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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 '막 퍼주는 집'이라는 채소 가게가 생긴 게 아마 삼사 년 전쯤이었을 거다. 주로 채소를 팔았는데 약간 일그러지거나 모양이 빠지는 것들을 말도 안 되게 싸게 팔았다. 싸게 판다는 입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옆 동네 주민들까지 '원정 쇼핑(?)을 올 정도였다. 공산품을 제외한 웬만한 반찬거리는 다 있어서 굳이 시장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몇 년 호황을 누리던 가게였는데 지난 겨울 어느 추운 날 뭐 살게 있나 싶어 그 가게에 가 보니 낯선 여인이 물건을 팔고 있었다. 주인이 바뀐 거였다.

새로 온 여인은 한눈에 봐도 장사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가게는 거의 한 데나 다름없어서 매서운 칼바람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는데 여인은 유난히 추위를 타는 듯 두꺼운 점퍼를 입고도 발을 동동 굴렀다. 여인의 남편은 물건을 들이고 내놓는 일을 했고 여인은 물건 값을 계산하는 일을 했다. 장사하는 모습이 하도 어설퍼서 장사 처음하느냐고 물었더니 여인이 수줍게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장사 수완이 없어서 그런지 며칠 되지 않아 물건의 구색이 빠지기 시작했고 손님의 발길도 줄어들었다.

장사꾼 같지 않은 여인을 보았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고 안 좋은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막 퍼주는 집'은 그 여인이 장사한 후 불과 한두 달을 못 버티고 문을 닫았다. 인수 받겠다는 사람이 없었는지 '막 퍼주는 집'은 이내 셔터가 내려진 채 '막 퍼주는 집'이라고 쓴 빛바랜 현수막만 너풀거렸다.

그러는 동안 겨울이 지나고 올 봄에 건너편 길가에 '막 퍼주는 집'과 같은 업종의 가게가 문을 열었다. '막 퍼주는 집'보다 가게의 시설이 약간 세련되게 꾸며졌고 그래서 그런지 물건 값도 '막 퍼주는 집' 보다 약간 덜 쌌다. 조금 덜 퍼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싼 편이라 사람들이 파리떼처럼 바글거렸다. 이 가게가 아니면 어디서 채소를 살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이 몰렸고 싸다고 외치는 주인 남자의 목청은 하늘을 찌를 듯 기세등등했다.

그런데. '약간 덜 퍼주는 집'이 약간 덜 퍼주며 장사를 한 지 불과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막 퍼주는 집'의 셔터 문이 활짝 열렸다. 새 주인이 나타난 거였다. 새 주인은 지난 번 망하고 나간 여인과 달리 '어디서 장사 좀 해 본 듯' 채소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싼 가격에 파는 거였다. 이 때를 놓칠 새라 '약간 덜 퍼주는 집'에 몰렸던 사람들이 '막 퍼주는 집'으로 몰려들었다. '막 퍼주는 집'의 새 주인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고 사람들은 '막 퍼주는 집'이 아니면 어디서 채소를 샀을까 싶게 파리떼처럼 달려들었다.

그날 '약간 덜 퍼주는 집'앞을 지나는데 기세등등하게 목청을 돋우며 싸다고 외치던 주인 남자는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에 가지런히 담긴 고추며 가지 따위에 달라붙은 파리를 쫓고 있었다. 지난 겨울 두 달을 못 채우고 문을 닫았던 '막 퍼주는 집'의 여인이 데자뷰처럼 겹쳤다.

사람들은 자연히 더 싸게 파는 집으로 몰릴 것이고 손님을 모으려면 '막 퍼주는 집'이든 '약간 덜 퍼주는 집'이든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팔아야 했다. 이 싸움을 견디지 못하면 한 쪽이 문을 닫는 거고 아니면 사이좋게 반반 씩 손님을 나누어야 하지만 싸게 많이 팔아야 남는 장사인데 손님이 줄면 싸게 팔 수 없게 되고 물건 값이 비싸지면 손님이 줄게 될 것이니 유지하기 어려울 거였다. 그러니 피가 튀게 가격 경쟁을 하는 것일 테고.

'막 퍼주는 집'이든 '약간 덜 퍼주는 집'이든 어느 쪽이든 망하고 떠나게 되면 다시 새로운 사람이 나타날 것이고 지금 같은 상황은 되풀이 될 거였다. '막 퍼주는 집'의 주인이든 '약간 덜 퍼주는 집'의 주인이든 줄도 '빽'도 없이 몸으로 부딪혀 먹고 살았고 몇 천원어치 팔아준 손님에게도 고맙다고 굽실거리는 사람들이었다. 이 둘은 이 장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건 장난이 아니고 그들의 삶이기 때문이었다. 상대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들에게는 연봉이든 시급이든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당장 오늘 얼마라도 팔아야 가게 임대료를 내고 인건비라도 건지는 거고 아니면 장사고 뭐고 거덜이 나는... 절박한 상황인 거였다. 이들의 주머니를 채워줄 상대는 싼 물건을 찾아 파리떼처럼 몰리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고 그들의 주머니도 '막 퍼주는..'이나 '약간 덜 퍼주는..' 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갑이 아니라 을에도 끼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세상에는 갑과 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이고 정이고 무이고... 그 외의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세상 밖, 혹은 세상의 위, 혹은 다른 세상에 산다. 다른 세상에 사는 이들도 그리 한가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도 싼 물건을 찾아 파리 떼처럼 몰려다니는 사람들처럼 치열하게 산다. 그들이 치열하게 사는 이유는 더 많은 것을 지키기 위해서 이다. 그들에게는 그게 삶이다.


태그:#그들의 세상, #그게 삶, #살아 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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