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붉은 정원> 포스터.

뮤지컬 <붉은 정원> 포스터. ⓒ 벨라뮤즈


사람들은 '첫사랑' 하면 설렘, 수줍음, 풋풋함, 서툶, 아련함을 떠올린다. 반면 첫사랑에 대한 기억 중 가슴 한 켠에는 불안함이나 먹먹함도 있으리라. 이처럼 처음 겪는 사랑의 홍역은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뒤엉킨 기억이다.

심리학자들은 '첫사랑이 가장 강하게 기억에 남아 두 번째, 세 번째 사랑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일각에서는 '사랑의 열병'인 풋사랑은 아예 피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말처럼 쉬운 일이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이 어디 마음 먹은대로 되는 일이던가. 그리고 여기, 누구보다 사랑의 열병을 깊게 앓은 청년이 우리 앞에 앉아 소년 시절에 찾아든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소년 '이반'은 아름다운 이웃집 여인 '지나'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매력있고 당당한 모습으로 많은 남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지만, 어딘가 공허한 모습이다. 지나는 이반에게 친절하게 대한다. 허나, 그녀의 사랑은 이반의 아버지 '빅토르'를 향한다. 그리고 빅토르와 지나가 떠나기로 한 날 밤, 이반은 마침내 정원에서 두 사람을 목격하고 놀라 자신 다리에 총을 오발한다. 이어, 지나는 홀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지나가 떠나기 전, 이반은 그녀에게 장미로 가득히 꾸민 정원을 선물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무도회장에서 추지 못했던 왈츠를 춘다.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첫사랑>을 각색한 뮤지컬 <붉은정원>은 이반 시점의 원작과 달리 세 주인공의 시점에서 극을 전개한다. <첫사랑>이 소년의 성장통을 주로 다뤘다면, <붉은정원>은 위험한 사랑으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는 세 사람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공연 예술에서는 인물을 포함하는 세계가 무대로 표현되기 때문에 관객들은 주인공이 모르는, 또는 몰라야 할 인과관계까지 다 알고 있다. 따라서 1인칭 시점을 다인칭 시점으로 변주한다는 것은 구성적으로 답답할 수 있는 부분을 탈피하기 위한 좋은 시도였다. 더구나 작곡가 김드리, 음악감독 이진욱이 빚어낸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선율은 이 작품을 흥미롭게 만든다. 비록 이 작품이 소극장 공연이지만 관객들로 하여금 저택의 아름다운 장미정원에 초대된 것 같은 느낌을 방불케 한다. 그럼 <붉은정원>은 매력적인 작품으로 거듭났을까.

해체 플롯으로 다시 쓴 이야기

 뮤지컬 <붉은 정원>의 한 장면.

뮤지컬 <붉은 정원>의 한 장면. ⓒ 벨라뮤즈


뮤지컬 <붉은정원>이 다른 뮤지컬에서 다인칭 시점을 활용하는 방식과 다른 점은 작품의 구성 방식으로 플롯을 해체하는 기법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보통 뮤지컬에서는 서술자를 바꾸어가며 사건이 진전되도록 하는 방법을 택하지만, <붉은정원>의 전개방식은 한 사건을 두고 여러 명의 서술자가 말하도록 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독자들이 지나, 빅토르에게 궁금했던 점을 캐릭터가 직접 설명할 수 있게 하는 점은 원작에 비해 좋아진 부분이다. 많은 남성들에게 사랑받는 지나가 왜 공허한지, 그녀는 빅토르의 어떤 모습에 반했는지, 빅토르는 이 사랑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는지 등. 1인칭 시점의 원작이 설명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붉은정원>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어느 정도 해소한다.

특히, 극 중 지나의 솔로곡 '인형극'은 남성들의 얕은 사랑에 허무함을 느끼는 지나의 심리를 대변한다. 또 그녀의 어머니(몰락한 공작부인)가 딸을 신분회복의 도구로 생각한다는 점을 설명하며 원작에서 지나가 여러 명의 남자들에게 여지를 주는 듯한 행동에 대해 스스로 해명할 기회를 주었다.

또한 19세기에 쓰인 고전이기에 낡은 감수성으로 읽힐 수 있는 부분을, 각색을 통해 지나의 시점에서 풀어낸 점은 적절히 보완하기에도 좋은 시도였다(원작은 독자가 이반에게 감정이입하도록 쓰여 지나는 자칫하면 악녀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걸까. <붉은정원>은 다른 인물들에게 발언의 기회를 허한 만큼, 이반의 감정 변화를 오롯이 전달하기에 부족했다. 지나와 빅토르의 외도 장면을 목격한지 10분 만에 용서하고 장미 정원을 선물하는 흐름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관객들은 이반이 어떤 과정을 통해 두 사람을 용서했는지, 그래서 첫사랑의 경험이 어째서 성숙의 계기로 작용했는지 알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반의 목격 후 사건이 빠르게 종결되면서 극적 긴장감을 적절히 고조시키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지나와 빅토르의 관계에 있어 이반의 존재는 충분히 위협적인 갈등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사건 이후 바로 다음 장면에서 빅토르와 지나는 그간을 반성하며 작별을 고한다. 내적 갈등 없이 곧장 반성하고 마는 이들 모습은 지엽적인 갈등으로 전락하고 말아 작품이 싱겁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외모에 반하는 남자, 글에 반하는 여자

 뮤지컬 <붉은 정원>의 한 장면.

뮤지컬 <붉은 정원>의 한 장면. ⓒ 벨라뮤즈


이반은 지나의 매력적인 외모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리고 빅토르 역시나 사랑에 빠지게 된 계기를 외모로 설명한다.

"새로 이사온 집의 정원을 거닐다가 오래된 문을 하나 발견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또 다른 정원이 펼쳐졌고, 한 여인이 혼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중략) 모두의 사랑을 받았지만, 괴로웠던 아프로디테의 모습이 저런 모습이었을까. 오랜만에 궁금증이 생겼고, 오랜만에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뮤지컬 <붉은 정원> 빅토르 일기 발췌.

그러나, 지나가 빅토르와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조금 다르다. 빅토르 부자가 이사를 오기 전, 지나는 이미 작가 빅토르의 열렬한 팬으로 그를 동경했다. 그녀는 빅토르의 소설 '사냥꾼'이 "꾸밈이 없어 자유롭다"며 그의 세계관에 사로잡힌다.

남성은 여성의 외모를 보고 첫눈에 반하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은 (만약, 여성이 남성에게 첫눈에 반한다고 한들, 그것은 남성의 '선한 행위'나 '능력'에서 발단되는) 구식의 젠더 감성적 서사를 그대로 답습하는 점은 아쉽다. 더구나, 지나는 굳이 외모가 아니어도 매력적일 만큼 당찬 아가씨가 아니던가.

더욱이 비극적인 점은 이반과 빅토르 사랑의 시작이 외모인 점을 차치하더라도, 그 사랑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조차 두 사람은 지나의 내면을 제대로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반은 첫사랑의 열병에 허덕이기 조차 버거웠으며, 빅토르는 자신 감정을 글로 승화시키기에 급했으니 말이다. 두 사람은 지나를 제대로 이해조차 않고 외양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사랑을 이어나갔던 셈이 아닐까.

이 점은 지나가 소설로써 빅토르의 세계관에 사로잡히고, 자유를 갈망하는 그의 모습에 매료되었으며, '아도니스의 정원'으로 내면을 이해코자 한 모습과는 상반된다. 결국, 지나가 아무리 주체적인 여성이었다고 한들 그녀조차 루키즘(lookism)의 그늘에서 자유롭기란 불가능했던 것이다.

'붉은정원'이 '불륜정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뮤지컬 <붉은 정원>의 한 장면.

뮤지컬 <붉은 정원>의 한 장면. ⓒ 벨라뮤즈


혹자는 뮤지컬 <붉은정원>이 외도를 낭만적으로 그렸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헌신적인 아내가 있음에도, 외딴 여인을 사랑하는 감정을 노래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용서하였다는 점이 문제적이라고 말이다. 분명 <붉은정원>은 각색할 때 빅토르 인물에 변화(아내와 사별하였거나, 이반의 형으로 각색)를 주지 않았고, 원작과 비교하여서도 불륜을 구체적으로 재현했다.

그렇다면 이 선택이 낡은 작품을 더욱 낡게 만들도록 작용한 것일까. 답이 쉽지는 않다. 분명 원작과 비교해 지나를 주체적인 인물로 재탄생시킨 점은 유의미하다. 그러나 <붉은정원>이 금기된 사랑을 넘어 더 나은 가치를 말하는 극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적잖은 어려움이 있다. 세 사람이 겪은 고통과 환희는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어야 한다. 가장 아름답게 묘사되는 장면은 지나와 빅토르가 왈츠를 추는 장면이 아니라, 그들 미숙함을 깨닫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 장면이 되었어야 한다.

이반이 외도를 목격하는 장면 전후로 <붉은정원>은 초반부에는 세 사람 심리를 묘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에 비해 후반부에는 귀결만을 향하여 급히 내달리는 모양새다. 때문에 성장 서사로는 미진해 보인다. 불륜을 미화하진 않지만 애매한 포지션에 머물게 되었다. <붉은정원>이 과오를 씻고, 성장 서사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템포의 완급조절이 필요한 이유다.

만일, 창작진의 의도가 개인의 성장담을 다루려고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야기는 썩 다르지 않다. 그렇담 불륜이 개입되는 줄거리의 구성상, 도덕적으로 질타 받는 이 소재에서 끌어내고자 하는 궁극의 가치가 있어야 했다. '불륜 미화'라는 비난을 사더라도 반박할 수 있는 새로운 주제 의식 말이다.

 뮤지컬 <붉은 정원>의 한 장면.

뮤지컬 <붉은 정원>의 한 장면. ⓒ 벨라뮤즈


이를테면 원작에서 불륜에 중립적인 태도는 뮤지컬과 마찬가지다. 허나, 원작은 이반이 성숙하는 과정 속에 소년의 사랑=순수함, 어른의 사랑=세속적, 타락함의 의미를 부여해 (지나를 추종하는 성인 남자들은 이반이 뽑은 키스 종이를 돈으로 사려고 하고, 이반의 어머니에게 투서를 보내 빅토르의 외도 사실을 알린다) 성장의 고통과 허무함, 어른들 세계에서 권력 구조를 다시 생각하게끔 했다. 반면 뮤지컬에서는 이러한 주제의식을 다루기 보다 세 사람의 심리를 사랑으로 그리는 데 집중하면서 평면적으로 바뀌었다.

꽃봉오리는 오랜 시간 피어날 준비를 마치고 망울을 터뜨렸을 때 더욱 아름답다. 뮤지컬도 다르지 않다. 안정된 속도로 침착하게 달려 나가야만 아름다운 결말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붉은정원>이 다시 씨를 뿌려야 할 테다. 흙 속에서 부지런히 피어오를 준비를 하다보면 어느새 아름답게 피어난 꽃을 만날 수 있지 않으려나. 다음 '붉은정원'에 방문할 때는 지금보다 만발한 정원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첫사랑>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최진희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165p 작품해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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