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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왕의 광장이었던 보주광장

호텔로 돌아온 우리가 가방을 싣고 간 곳은 파리 제2구의 마리 스튀아르로(Rue Marie Stuart) 20번지에 있는 아파트였다.

정문 앞에서 아파트 관리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안내를 받아 4개의 철문을 잇달아 통과하니 건물 안에 채광을 위한 작은 정원이 나왔고, 그 정원을 통과해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 복도 끝으로 걸어가니 엘리베이터가 나왔다. 하지만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을 보고 아빠와 나는 깜짝 놀랐다. 들어가면 두 사람이 서로 몸을 맞대야 할 정도로 비좁은 미니 엘리베이터였던 것이다.

 
두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크기이다.
▲ 파리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두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크기이다.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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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작은가 살펴보았더니 위층으로 빙글빙글 올라가는 계단 사이의 공간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탓이었다. 이 건물이 지어진 19세기 말에는 엘리베이터가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설치 공간을 따로 마련하지 않아 이렇게 틈새를 이용하게 된 것 같았다.

그래도 가방을 올리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우리가 사용할 아파트는 문을 열고 그 안의 복도를 걸어 또다시 문을 열어야 도달할 수 있었다. 정문에서부터 거쳐 온 문이 도합 7개다.

"옛날엔 도둑이 많았나봐요."



내 말에 아빠도 웃으셨다.

에어비앤비(Airbnb)를 통해 얻은 이 아파트는 부엌, 화장실 2개, 목욕실, 침실, 응접실로 구성된 숙소였다. 집주인은 미국인이었는데, 관광객에게 집을 임대해주는 곳이라 그런지 인터넷 사진에서 본 대로 아주 깨끗했다. 세탁기도 있고, 식기세척기도 있고, 대형 TV도 응접실과 침실 두 군데 있었다. 폭이 좁은 별도의 간이침대도 응접실 한구석에 따로 놓여 있었다.

가방을 옮겨놓은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다시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제4구에 있는 마레(Marais)지구의 보주광장(Place des Vosges)이었는데 열차 안에서 아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주광장은 앙리4세 때 지어진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광장이다. 시테섬에서 16세기까지의 파리를 보았다면 이제부터는 17세기 초의 파리 모습을 보러 가는 거다."
"17세기 초라고요?"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프랑스는 아직 중앙집권 체제가 아니었다. 그 실체를 구경하게 되는 거야."

보주광장의 인근 메트로 역은 '생폴(Saint-Paul)'이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붉은 벽돌과 흰 석재의 4층 집들로 둘러싸인 보주광장은 광장이 집들로 둘러싸였다기보다는 집들 사이에 정원 같은 광장이 배치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엄밀히 말하면 가로 140미터, 세로 140미터의 정사각형 정원이었다. 그 둘레에 르네상스풍으로 지어진 아파트는 대칭성을 추구하는 프랑스 건축양식의 특징대로 광장을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가 남북 두 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저기 말이다. 다른 곳보다 지붕이 한 단계 더 높은 집이 보이지?"
"네."


 
보주광장을 둘러싼 아파트에는 지붕이 한 단계 높은 남쪽의 '왕의 집'과 북쪽의 '왕비의 집' 이 있다.
 보주광장을 둘러싼 아파트에는 지붕이 한 단계 높은 남쪽의 "왕의 집"과 북쪽의 "왕비의 집" 이 있다.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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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곳이 두 군데다. 하나는 이쪽에, 하나는 저쪽에. 남쪽에 지붕이 한 단계 높은 아파트가 '왕의 집(Pavillon du Roi)'이고, 북쪽에 지붕이 한 단계 높은 아파트가 '왕비의 집(Pavillon de la Reine)'이다."
"그럼 이곳에 왕과 왕비가 살았나요?"


그런 목적으로 지었으나 왕이 이곳에 거주한 일은 없고, 루이 13세의 왕비였던 '오스트리아의 안(Anne d'Autriche)'이 잠깐 살았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의 안이라면 루이14세의 생모를 가리킨다. 그래서 광장 명칭도 원래는 '왕의 광장(Place Royale)'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18세기 말 프랑스대혁명 때 혁명군을 처음 지지한 보주현(縣)으로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보주광장'이라 불리게 되었지만 아직도 관광지도엔 '왕의 광장'이라 표기되어 있는 곳이 많다고 한다. 파리 시민들이 보주광장을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생각한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아파트가 모두 몇 채에요?"
"36채라더라."
"누가 살았어요?"
"왕족과 귀족들이지."


그들이 한데 모여 살았다는 건 차별성이 별로 없었다는 뜻이라고 아빠는 말씀하셨다. 물론 지붕이 한 단계 높으니까 왕의 집이나 왕비의 집은 아파트 내부가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론 36채의 설계도가 동일하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적어도 17세기 초까지의 프랑스 왕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그때까지 프랑스 왕은 귀족들 중의 하나, 다시 말하면 대표귀족 같은 존재였다는 걸 보주광장에 와서 확인하고 있는 셈이라며 아빠는 이렇게 덧붙이셨다.

"비슷하잖아? 귀족의 집이나 왕의 집이나."
"왕궁이 따로 있지 않았어요?"
"따로 있었지. 루브르궁이라고. 뒤에 박물관으로 바뀐 그 궁전은 내일 가보기로 하고, 오늘은 이 보주광장에서 관람이 허용된 아파트 내부를 좀 구경해보기로 할까?"
"어딘데요?"
"저 끝."


아빠가 가리키신 곳으로 가기 위해 건물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1층엔 비에 젖지 않게 걸을 수 있는 일종의 외부 회랑이 있었다. 옛날에 한 번 와본 기억이 나시는지 아빠는 광장의 사각형이 꺾이는 지점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셨다.

[아빠의 이야기] 평화로운 시절의 평화로운 세계

하도 오랜만이라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관광 명소라면 그곳을 찾는 관람객이 있기 마련이다. 과연 사람들의 발걸음이 향해지는 곳이 있었다. 그 점에 희망을 두고 다가가니 아파트 호수를 나타낸 파란색 번호판 옆에 '빅토르 위고의 집(Maison de Victor Hugo)'이란 팻말이 나타났다.


 
외부회랑 안쪽 모서리에 빅토르 위고의 집을 알리는 파란색 번호판과 팻말이 보인다.
▲ 빅토르 위고의 집 외부회랑 안쪽 모서리에 빅토르 위고의 집을 알리는 파란색 번호판과 팻말이 보인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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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시테섬에 가서 보았잖아? <파리의 노트르담> 말이다. 그 작품을 발표한 위고는 돈을 많이 벌었던지 원래는 왕족이나 귀족들만 살던 이 보주광장에 아파트를 한 채 빌린 거야. 지금 그 내부를 구경하러 가는 거다."
"언제부터 살았어요?"
"1832년부터. <파리의 노트르담>을 발표한 게 1831년이고. 그 뒤론 작가나 예술가들이 이곳에 많이 살았다."


시기를 달리하지만 이 아파트들엔 소설가 알퐁스 도데, 여류소설가 콜레트, 소설가 조르주 시므농, 작가 쥐스트 올리비에, 작가 알리에,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 화가 조르주 디프레누아, 배우 프랑시스 블랑쉬, 가수 미셸 조나스, 재무장관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교육부 장관 자크 랑 등의 명사들이 살았다.

정문에 보안검색대가 있었다. 파리에선 기념관 같은데 들어가려면 어디서나 보안검색을 받아야 한다. 밖에 있다 들어가자 안이 컴컴해서 왼쪽으로 들어가야 할지 오른쪽으로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기에 우선 오른쪽에 서 있는 관리인에게 물어보려고 몸을 돌렸더니 그쪽에서 먼저 질문을 던져왔다.

"자포네?"
"코레앙."


그러자 관리인 입에서 느닷없이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무료!"

발음도 아주 정확했다. 그 말을 듣고 딸과 나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입장료를 물어보는 한국인이 많았던 모양이다. '셀카봉'은 갖고 들어갈 수 없다고 하여 보관소에 맡긴 뒤 2층으로 올라갔다.
 
아파트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 설치된 빅토르 위고의 저작물과 홍보 배너
 아파트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 설치된 빅토르 위고의 저작물과 홍보 배너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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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을 집필한 곳으로 알려진 역(逆)니은자 형태의 이 아파트는 방이 모두 7개였는데, 우리 감각으론 약 85평쯤 되는 공간이다. 현관으로 들어가면 대기실이 나오고, 그다음은 응접실, 그다음은 당시 유럽 상류층에 유행하던 청나라 접시나 판화 등으로 장식한 중국방(Salon chinois)이 나온다. 여기까지는 광장을 마주하는 방들이어서 창으로는 아름다운 광장을 내다볼 수 있다.

7개의 방 가운데 가장 관심이 가는 방은 집필실이었다. 깃털 펜으로 글을 썼던 모양인데 책상 앞에는 의자가 없고 그 높이도 의자를 놓고 앉는 책상보다 높았다. 서서 글을 썼던 것이 분명하다. 그 책상 위를 손으로 쓰다듬어보던 딸이 물었다.
 
빅토르 위고가 사용했던 책상과 깃털 펜
 빅토르 위고가 사용했던 책상과 깃털 펜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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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위에서 위고가 집필한 건 로망(roman)이었겠죠?"
"그렇지. 불어로 로망이고 영어로 노벨(novel)이라고 하는."
"근데 왜 우리말로는 소설이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엉뚱하지만 문학 자체를 설명해야 하는 물음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숨을 돌리고 난 나는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소설이란 낱말은 <장자(莊子)> '외물편(外物篇)'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 뜻은 인간의 큰 도리와 관계없는 '작은 이야기(小說)' 곧 시정잡배들의 하찮은 이야기란 뜻이다. 하찮은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서구에서 노벨이 활짝 꽃피는 19세기 이후 그 영향을 받은 일본의 영향 하에 한국 소설도 비로소 문학 차원의 대접을 받게 되었지만 최근엔 다시 홀대 받는 경향이 보인다고 하자 딸이 다시 물었다.

"19세기라면 위고가 활동하던 때인데, 왜 그 시대에 서구 소설이 꽃피게 된 거예요?"
"좋은 질문이다."


나라마다 상황과 용어가 다르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복잡하지만 일단 단순하게 구분해볼 때 서구소설은 크게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귀족문학인 로맨스(romance), 다른 하나는 서민문학인 노벨(novel). 그런데 서민문학인 노벨이 대대적인 각광을 받기 시작하는 건 19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다. 그 이유는 상공업 등에 종사하는 시민계층이 대폭 확대되고, 그들에게 야기되는 갖가지 사회문제를 작가들이 노벨 속에서 다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말을 듣고 있던 딸이 물었다.

"위고는 낭만주의 거장이었다고 하던데요?"
"문학사조의 세부적 측면에선 그렇지. 하지만 그 역시 사회문제를 다루었다. <레미제라블>을 생각해봐라. 노벨(novel)이 뭐냐 하면 '새로운 것에 대한 짧은 이야기'란 뜻의 라틴어 노벨라(novella)에서 온 말인데, 그럼 노벨라의 원뜻은 뭐냐? '새로운 뉴스'다.
매체가 발달되지 않은 19세기엔 노벨 곧 소설이 문학성 외에도 새로운 뉴스와 사조를 전하는 금일의 매스컴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거든. 위고는 그 정점이었지. 사회적 영향력이 엄청날 수밖에 없었던 거야."

마지막 일곱 번째 방인 침실에는 사회적 영향력이 엄청났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사망할 당시의 침대가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어제 방문한 팡테옹 지하무덤에 그의 관이 안치되어 있던 기억이 난다. 위고가 1832년부터 1848년까지 16년 동안 살았던 이 아파트가 현재의 기념관이 된 것은 1903년부터다. 내 상념은 시간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7번째 방에는 빅토르 위고가 사망할 당시의 침대가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7번째 방에는 빅토르 위고가 사망할 당시의 침대가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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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는 19세기 사람이다. 그러나 딸과 함께 구경한 것은 17세기 초 앙리 4세 때 지어져 유럽 공동주거시설의 한 모형이 된 파리 아파트의 내부구조다. 17세기도 19세기도 나름대로는 다사다난하고 복잡한 시대였다. 하지만 날마다 문제가 쏟아지는 현대인의 시각에서 돌아보면 평화로운 시절의 평화로운 세계였다는 생각이 든다.

태그:#보주광장, #빅토르위고, #파리여행, #파리역사,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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