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공식 포스터

제22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공식 포스터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국제여, 나의 청춘은 갔는데 너는 어째서 그대로인가

제22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지난 20일 성황리에 폐막되었다. 호러와 공포와 같은 비주류 장르의 영화를 메인으로 매년 여름에 개최되는 이 행사는 이제 씨네필들 사이에서는 꼭 한 번 방문해야 할 버킷리스트로 자리 잡았다.

해외에서 빠듯한 일정을 쪼개 참석한 게스트들에게도 데뷔작을 출품한 신인감독에게도 처음으로 레드카펫을 밟아봤을 배우에게도 결코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영화와 아무 관련이 없는 나에게도 이 영화제는 각별하다.

 화려하게 여름 밤을 수놓은 불꽃들.

화려하게 여름 밤을 수놓은 불꽃들.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나도 모르는 사이 영화에 푹 빠져 방학 때면 친구들을 모아 밤새 다섯 편이 넘는 영화를 내리보고 널브러져 있던 날들. 지금은 폐간되었지만 '무비위크'와 '필름2.0'을 사기 위해 야간자율학습 시간을 빼먹고 동네 편의점을 돌아다녔던 일. 특히나 입시에 매진해야 할 고3때 처음으로 부천영화제의 존재를 알게 되어 무려 11편의 영화를 보며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에는 방학을 이용해 조금 더 나아진 주머니 사정 덕분에 떳떳하게 좀 더 대놓고 열심히 영화를 보러 다녔다. 멤버십을 신청해 셔틀버스를 타고 상영관을 찾아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끼니를 굶고도 하루 3편의 영화를 내리 보던 날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 고생을 자처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난생 처음 접한 작품들에 홀딱 빠져 힘든 줄로 몰랐더랬다. 심각하고 난해하고 가끔은 지루한 영화들에 지칠 때면 야외상영에서 틀어주는 상업영화를 보며 기분전환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라는 황홀경에 빠졌던 나는 어느덧 가끔 대작들이나 챙겨보는 게으른 관객이 되었다. 스마트폰 하나면 심심치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대가 된 덕분에 그 재미를 잊고 살았다. 세상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을 만나고 필름메이커스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모르는 사람들과 옹기종기 모여앉아 야외에서 영화를 보는 기쁨을 말이다.

하지만 내가 초심을 잃고 나이를 먹는 사이에 영화제는 어느덧 청년의 나이인 스물두 살이 되었다. 나의 청춘은 갔는데 그는 여전히 반짝거리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셈이다.

 밤을 꼴딱 새고 영화를 보는 특별한 고행을 영화제에서 경험할 수 있다. 중간에 먹는 간식은 그야말로 꿀맛!

밤을 꼴딱 새고 영화를 보는 특별한 고행을 영화제에서 경험할 수 있다. 중간에 먹는 간식은 그야말로 꿀맛!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때로는 아무생각 없이 영화를 골라보자

솔직히 말해 나는 호러장르의 팬은 아니다. 공포영화도 여름에나 잠깐 보는 편이고 피가 낭자한 영화도 잘 못 본다.

하지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온 이상 그런 기호는 접어두기로 했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영화들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기로 했다. 그렇게 상영관과 시간만 맞으면 무작정 현장에서 표를 발권했다. 이렇게 보게 된 영화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중국에서 온 작품들이었다.

 희망도 미래도 없는 이 곳에서 살아남는 법을 악독하게 깨달은 두 청년들. 부디 앞으로는 바른 길로 가기를.

희망도 미래도 없는 이 곳에서 살아남는 법을 악독하게 깨달은 두 청년들. 부디 앞으로는 바른 길로 가기를.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첫 작품은 <법사>(2017년작, 러닝타임 87분)이었다. 대학진학을 앞두고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마초를 팔러 다니는 두 청년 레파와 파피의 이야기. 흔히 '마약'을 소재로 하면 문신을 하고 건들거리며 총을 하나 옆에 차야 할 것 같은데, 주인공들은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레파와 파피는 게토 지역에 살아 변변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제대로 된 교육의 기회도 없다. 백인들이 주류인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불법을 선택했다. 그러니 일이 쉽게 풀릴 리가 없다. 배신과 배신이 꼬리를 물고 그 둘은 끝을 향해 달려간다.

어떻게 보면 진지하게 심각하게 풀어낼 법한 이야기인데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하다. 그래서 더 그들의 아픔과 고민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상영 종료 후 가졌던 감독과 프로듀서와의 GV를 통해 그게 의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중국영화는 왠지 재미가 없을 것 같다는 편견을 깨준 작품. 감동과 스릴를 한꺼번에 잡았다.

중국영화는 왠지 재미가 없을 것 같다는 편견을 깨준 작품. 감동과 스릴를 한꺼번에 잡았다.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다음 영화는 사실 실수로 보게 됐다. '박유환'이라는 감독 이름만 보고 한국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들어가 보니 중국영화였다. 주인공 묘묘가 성폭행이라는 끔찍한 사건을 겪고 난 뒤 벌어지는 기묘한 일들을 다룬 <비밀의 가족>(2017년작, 러닝타임 93분)이라는 작품으로, 자꾸만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몸부림치는 인물들을 다뤘다.

어쩌면 공포영화 어쩌면 판타지영화였을 이 작품을 보다가 말미에는 눈물이 나 혼났다. 필사적인 묘묘의 몸짓에서 누나를 위해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가족의 아픔이 느껴져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영화제가 아니고서는 관람하기 힘든 작품들을 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어쩌면 굳이 그걸 봐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한낮의 온도가 36도까지 치솟는 이 날씨에 상영관을 찾아 돌아다니는 수고를 꼭 해야 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영화제를 좀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건 어쩌면 작품이 아니라 관객일지도 모른다.

알려지지 않은 영화를 보겠다고 땀을 뻘뻘 흘리며 극장에 들어선 사람들의 눈빛, 후덥지근한 바람이 부는 잔디밭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모습, 이 축제의 일원이 되기 위해 기꺼이 여름방학이라는 황금 같은 시간을 쪼개 일을 하는 자원활동가들이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걸 보면 말이다.

어쩌면 결국 사람이 부천을, 영화제를, 작품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마법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IPTV도 스마트폰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일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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