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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영화를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내게 영화 관람은 취미가 아니라 일처럼 되어버렸다. 우선 작품을 고르는 것부터 시작이다. 솔직히 두 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영화를 보고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것만큼 허탈한 순간이 있을까. 그래서 영화의 줄거리를 읽으며 쓸 거리가 있는 작품을 감별하는 게 글 쓰는 일의 반이다.

문제는 그러다보니 고르는 영화가 보고 싶은 것들이 아니라 글감이 있을 만한 작품이 되어버린 것. 어느 순간 회한이 찾아왔다. 예전에는 보고 좋았던 영화가 있으면 글로 남겼는데 모든 것이 거꾸로 변해버렸다. 펜과 메모지를 들고 취조를 하듯 한 작품을 반복해서 보다보면, 이제는 더 이상 영화를 즐기는 일이 불가능해진 걸까 슬픈 감정이 든다. 이 일을 절대로 '업무'로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다.

<혼자서 본 영화>
 <혼자서 본 영화>
ⓒ 교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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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영화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왜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싶어 했을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남은 것은 오직 관성과 길을 잃었다는 불안뿐이다. 정희진의 책 <혼자서 본 영화>는 그런 질문이 머릿속에 가득할 때에 만난 책이다. 그녀가 쓴 저서 중에서 저자의 이름이 아니라 제목을 보고 고른 유일한 책일 것이다.

나는 거의 대부분 영화를 혼자서 본다. 이전에는 사람이 필요 없어서였다. 극장 안에 하나의 작품과 나 혼자만 있어도 충만함이 느껴졌다. 지금은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다. 집중하고 몰입해서 놓치는 것 없이 영화를 파악하기 위해 그리고 쓰기 위해. 요즘은 보통 단골인 카페를 찾아 다른 테이블의 영향이 닫지 않는 가장 구석 자리에서 이어폰을 끼고 영화를 관람한다.

모든 영화는 '혼자서 본 영화'다

상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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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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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머리말을 읽어본 바 제목인 '혼자서 본 영화'의 뜻은 전자에 가깝다. 저자는 영화를 너무나 사랑하고 그래서 한 작품을 혼자 차지하기 위해 극장을 나서면 같이 간 일행이 말을 붙이기도 전에 사라진다고 한다. 그 지치지 않는 열정과 애정이 부러울 따름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또 다른 의미도 있다. 정희진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바로 '영화와 나만의 대면, 나만의 느낌, 나만의 해석', '나의 세계에 영화가 들어온 것'이다.

그녀가 쓴 것처럼 지구상의 그 누구도 같은 '몸'을 가지지 않았다. 우리에게 한 영화가 자극을 줄 때 해석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해석에는 다양한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낸 경험과 사회적 배경, 시각이 녹아들어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영화는 '혼자서 본 영화'가 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

또한 정희진의 말처럼 건물 안에서는 건물을 볼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적용해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그것이 영화든 문학이든 '재현'을 통해서만 우리는 현실을 볼 수 있다. 카메라 뒤편의 세계로 물러나야 우리는 스크린 위에 재구성된 현실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저자의 주장처럼 영화와 현실의 경계는 사실 없다. 그래서 한 편의 작품에 대한 해석, 감상 심지어 불평은 모두 '우리 각자는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지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영화를 다룬 모든 글들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혹은 이미 공유하고 있는) 글쓴이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게 만든다. 단지 그것의 깊이에 따라 같은 작품을 보고도 쓸 것이 없는 사람과 할 말이 넘쳐나는 사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말처럼 못 만든 영화는 있어도 '시간이 아까운 영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나 잘 만들었지만, 그래서 불쾌했던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스틸 사진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스틸 사진
ⓒ TBS/도호영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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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혼자서 본 영화>에는 주제, 내용, 장르 심지어 막대한 자본을 투입한 상업 영화와 소규모 예술 영화를 망라할 정도로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작품들이 등장한다. 이 책은 내가 서두에 언급한 고민의 원인이 실은 역량 부족에 불과하다는 부끄러운 교훈을 다시금 되새기게 만든다. 또한 책의 빛나는 지점은 영화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이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통찰과 시각에도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글을 뽑자면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다룬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 영화는 내게 개인적으로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다. 솔직히 제대로 기억도 못하고 있다. 여러 번 완주를 시도했으나 실패한 때가 많았고 심지어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아예 영화의 중간부터 술을 마셔버린 적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설명처럼 이 영화는 주인공 마츠코가 인생 내내 나쁜 남자를 만나 몰락의 길을 걷고 결국은 사망에 이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런 마츠코는 정말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하기 그지없다. 그녀는 자신을 때리고 성판매를 시키고 동반 자살을 시도하는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낀다.

여성이 주인공이며 동시에 비극적인 내용의 영화를 싫어하진 않는다. 오히려 남성의 것보다 공감과 이입이 훨씬 쉽다. 동성애자 남성으로서 내가 겪었던 억압이나 폭력, 그로인한 고통이 여성 주인공의 것들과 비슷한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년 시절 공동체에서 주로 나를 배제했던 이성애자 남자들이나 관계를 맺었던 동성애자 남자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나쁜 남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을 때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마츠코의 경우는 해도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풍파 속에서도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선량하고 헌신적일 수가 있을까. 마츠코에게 이입하면 이입할수록 그녀처럼 행동할 수 없는 내가 더욱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이쯤 되면 감독이 원하는 것은 고루한 '성녀/창녀'의 프레임을 전시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속으로 생각했다.

'어서 빨리 무너져, 당신도 우리처럼 바닥이 있을 거잖아.'

내가 더 타락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격려하는 책

하지만 정희진은 이 영화에서 '피해' 개념의 전복성을 발견한다. 저자는 마츠코의 피해와 고통이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 타인의 잘못임을 강조한다. 나쁜 것은 세상이지 마츠코 자신이 아니다. 그러니 그런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마츠코는 꾸준히 자기 본모습대로 살아간다. 그리고 정희진은 마츠코의 행보를 이렇게 설명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마츠코는 세상에 당한 것이 아니다. 세상과 싸웠다. 자기 방식이 옳음을 믿었다. 진정한 강인함이다. 완벽히 구조화된 가해와 피해의 양극 시대. 가해자/집단의 피해 의식이 판치는 시대에 정작 피해자인 그녀는 의연하다. 피해 의식만 가득한 사람은 마츠코처럼 타인을 걱정하지 않는다."

저자는 마츠코가 타인의 자존감, 의욕, 믿음을 도둑질하는 나쁜 사람들을 자신의 앞에서 가로막고 있다고 말한다. 그 표현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그녀의 글은 한 편의 영화에 대한 나의 평가뿐만이 아니라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뒤바꾸어 놓았다.

우리가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고 오직 냉소와 비관으로 삶을 점철시키지 않으며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윤리와 배려를 버리지 않기 위해 단순히 '선함'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 밑바탕에는 세상과 사람을 더욱 깊이 바라보고 관점을 전환하거나 새로이 형성하는 치열한 사유와 지적 노동이 있다.

<혼자서 본 영화>에서 정희진은 바로 그런 일을 하고 있다. 그녀가 쌓아올린 세계관에 발을 딛고 나 또한 희망을 본다. 책에 실린, 그녀가 <타인의 삶>에 대해 쓴 글의 일부를 수정하여 전하고 싶다.

'이 책은 내가 더 타락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준다.'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지음, 교양인(2018)


태그:#정희진, #혼자서 본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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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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