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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지는 연못의 정원이다. 영귀제에서 본 경정과 주일재, 사우단
▲ 서석지 서석지는 연못의 정원이다. 영귀제에서 본 경정과 주일재, 사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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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지는 누가 봐도 연못을 중심으로 조성한 정원이다. 정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연못에는 하얀 서석들이 수없이 널려 있고, 연못가 네 언덕에는 정원 시설들이 있다. 정원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발을 디디는 곳이 영귀제이고, 맞은편이 사우단이다. 정자가 있는 곳이 옥성대이고, 그 맞은편이 회원대와 의공대이다. 그 옆 모서리에 압각수단이 있다. 흔히 이것을 2단, 3대, 1제로 표현한다.

영귀제는 <논어>에 나오는 말로 공자의 제자 증점이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이상적인 삶을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겠다고 표현한 데서 비롯됐다. 사우단은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 등 네 벗이 있는 곳으로 정영방이 기거하던 주일재가 있다. 옥성대에는 연못을 내려다보는 중심 공간인 경정이 있다. 회원대는 멀리 외원의 자연을 품은 곳, 의공대는 대지팡이에 의지하여 청산을 마주하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압각수단의 압각수는 은행나무로, 경정 맞은편 모서리에 있는 은행나무단, 즉 행단을 말한다.
은행나무가 있는 행단은 압각수단으로 불렸으며 경정 맞은편 동남쪽 모서리에 있다.
▲ 행단 은행나무가 있는 행단은 압각수단으로 불렸으며 경정 맞은편 동남쪽 모서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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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대는 먼 곳을 품은 곳이라는 뜻이다. 은행나무 옆 동쪽 축대로 외원의 자연경관을 관망하던 곳이다. 동쪽인 회원대 일대에는 경정에서의 시선을 고려하여 국화, 접시꽃, 해당화 등 키가 작은 양성 초화목을 무리지어 심었다.
▲ 회원대에서 본 주일재와 사우단 회원대는 먼 곳을 품은 곳이라는 뜻이다. 은행나무 옆 동쪽 축대로 외원의 자연경관을 관망하던 곳이다. 동쪽인 회원대 일대에는 경정에서의 시선을 고려하여 국화, 접시꽃, 해당화 등 키가 작은 양성 초화목을 무리지어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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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들이 빚어낸 풍경

서석지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연못의 상서로운 돌들이다. 언뜻 보아도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흰 바위가 연못에 떠있다. 현재 연못 안에는 90여 개의 서석이 있고, 그중 물 위에 보이는 것이 60여 개, 물속에 가라앉은 것이 30여 개라 한다. 그야말로 서석들의 군락이다.

그럼, 옛날에는 어땠을까. 지금과 돌의 수가 같았을까. 《석문문집》과 《임장세고》 등 옛 자료를 보면 당시에는 서석의 수가 60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쪽 언덕에 51개, 연못 중앙에 1개, 경정 정자 앞쪽에 7개, 입수구 쪽에 1개 등이다. 서석은 동쪽 연못가에 거의 90%가 몰려 있다. 흥미로운 건 처음 정원을 조성하고 400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돌에 균열이 생겨 예전보다 그 수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상서로운 돌의 연못인 서석지는 원래 있던 기이한 형상의 암반을 그대로 연못의 정원석으로 활용하는 절묘한 수법을 썼다.
▲ 서석지의 서석들 상서로운 돌의 연못인 서석지는 원래 있던 기이한 형상의 암반을 그대로 연못의 정원석으로 활용하는 절묘한 수법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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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지라는 정원을 제대로 보려면 아무래도 먼저 서석을 알아야 한다. 서석지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경정잡영敬亭雜詠>에는 당시에 관찰된 서석 60개 중 19개를 시로 읊고 있다. 경정이 있는 옥성대(玉成臺)에서 가까운 서석부터 그 이름과 의미를 살펴보자. 옥성대 앞 연못에 열 지은 돌들은 옥으로 만든 자 바위 옥계척(玉界尺)이고, 그 북쪽의 세 돌들이 홑옷을 숭상하는 돌 상경석(尙絅石)이다. 그 동쪽 아래로 떨어진 별의 돌 낙성석(落星石)이 있고, 사우단(四友壇) 앞에 하늘과 어우러지는 촛불 바위 조천촉(調天燭)이 있다.

영귀제 앞 동쪽에 무리를 지어 있는 돌들은 각기 낚싯줄 드리우는 돌 수륜석(水綸石), 물고기 모양의 돌 어상석(魚狀石), 물결을 바라보는 돌 관란석(觀瀾石), 꽃과 향초의 바위 화예석(花蘂石), 상서로운 구름의 돌 상운석(祥雲石), 구름을 머금은 돌 봉운석(封雲石), 도끼자루 썩는 바위 난가암(爛可岩), 선계로 통하는 다리 통진교(通眞橋), 물을 가르는 돌 분수석(分水石), 누운 용 바위 와룡암(臥龍岩), 갓끈 씻는 바위 탁영반(濯纓盤), 바둑 두는 평평한 돌 기평석(棊坪石), 신선이 노니는 돌 선유석(僊遊石), 눈 흩날리는 징검다리 쇄설강(灑雪矼), 나비와 희롱하는 바위 희접암(戲蝶岩) 등이다.
옥성대 위에 지은 경정은 서석지의 가장 중심 공간으로 연못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곳에 있다.
▲ 경정 옥성대 위에 지은 경정은 서석지의 가장 중심 공간으로 연못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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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석들이 빚어낸 풍경은 대개 신선의 세계를 상징한다. 물론 상경석이나 관란석처럼 안빈낙도와 자신을 수양한다는 의미의 서석도 있다. 게다가 좀더 의미를 알아야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서석들도 있다. 분수석은 공자의 인(仁) 사상, 어상석은 장자와 혜자의 고사, 관란석은 맹자의 진심장 편, 희접암은 장자의 호접몽에서 유래했다. 조금은 어렵고 낯설지만 그 고유의 의미와 상징을 알고 나면 처음 봤을 때의 단순한 정원 풍경이 달리 보이게 된다.
사우단(四友檀)에는 소나무, 매화나무, 대나무, 국화를 심었다. 정영방이 서석지를 조성할 당시에는 매화나무를 구할 수 없어 석죽과 박태기나무를 대신 심었다고 한다. 주일재 마루에는 노을이 깃든 집이라는 ‘서하헌’ 편액이 걸려 있다.
▲ 사우단과 주일재 사우단(四友檀)에는 소나무, 매화나무, 대나무, 국화를 심었다. 정영방이 서석지를 조성할 당시에는 매화나무를 구할 수 없어 석죽과 박태기나무를 대신 심었다고 한다. 주일재 마루에는 노을이 깃든 집이라는 ‘서하헌’ 편액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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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귀는《논어》<선진> 편에 나오는 말로 증점에 얽힌 이야기이다. 공자가 어느 날 제자들에게 포부를 물었을 때 자신의 야심을 토로한 대부분의 제자들과 달리 증점은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겠다고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이상적인 삶을 이야기한 데서 비롯했다.
▲ 사우단에서 본 맞은편 영귀제와 오른편 경정 영귀는《논어》<선진> 편에 나오는 말로 증점에 얽힌 이야기이다. 공자가 어느 날 제자들에게 포부를 물었을 때 자신의 야심을 토로한 대부분의 제자들과 달리 증점은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겠다고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이상적인 삶을 이야기한 데서 비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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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목할 건 이곳의 돌들이 외부에서 옮겨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 연못 바닥에 있던 석영사암층을 활용하여 연못을 조성했다는 것. 그리고 연못의 돌 하나하나에 각종 의미와 상징을 부여해서 단순히 눈으로 보는 풍경과는 또 다른 차원이 드러나도록 했다는 것이다. 서석지를 조영한 정영방이 꿈꿨던 세계를 하나의 선경으로 하나의 소우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서석지는 언뜻 보기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연못정원으로 보이지만 실은 자연을 그대로 활용하여 인문 경관으로 살린 우리 정원의 기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서석지를 조영한 정영방은 연못의 돌들에 대해 "돌은 안으로 문기(文氣)가 있고 밖으로 희다"고 했고, 연못의 "물은 담박하게 일렁이지 않으니 바야흐로 적막감을 지녔구나"라고 읊었다.
정영방이 이곳에 입향하기 전에는 생부동이라 불렸으나 그가 임천(臨川)이라는 촌호를 부여하면서부터 臨川 또는 林泉으로 불리다가 서석지에 연꽃이 있고 난 후부터 연당이라 불리었다.
▲ 서석지의 연꽃 정영방이 이곳에 입향하기 전에는 생부동이라 불렸으나 그가 임천(臨川)이라는 촌호를 부여하면서부터 臨川 또는 林泉으로 불리다가 서석지에 연꽃이 있고 난 후부터 연당이라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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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원가 정영방

서석지를 조성한 석문 정영방(鄭榮邦, 1577~1650)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서석지가 있는 연당리의 입향조이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가 고향 예천에서 후진들을 가르칠 때 문하생이 되어 성리학을 공부했다.

정영방이 원래 살던 곳은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송천이었다. 그는 29세였던 1605년(선조 38)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실정에 벼슬을 단념하고 산천이 수려한 곳을 찾아 다녔다. 이때부터 그는 학문으로 일생을 보냈다. 스승 정경세가 벼슬을 권해도 "저는 성품이 졸렬하여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한 번 벼슬에 나가면 학업과 명예를 모두 잃을까 두렵습니다"라며 고사했다.

서석지에 가면 봄에는 매화와 목단, 여름에는 연꽃과 바람, 가을에는 국화와 은행나무, 겨울에는 서석의 본연을 볼 수 있다.
▲ 가을날 행단의 은행나무 서석지에 가면 봄에는 매화와 목단, 여름에는 연꽃과 바람, 가을에는 국화와 은행나무, 겨울에는 서석의 본연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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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600년경 진보현 생부동(生剖洞, 지금의 경북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에 평생의 거처를 정하게 된다. 정영방은 산수가 아늑하고 수석원림이 절승인 이곳을 이상적인 곳으로 꼽고 1610년(광해군2)경 초당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곧장 정원을 조성하지 않았다. 봄여름가을겨울을 지내고 이곳의 입지와 자연계의 변화를 관찰한 뒤에 본격적으로 임천 정원을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620년, 드디어 정원 공사를 시작했고 주일재, 서석지, 경정 등을 순차적으로 조성하여 1636년에 마무리했다. 서석지라는 정원을 구상하는 데 10년, 완성하는 데 무려 17년이 걸렸다.

1650년, 정영방은 안동 송천으로 돌아갔다. 선어대 위에 띠집을 얽고 '읍취정(揖翠亭)'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주자와 퇴계를 읽으며 유유자적하던 그는 그해 7월 7일 노환으로 74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정영방의 손자 정요성이 간행한 <임천산수기>를 보면 일생을 자연 속에 살았던 그가 얼마나 자연을 사랑했는가를 알 수 있다.

서석지를 수십 번을 다녀왔지만 마루는 언제나 반들반들했다. 찾는 이들이 많지 않음에도 후손들은 서석지를 매일같이 청소한다. 고마운 일이다.
▲ 경정 마루 서석지를 수십 번을 다녀왔지만 마루는 언제나 반들반들했다. 찾는 이들이 많지 않음에도 후손들은 서석지를 매일같이 청소한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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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맞이하는 집안의 내력
서석지가 4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온 이유를 지금의 서석지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도 서석지를 가면 경정의 마루와 주일재 마루가 반들반들하다. 후손들이 매일 쓸고 닦기 때문이다. 후손들이 얼마나 서석지를 끔찍이 아끼는지는 방문객들도 그다지 많지 않음에도 늘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는 서석지를 보면 알 수 있다.

400년 동안 가꿔 온 후손들의 노력과 애정을 지금의 서석지에서 엿볼 수 있다. 게다가 누구나 경정 마루를 오를 수 있도록 개방했으며 그 흔한 '출입 금지' 푯말도 없다. 손님을 맞이하는 집안의 내력이 한결같음을 느낄 수 있다. 이 글을 통해 석문공의 후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윤선도의 보길도 부용동 원림, 양산보의 소쇄원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민간 정원으로 알려진 서석지는 경북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에 있다.




태그:#서석지, #정영방, #사우단, #경정, #주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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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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