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전쟁의 위험을 피해 제주로 온 예멘 난민들은 위험을 이유로 혐오가 정당화되는 상황을 마주해야 했다. 이미 많은 난민들이 함께 살고 있었음에도 인식하지 못했던 한국사회이기에, 난민들을 접했을 때 '낯섦'과 더불어 '두려움'이 터져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가? '두려움'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혐오가 아닌 더 많은 평등을 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난민혐오에 대한 세 차례의 기획연재를 통해 두려움의 선동에 맞서는 평등과 인권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 기자말

 예멘 난민 신청자들이 29일 오후 제주시 일도1동 제주이주민센터에서 국가인권위 순회 인권상담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예멘 난민 신청자들이 6월 29일 제주이주민센터에서 국가인권위 순회 인권상담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두 달 전 사무실이 영등포로 이사를 갔다. 버스를 타고 다니다가 하루는 막차를 놓쳤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각 영등포역은 낯설었다. 잘 자리를 맡아놓은 남성들이 통로 양쪽을 점령하고 있었다. 통로로 접어든 순간 몸은 머리보다 빨리 긴장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바삐 쫓아갔다. 내게는 질서를 깨는 낯선 풍경으로 다가오지만 그들에게는 일상의 견고한 질서이고, 나는 이곳을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라 내게 아무도 관심이 없을 테고, 다행히 나는 운동화를 신어 잠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방해도 되지 않을 것이나 …… 두려웠다.

난민에 대한 이야기로 한국사회가 뜨겁다. 낯선 존재는 언제나 두렵다. 낯섦이 위험이나 위협으로 느껴질 때는 무섭기도 하다. 사람들이 불안에 휩싸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불안해하는 걸 탓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잘 알지도 못하니까' 불안한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잘 안다고 불안이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강남역 여성혐오살인 사건 이후 많은 여성들이 '여자라서 죽었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고 말하기 시작할 때 남성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남성은 여성으로 살아보지 않았으므로. 밤늦은 귀갓길 누군가 뒤에서 걸어오면 괜히 불안한 마음을 알 턱이 없다. 내 뒤를 걷는 사람은 제 길을 가는 사람일 뿐이라고? 여성들이 그걸 몰라서 불안한 건 아니다. 불안에는 가짜정보를 물리친 '앎'으로 넘어설 수 없는 뿌리가 있다.

영등포역을 지나는 나의 불안이 노숙인들로부터 오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들은 여느 때와 같이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다. '공공장소'에서 낯선 모습으로 마주쳐야 하는 상황을 초래한 것도 노숙인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불안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었다. '여성'으로 살아가는 내게 두려움을 새긴 것은 내가 아니다. 불안은 노숙인과 나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집이 없어 거리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사람들을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로 둔갑시키는 사회가 불안을 생산하는 것이다.

강남역 사건 이후 남성들은 왜 자신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느냐며 억울해했다. 그럴 만도 하다. 여성의 불안도 남성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남성의 시각에서 평가된다. 경찰에 신고해도 하찮게 여길 뿐이고 법원으로 가면 피고인보다 여성이 오히려 무고함을 주장해야 할 지경이다. 내게 무슨 일이 벌어져도 세상은 내 편이 아니라는 진실, 그것이 불안의 실체다.

세상이 편들어주지 않을 사람들

이런 사회에서 남성은 너무 편하게 산다. 하지만 성별이 남성인 개인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강남역 사건에 대해 경찰청은 '여성혐오가 아니다', '조현병 환자라 벌인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여성이라 겪는 일들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한 때에는 언제나 그랬다. '싸이코패스라 벌인 일', '중국인이라 벌인 일'과 같은 말들로 '어떤 남성'을 '남성 일반'으로부터 분리시켰다. '남성'은 살아남았고 조심하는 일은 늘 '여성'의 몫으로 남았다. 세상이 편들어주지 않을 사람들은 손쉽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이야말로 안전을 위협 당하게 된다.

권력은 혐오를 등에 업고 자신의 뜻대로 위험을 지목하고 대안을 가장했다. 여성은 위험을 지목할 기회도 권한도 가져보지 못했다. 각종 여성폭력 사건에서 반복되는 대책들이 별다른 변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게다가 이런 대책들은 여성으로부터 안전할 권리를 빼앗아간다. '오원춘 사건'이라고 불렸던 여성살해사건에서는 가해자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사건 이후 남은 것은, 의심되는 외국인을 신고하는 '애니콜 시스템'이었다. 여성이 안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외국인을 조심하는 것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전략 중 하나는 공포의 선동이다. 가부장의 품을 벗어났을 때 얼마나 위험한지 설교하며 여성을 집 안에 가두고, 집 밖의 세계에서도 남성의 보호 하에 있도록 한다. 위험을 직시하도록 하는 것과 공포를 선동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두려움에 맞서 대처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두려움에 갇혀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이다. 두려움을 기각하는 것도 두려움을 부추기는 것도 여성을 위한 일일 수 없다.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이 겪는 일에 대해서 말할 때 여성은 안전해질 수 있다.

난민 수용을 반대하며 난민법 개정을 촉구하는 토론회에서 한 발표자는 이렇게 말했다. "딸이 부족해서 베트남에서 데리고 오는데, 우리 딸들을 난민에 빼앗기고 있다." 이들이 여성의 편을 든다고 기대할 수 있을까? 난민혐오를 선동하는 세력은 여성의 안전을 걱정하는 척 하면서 여성혐오를 유포하고 있다. 이들에게 여성은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소유물일 뿐이다. 이들이 말하는 안전은 토지와 재산의 안전일 뿐, 생명과 존엄의 안전이 아니다.

문제의 원인을 정의하는 힘

강남역 2주기, 기억의 발걸음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2주기를 맞은 17일 서울 동작구 여성플라자 성평등도서관 '여기' 안에 마련된 '기억ZONE:강남역 10번 출구'를 찾은 한 여성이 포스트잇 글들을 읽으며 피해여성을 추모하고 있다.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2주기를 맞은 지난 5월 17일 서울 여성플라자 성평등도서관 '여기' 안에 마련된 '기억ZONE:강남역 10번 출구'를 찾은 한 여성이 포스트잇 글들을 읽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누가 여성들을 두려움에 떨도록 내버려두고 있는가. 누가 공포를 부추기며 여성의 선택지를 제한하고 있는가. 혐오를 선동하는 자들과 혐오를 방치하는 국가가 보증하는 안전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여성의 두려움에는 죄가 없다. 공포를 선동하며 차별을 조장하는 세력에 죄가 있을 뿐이다. 두려움이 혐오의 불쏘시개로 사용되도록 내버려두는 국가에 죄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사이'를 지배하고 있다.

강남역 여성혐오살인사건은 여성들에게 새삼스러운 사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는 새로운 사건이었다. 문제의 원인을 정의하는 힘을 여성들이 끝까지 내려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정신장애인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에 기대어 문제를 축소하고 눈길을 돌리려고 할 때 여성들은 '딴 소리 하지 말라'고 외쳤다. 여성혐오가 여성을 죽음으로 내모는 현실을 왜곡하며 정신장애인에 대한 혐오로 돌려막기 하려는 정부의 시도를 격파했다.

당시 여러 단체들이 함께 '평등해야 안전하다'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열었다. 여성이 혐오당할 만한 존재, 차별당할 만한 존재로 여겨질 때 여성은 결코 안전해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정신장애인도, 이주민도, 성소수자도 안전할 권리를 누리기 어렵다. 그들의 위험은 저평가 되고 오히려 위험한 존재로 지목되어 자유를 제한 당한다. 이렇게 혐오에 기대어 문제의 원인이 왜곡될 때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 우리의 안전할 권리는 끝없이 유예된다.

여성혐오를 문제로 지목한 것은 정신장애인이나 외국인이나 남성을 문제로 지목한 것과는 다르다. 어떤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잠재적 가해자를 단속하고 추방하는 것으로 내가 안전해지지 않는다. 문제를 정의할 힘이 내게 없다면 나는 잠재적 피해자의 자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을 생산하며 변화를 가로막는 '사이'를 재구성해야 한다. 어떤 정체성들 간의 관계를 불평등하게 만드는 사회를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다시, 평등해야 안전하다

난민을 반대한다는 집회에 "혐오가 아니다 안전을 원한다"는 말이 적힌 피켓이 보였다. 혐오는 개인이 만들어내는 감정이 아니다. 여성을, 이주민을, 무슬림을, 성소수자를, 세상이 편 들어주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공공연히 혐오하는 사회에서, 누구도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이 혐오와 무관하다고 자신할 수 없다. 오히려 자기 안에 스며든 혐오를 발견하고 들여다볼 수 있을 때 조금씩 혐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만큼 혐오의 힘은 약해질 것이고 나를 지키는 힘은 강해질 것이다. 우리가 정말 안전을 원한다면 "혐오는 안 된다 안전을 원한다"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

불안이 정책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불안을 해소하고 위험을 예측하고 감당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다. 불안이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듯 안전할 권리를 위한 변화도 '사이'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사이'에 형성된 권력관계를 따져보기 위해 우리는 평등을 질문해야 한다. 지금 국민과 난민 '사이'에는 어떤 힘이 움직이고 있는가. 적어도, 난민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정책은 안전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미류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 평등UP 기고글은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홈페이지 equalityact.kr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헌법의 평등이념과 포괄적인 차별금지를 실현하는 인권기본법인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자 실천하는 연대체입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