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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정동에서 만난 보 페르손 스웨덴으로 입양된 그는 자신의 자녀들을 데리고 한국을 자주 찾는다. 자녀들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고, 가족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싶은 게 그의 바람이다.
▲ 합정동에서 만난 보 페르손 스웨덴으로 입양된 그는 자신의 자녀들을 데리고 한국을 자주 찾는다. 자녀들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고, 가족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싶은 게 그의 바람이다.
ⓒ 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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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서울시 합정동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스웨덴 입양인 보 페르손을 만났다. 우리 나이로 마흔 아홉, 3명의 자녀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 그에게 언제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는지 물었다.

"1995년, 스물다섯 살 때였다. 93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공허감에 사로잡혔다. 이미 5년 전인 88년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형도 독립해서 그 무렵에 집을 떠났다.  한동안 어머니와 단 둘이 살다가 사별을 맞았기 때문에 혼자 남겨진 느낌이 강했다. 죽음에 관한 책을 읽고, 1년간 홀로 유럽 배낭여행을 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헤어나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로 한국대사관에서 낸 '입양인 부모찾기 프로그램' 광고를 보았다. 프로그램에 등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SBS에서 연락이 왔다. 그래서 한국에 들어와 낳은 아버지를 만났다."

보 페르손은 7세에 스웨덴으로 입양되었다. 그는 드물게도 입양 전후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일을 섬세하고 감각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마치 유년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한 편의 성장소설 같았다.

생모는 19살에 자신의 오빠 친구와 사이에서 페르손을 낳았다. 1970년생 페르손은 외조모의 집에서 자랐다. 젊은 연인은 부모의 집에서 아이를 기르며 동거했다. 페르손 다섯 살 때까지였다. 그는 이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짜장면, 만두, 고구마, 김치 등등 그때 먹었던 음식들의 맛부터 살던 집의 모습까지.

한번은 자기보다 몇 달 늦게 태어난 동갑내기 외삼촌을 세발자전거 뒤에 태우고 언덕을 내려가다가 넘어졌다. 그때 외할머니에게 엉덩이를 맞은 이야기를 하며 그는 천진하게 웃었다. 50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얼핏 5살 아이의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젊은 부부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뒤 페르손은 생부와 함께 6개월 정도 여행을 다녔다. 생부는 일자리를 찾아 강원도 횡성이나 원주 같은 곳으로 기차여행을 했다. 엄마가 아닌 새 여자 친구와 함께였다.

어린 페르손은 여행이 좋았다. 새로운 장소, 농장, 사람들, 친절한 아빠의 새 여자친구…. 그러나 한편으로는 생모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결국 생부는 그를 고아원에 맡겼다. 처음 맡겨진 고아원에서는 모두가 페르손에게 다정하게 대해줬다. 그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다들 더 많이 안아주고 싶어 했고,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생부는 그를 찾아 데려갔다가 다시 다른 고아원에 맡기곤 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자랐고, 아기티를 벗은 페르손을 보듬는 손길도 줄어들었다.

- 고아원에서의 느낌은 어땠는가?
"나는 늘 기다렸던 것 같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렸다. 고아원 생활은 좋지 않았다. 나는 외로웠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나중에는 그냥 막연히 무언가를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스웨덴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7살 때였다. 어린 그에게 그때의 경험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모든 게 처음해 보는 일이었다.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탔는데, 첫 번째 비행기는 대한항공이어서 한국인 승무원이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도와주었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는 말도 통하지 않았고, 낯설고 두려웠다. 오랜 비행 끝에 그는 스웨덴에 내렸다. 눈이 가득 쌓여있었다.  너무 신기해서 밖으로 나가자마자 곧바로 눈 속으로 뛰어들었다.

깜짝 놀랄 만큼 차가웠던 느낌, 그 선명한 촉각이 그의 스웨덴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가정으로 갔고, 그곳에는 그보다 먼저 한국에서 입양된 두 살 위의 형이 있었다. 처음에는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부모는 사전을 찾아가면서 페르손과 소통했다. 영민했던 페르손은 3개월 만에 스웨덴 말을 배워버렸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흥미롭고 재미있었지만, 점점 한국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한국 엄마에게 가고 싶다고 떼를 쓰기도 했고, 그 일로 종종 어머니와 말다툼을 했다. 페르손의 입양 과정에 문제는 없었던 걸까? 그래서 물었다.

- 당신이 해외 입양 가게 된 사실을 생부모가 알았는가?
"그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러나 해외로 입양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생모가 나를 집으로 데려 갔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부모를 찾고 나서 들은 얘기다."

그는 한국에 남을 수 없었다. 생모의 가족은 그녀를 말렸다. 아직 앞날이 창창한데, 어찌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아이를 기를 수 있겠느냐는 현실적인 걱정이었다. 결국 그렇게 그는 스웨덴으로 입양되었다.

고독감 속에서 다시 찾은 한국의 생부모

스웨덴 입양인 보 페르손 일곱 살 때 스웨덴으로 떠났고, 스물 다섯 살에 한국에 다시 방문해서 낳아준 부모를 찾았다. 그는 입양 전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 스웨덴 입양인 보 페르손 일곱 살 때 스웨덴으로 떠났고, 스물 다섯 살에 한국에 다시 방문해서 낳아준 부모를 찾았다. 그는 입양 전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 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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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입양된 곳은 스웨덴 샌드비켄시 부근의 마을이었다. 이 마을 중심에는 대략 1500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고, 외곽에는 40명 정도가 흩어져서 드문드문 살고 있다. 페르손은 그 외곽 지역에 있는 가정으로 입양되었다.

아버지는 키가 194센티미터나 되는 장신의 사냥꾼이었다. 엘크(말코손바닥사슴) 사냥을 했고, 집에 아버지가 사로잡은 스크베이더(뇌조) 두 마리가 있었다.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는데 빨간 머리에 키가 작았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아버지에 비해 어머니는 목소리가 크고 수다스러웠다. 어머니도 다정다감한 편은 아니었지만, 페르손은 그녀와 친했다. 형은 사냥을 좋아해서 아버지를 따라다녔고, 페르손은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다. 어머니는 제빵이나 요리를 좋아했고 잘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요리를 배웠고, 흥미를 느꼈다. 또 형과도 친하게 지냈고, 재미있게 놀며 컸다.

워낙 작은 마을에 살았고, 그곳에서 입양인은 페르손네 형제들뿐이었다. 그래서 인종차별의 경험은 거의 없다. 가끔 몇몇이 차별적인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강한 성격의 어머니가 보호하고 막아주었다. 작은 마을이다 보니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은 친구들과 다녀서 서로 매우 친했다. 어쩌다 전학생들이 오면, 처음 만난 페르손의 외모를 놀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 그는 혼자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이 보통의 스웨덴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무리에서 한 발짝 뒤로 떨어져서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때 성격도 좀 내성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겪고 난 뒤에는 다시 여러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에게 한국에서 생부를 만났을 때의 느낌을 물었다.

"낯설었어요. 내 머리 속의 그분은 젊고 크고 건장했는데, 다시 만났을 때는 생각보다 작았고 늙고 초라해져서 믿어지지 않았죠."

생부는 페르손이 생모를 만나는 것을 반대해서 도와주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어찌해서 겨우 연락이 됐고 공항에서 낳은 어머니를 만났다. 스웨덴으로 떠나는 비행기 출발 세 시간 전이었다. 그녀는 울기만 했다. 잠시 안아드린 게 다였다. 말도 통하지 않아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멍한 상태로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안에서 비로소 눈물이 나왔다.
생부와는 관계는 이어지지 못했다. 생부는 새로 가정을 이루고 있었고, 그들 가족은 페르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페르손은 낳은 어머니와 길러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물었다. 두 사람에 대한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

"생모와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서 돌아가신 어머니보다 친밀감이 덜하죠. 돌아가신 어머니는 워낙 다정다감한 편은 아니었지만, 함께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당연히 길러준 어머니가 저에게는 더 안전한 느낌, '엄마'라는 느낌을 주죠. 그렇지만 낳은 어머니와도 더 가까워지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 달리 생모와의 소통에는 언어 이외의 장벽이 있다. 페르손을 소개한 한국인 지인은 그의 생모가 페르손을 입양 보낸 뒤 결혼했음을 알려주었다. 이미 70이 가까운 나이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페르손의 존재를 가족에게 드러낼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을 포기한 생부모에 대한 원망은 없었을까? 고아원에 맡겨져 외로웠던 시간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고, 처음 스웨덴으로 가서 한국을 그리워했던 시절이 있었으니 없었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짧게 대답했다.

"지금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입양은 저에게 좋았다고 볼 수 있죠. 저는 지금 건강하고 잘 살고 있으니까요. 다만, 입양 가는 과정에서 홀로 비행기를 타거나 했던 절차가 좀 별로였던 것 같아요."

"자녀들에게 '가족의 역사'를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페르손이 생부모에게서 양육되거나 한국에 남았다면 어땠을까? 그가 해외 입양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고아원으로 달려가 그를 집으로 데려갔던 젊은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직 앞날이 창창한데…'라는 가족의 만류는 비정한 것이었을까? 그러나 어쩐지 그 말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매우 상식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경제적 지원만 있으면 모든 생모가 자녀를 기를 것이라는 가정은 이 상식적인 한 마디에 힘없이 무너질 수 있다.

미혼모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는 사회에는 그와 비슷한 정도로 입양 가족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존재한다. 스웨덴에는 미혼모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 거의 없고, 제도적 경제적으로 단단히 뒷받침해주기 때문에 직접 양육을 하는 경우가 많다. 입양을 쉬쉬하지도 않아서 한국처럼 비밀입양도 없다. 한국은 전체 입양의 70%가 비밀입양이다.

미혼모들이 자유롭게 입양 또는 양육을 선택할 수 있고, 입양아동들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가 되면, 한국의 시설 아동들이 부모를 찾아 해외로 멀리 떠나는 일도, 돌아와 떳떳이 부모를 만나지 못하는 일도, 아니 시설에 아동들이 더 남아 있을 일도 없지 않을까?

페르손은 두 번 결혼과 이혼을 했다. 그리고 세 명의 자녀들을 자신이 맡아서 양육하고 있다. 7살인 막내는 아직 아니지만, 10대가 된 위의 두 자녀는 한창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스웨덴에서는 드문 혼혈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자녀들이 한국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이번 방문도 자녀들과 함께 했다. 3년마다 열리는 IKAA(세계 한인 입양인협회) 행사에도 꼬박꼬박 참여한다며 그는 말했다.

"아이들이 한국 문화와 음식을 좋아해요. 저는 가족의 히스토리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한국 방문을 통해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이들도 한국에 더 자주 오기를 원합니다."

스웨덴인이면서도 한국인인 보 페르손, 그가 그의 자녀들과 써내려가는 역사가 아름다운 것이 되려면, 우리 사회도 견고한 혈연 중심 가족주의의 틀을 깨고 더 행복해져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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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여 년의 교직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 절망과 섬세한 고민, 대안을 담은<경쟁의 늪에서 학교를 인양하라(지식과감성)>를 썼으며, 공교육, 청소년 독서, 대안 학교, 미혼모 문제, 입양 등의 관심사에 대한 기사를 주로 쓰고자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