의 꿈이 이루어지길 그래서 더 많은 캄보디아 아이들이, 노인들이 그녀로 인해 행복해지길 그녀와 함께 기도한다.

식사를 준비해 주신 어머니께 작은 선물을 전달했다
 식사를 준비해 주신 어머니께 작은 선물을 전달했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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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혜원 시민기자는 사단법인 올프렌즈의 다문화팀장입니다.



태그:#이주노동자, #사단법인 올프렌즈,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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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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