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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21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21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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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시켜서 물리적 충돌을 해 준비 시간을 끌며 지지층을 결집시키기를 시도하고 사정기관에 흔들리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최종적으로 계엄령까지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도 돌고 있을 정도로 참으로 무지막지한 대통령이다."

국정농단 사태에 분노한 시민들의 '박근혜 퇴진' 요구가 들불처럼 퍼져가고 있던 2016년 11월 18일,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세상이 놀랄 만한 민감한 이야기를 꺼냈다. 정리면 '절정으로 치닫던 촛불집회를 무력화하기 위해 군이 동원될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헌법 제77조에 명시돼 있는 계엄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제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 대통령이 선포할 수 있는 국가긴급권의 하나다.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뉘는데, 계엄이 선포되면 대통령은 지체없이 국회에 이 사실을 통고해야 한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영장제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 또한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국회가 계엄의 해제를 요구할 때에는 이를 해제해야 한다.

추미애 '계엄' 발언 나오자... 박근혜 청와대 "정치적 선동"

정연국 전 청와대 대변인. 사진은 2016년 11월 20일 검찰이 박 대통령을 입건하기로 발표한 것에 대한 브리핑 진행 모습.
 정연국 전 청와대 대변인. 사진은 2016년 11월 20일 검찰이 박 대통령을 입건하기로 발표한 것에 대한 브리핑 진행 모습.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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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대표의 '계엄령 준비' 발언이 알려지자 청와대와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은 진화에 나섰다. 정연국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제1야당의 책임있는 지도자가 하기에는 너무나 무책임한 정치적 선동"이라며 강하게 유감을 표명했고,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공당의 대표가 전혀 근거도 없는 유언비어를 공식적으로 이렇게 퍼트릴 수 있느냐"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추 대표의 발언을 '선동'이자 '유언비어'로 단정지었다. 당시는 국정농단에 분노한 시민 수백만 명이 주말마다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던 시기였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정권이 무너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군사정변을 떠올리게 하는 군 동원 의혹까지 불거졌으니 진화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 정치권을 중심으로 날선 공방이 이어졌다. 그러나 계엄령을 둘러싼 소문의 진위는 밝혀지지 않은 채 사그라들었다. 맹렬히 타오르던 촛불집회의 열기가 모든 이슈를 집어삼킨 탓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기저에 '설마' 하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21세기에 군이 시대를 거꾸로 돌리는 시대착오적 발상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는 국군 기무사령부의 '계엄령 검토 문건' 파문은, '설마'라는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소 뜬금없게 여겨졌던 추 대표의 주장이 점점 사실로 드러나는 모양새다. 지난 20일 청와대가 공개한 67쪽 분량의 '계엄 대비계획 세부자료'는 당시 기무사가 아주 치밀하게 계엄 준비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입증해 준다.

시민 진압, 야당 정치인 구금, 언론 통제... 전례가 있다

12.12 쿠데타에 이어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까지 무력 진압하면서 차례로 정권을 잡았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정부 시절 무기징역과 징역 17년형을 선고받았다. 사진은 1979년 12월 14일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한 12.12 핵심 관계자들의 모습. 이 가운데에는 상황이 완전히 끝난 13일 아침에 뒤늦게 합류한 장성들도 있으며 거사과정서 소외되었던 보안사 간부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 12.12 쿠데타의 핵심 관계자들 12.12 쿠데타에 이어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까지 무력 진압하면서 차례로 정권을 잡았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정부 시절 무기징역과 징역 17년형을 선고받았다. 사진은 1979년 12월 14일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한 12.12 핵심 관계자들의 모습. 이 가운데에는 상황이 완전히 끝난 13일 아침에 뒤늦게 합류한 장성들도 있으며 거사과정서 소외되었던 보안사 간부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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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된 문건에 따르면, 기무사는 12.12 군사정변과 광주민주화운동 계엄령 선포 당시와 흡사한 비상계엄 담화문을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반적인 계엄 시행 규칙과는 달리 계엄사령관은 합참의장이 아닌 육군참모총장이 맡도록 했으며, 계엄과 동시에 방송사와 언론사, 인터넷 여론(SNS 포함)을 장악하는 세부 방안까지 세운 것으로 밝혀졌다.

기무사는 촛불집회가 열리는 광화문과 여의도 등 주요 집회장소에 기갑여단과 특전사 등으로 이뤄진 계엄군을 탱크와 장갑차 등을 이용해 신속하게 투입하는 계획도 세웠다. 심지어 계엄령 해제를 무력화하는 계획도 있었다. 문건에는 국회가 계엄 해제를 요구할 것에 대비해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 의원들을 표결에 불참하도록 계획했다. 또한 집회·시위금지 및 반정부 정치활동 금지 포고령을 선포하고 위반시 구속수사 등 엄정처리 방침 경고문을 발표한 뒤 불법시위 참석 및 반정부 정치활동 의원들을 집중 검거해 의결정족수 미달을 유도 하는 내용까지 포함돼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기무사 문건이 전두환 신군부의 12·12 군사정변 당시 시나리오와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전사 등 군 병력에 의한 시민 강제 진압, 국회 무력화를 위한 야당 정치인 구금, 언론 통제와 장악 등의 세부 계획은 비상계엄을 통해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 과정과 닮아있다. 이는 공개된 문건이 촛불시위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질 것을 가정해 만든 '소요사태 대비 문건'일 뿐이라는 일각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

"충격·공포감"이라던 새누리... 한국당의 지금과는 확연히 다르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가 18일 오전 인천공항제2터미널 귀빈실에서 5당 원내대표 방미를 앞두고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가 18일 오전 인천공항제2터미널 귀빈실에서 5당 원내대표 방미를 앞두고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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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한 것은 보수야당, 그중에서도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반응이다. 시민사회와 각계 인사들이 기무사 문건에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행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짓밟으려는 군의 구체적인 실행계획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는데도 한국당은 기무사 문건의 의미를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기무사 문건에 의하면, 한국당은 비록 자의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를 무력화하기 위한 군 계획의 일부로 등장한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기무사 문건의 작성 경위와 배경, 관련자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요구해야 마땅할 터다. 

그러나 한국당은 그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작전에 투입되는 대상과 이동계획, 언론사 통제와 장악, 계엄 이후의 국회 무력화 방법에 이르기까지 세부적인 실행계획이 드러났는데도 "기무사 문건 어디에도 쿠데타 흔적은 없다"(김성태 원내대표), "좌파 정부가 대북 무장 해제에 앞서 군마저 무력화시키려는 것"(김태흠 의원),  "군은 국가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역할을 해야 한다"(정갑윤 의원) 등의 반응을 내놨다. 12·12 군사정변을 떠올리게 만드는 기무사 문건의 내용을 감안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인식과 태도다.

한국당의 태도는 예전과 확연히 다르다.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 내란음모 사건(2013년) 당시의 행태와 비교하면 잘 알 수 있다. 이 전 의원의 내란음모 의혹이 불거지자 새누리당은 즉각 유일호 대변인 명의의 논평을 통해 "충격과 공포감마저 느낀다"라며 총공세에 나섰다.

최경환 당시 원내대표는 "이 문제는 여당과 야당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알려진 게 사실이라면 이 의원을 포함해 수사선상에 오른 인물들이 국가의 안보를 위태롭게 한 것"이라며 철저한 진상규명과 엄중한 수사를 촉구했다. 심지어 김진태 의원은 한 방송에 출연해 "제 주위에서는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도 많다"라며 "만약 그게 성공했다면 내란음모에서 끝나지 않고 대한민국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 탄핵이 기각됐을 경우를 대비해 작성한 계엄령 세부계획 문건이 추가로 공개됐다. 사진은 김의겸 대변인이 20일 오후  브리핑에서 공개한 '계엄 대비계획 세부자료'(전체76쪽) 중 주요 일부 문건.
 박근혜 당시 대통령 탄핵이 기각됐을 경우를 대비해 작성한 계엄령 세부계획 문건이 추가로 공개됐다. 사진은 김의겸 대변인이 20일 오후 브리핑에서 공개한 '계엄 대비계획 세부자료'(전체76쪽) 중 주요 일부 문건.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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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탄총(에어소프트건)과 압력밥솥 폭탄을 운운했던 이 전 의원을 향해 내란을 주동했다며 맹공을 펼치던 그들이 정작 기무사의 계엄령 문건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반응을 내비치고 있다. 장난감 총을 개조해 북한과의 전쟁 발발시 대한민국의 주요거점에 타격을 입히자는 이 전 의원의 몽상과 구체적인 세부계획이 망라된 기무사의 계엄령 검토 문건 중 어느 쪽이 더 섬뜩한지는 물어보다 마나다.

기무사 문건에 시민들의 분노와 충격이 가시지 않고 있다. 철저한 진상규명 요구가 각계에서 터져나온다. 군사정변의 비극을 두 번씩이나 뼈저리게 경험했던 탓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당은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유린하려는 계획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기무사 문건이 소요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검토 문건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견지하고 있다.

총칼, 장갑차와 탱크, 언론 장악과 통제, 국회 무력화 등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한 악몽이 재연될 뻔했는데도 말이다. 기무사 문건이  누군가의 말처럼 "그게 성공했다면 내란음모에서 끝나지" 않을 심각한 국기문란 모의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장난감 총에 그 난리법석을 떨던 이전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더더욱.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 '바람 부는 언덕에서 세상을 만나다'에도 실렸습니다.



태그:#기무사 문건 파문, #기무사 해체, #12.12 군사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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