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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장애'의 위험을 안고 산다. 나처럼 나이 들면 누구나 법적으로 장애인으로 판정받기 십상이다. 그게 우리네 삶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근대사회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장애'(disabilities)를 합리적으로 분류하고 명명(낙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장애'는 의료적 판정기준에 따라 쇠고기 등급 매기듯 장애등급(1급에서 6급까지)을 매겨 분류된다. 그 등급기준에 따라 장애인에 대한 복지수혜의 범위와 정도가 결정된다. 장애당사자에게는 '등급'이 운명이 되는 세상이다.

장애인 탈시설 삶의 사례를 엮은 책들
▲ <나, 함께 산다>와 <어른이 되면> 책 표지 장애인 탈시설 삶의 사례를 엮은 책들
ⓒ 김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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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장애인의 탈시설화(de-institutionalized) 실천 사례 이야기를 담은 흔치 않은 책이 두 권 나왔다. 그 하나는 서중원이 기록하고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이 기획한 <나, 함께 산다: 시설 밖으로 나온 장애인들의 이야기>(2018)이다. 다른 하나는 생각 많은 둘째 언니 장혜영이 발달장애인 동생 혜정과 함께 보낸 시설 밖 400일의 일상적 서사 <어른이 되면>(2018)이다.

앞의 책은 시설 밖으로 나온 장애인 삶을 직접 인터뷰한 기록의 보고이고, 후자의 <어른이 되면>은 생각 많은 언니가 직접 발달장애인 동생과 시설 밖에서 일 년 남짓 몸으로 부대끼며 체험한 삶의 이야기다. 장애인 삶의 다양한 모습은 <나 함께 산다>에 잘 반영되어 있지만, 이야기의 깊이와 생동감은 <어른이 되면>이 돋보인다. <나, 함께 산다>를 기획한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은 장애인 시설의 존재 이유를 질문하지 않는 우리 사회를 이렇게 질타한다.

모두 다른 이름, 성격, 얼굴,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장애'라는 한 범주 안에 묶여 있습니다. 개인의 성향, 환경, 필요한 자원과 상관없이 장애를 등급으로 나누고 등급에 따라 던져지는 단일한 서비스로 충분히 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 시설은 장애인을 하나의 집단에 넣어놓고 동질의(획일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체계입니다. 이 시설의 본질은 사회의 한 시민인 '나'로 살기를 포기하고, 그저 사회가 구분 지어놓은 '장애인'으로만 살라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회가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이며, 여전히 시설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 <나 함께 산다>, 8쪽

우리나라에서 지역사회로부터 분리된 삶의 침묵은 약 11만 명을 수용시설로 보냈고, 그곳은 셀 수 없는 인권침해가 일상화되는 공간으로 닫혀 있다. 거기에서 장애인들의 이름은 지워졌고, 개인의 서사 역시 가려져 왔다. 하지만 시설에서 나온 용기 있는 장애인들의 목소리는 그 울타리를 넘어 시설의 존재 이유를 질문하지 않는 사회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다.

같은 장애인이지만 시설로 '보내지는 사람'과 그 시설을 '박차고 나온 사람'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우리에게 장애인 탈시설 운동은 그 자체가 곧 사회변혁 운동이다. 하지만 장애인 당사자에게 정말로 중요한 난제는 시설에서 나온 그 다음의 문제다. "그 다음을 어찌 살아내느냐"가 장애 당사자에게 지워진 삶의 난제이긴 하지만, 그것은 곧 우리 비장애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문제이기도 하다.

신경수 씨와 그의 시 <좀 바꿔 주세요>
▲ 뇌병변 장애인 신경수 씨와 '좀 바꿔주세요' 시 신경수 씨와 그의 시 <좀 바꿔 주세요>
ⓒ 김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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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병변 1급 장애인 경수씨는 '좀 바꿔 주세요'에서 자신이 겪는 탈시설의 삶을 이렇게 고발한다.

'동사무소 복지과에 전화 했더니 바로 활동보조인 바꿔 달라는 거야. 내가 언어장애 있어서 못 알아듣겠다고.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좀 더 들어보려고 노력도 안 하고. 대표님하고 나하고 동사무소 가서 따지고 왔어. 어느 날 인터넷 상담전화가 왔는데, 그쪽에서 바로 내 목소리 듣더니 옆에 있는 사람 바꿔 달라는 거야. 근데 내가 안 바꿔줬어. 매장에 직접 가서 따졌지.'

그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장애가 자신의 문제인 게 아니라 실은 '당신네가 문제'인 걸 일갈하는 경수씨다. 탈시설 이후 20년 만에 자취를 하는 경수 씨는 '꼭 사야할 것'을 이렇게 정리한다. '바구니에 야채 넣고, 과일 넣고, 참치 넣고 이만 원치. 계산대에 가보니 오만 원치. 과일 빼고, 야채 빼고, 참치는 놔두고. 밥은 먹어야지.' 참치, 고추장, 참기름 이거 비벼 먹는 게 자취생의 진리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시설 문제가 뭔지 아세요? 폭력, 죽이고, 때리고…앞으로 (시설에서) 폭력이 허용 안 되게 나라가 바뀌어야 해요. 어떻게? 시설지원이 아니라 자립생활 지원을 강화하는 걸로요. 시설 폭력을 막는 방법은 무조건 시설수용 반대하는 것뿐이에요. 돈 없다고 하지 말고 시설예산을 가지고 자립지원을 하면 돼요. 자립센터들 지원하면 훨 나을 거예요. - 122쪽.

그는 백프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걸 거듭 강조한다.

"사람에게 무슨 등급이에요?"
"장애등급제를 폐지해야죠. 그래야 사람이 안 죽지. 등급제가 고생이에요. 장애인들한테는."

이럴 때 그의 말은 또렷하고 명쾌하다. 꽃동네에서 2015년 3월에 나온 최영은은 자유와 생각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자립을 택했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꽃동네에서 생활은 감옥살이 같았어요. 마음대로 먹고 일어나고 그럴 수 없잖아요. 특히 새벽에 미사 가야 하는 거, 그거 굉장히 싫었어요. 안 가면 안 되고... 그런 거 선택할 수 없는 게 싫어요.

영은씨는 휠체어도 없고, 활동보조 시간도 필요한 만큼 배정되지 않았던 자립 초기에 힘들어도 그저 '시간이 약이다'고 참았다는 20대 중반의 아가씨다. 예전부터 자신을 "몹시 좋아했다"는 남자 친구와 시설이 아닌 사회 속에서 누린 자립 1년 동안의 생활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란다.

고병권(노들장애학궁리소)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모든 인간 수용소는 기본적으로 인간 절멸 수용소"로 규정했다. 시설에서 장애인은 공생의 존재가 아니라, 처분의 존재가 되고 만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족과 사회가 '나'를 포기한 곳이 시설이라면, 이제 시설은 나로 하여금 '나'를 포기하게 만든다. 나를 무력한 존재로 만든 뒤, 무력한 존재로서 나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 장애인을 시설에 묶어두는 가장 질긴 철끈이 이것이다. - 326쪽

우리는 그냥 그들(장애인)에게 지시하려고만 들었지 듣지 않았고, 그들을 관리하려고만 들었지 함께 살 생각(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 대신 시설을 갖게 된 게다. 이제 우리는 내 맘속에 장애인을 초대할 자리를 마련 할 때다. 왜냐하면 '초대'란 내게 마련된 당신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생각 많은 언니 "일단 함께 살아요"

발달장애인 혜정과 함께 그의 자립생활에 동참하는 사람들
▲ 혜정(왼쪽)과 함께하는 사람들( 오른 쪽 끝이 저자) 발달장애인 혜정과 함께 그의 자립생활에 동참하는 사람들
ⓒ 김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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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리뷰한 <나, 함께 산다>가 장애당사자들에 대한 인터뷰 기록이라면, <어른이 되면>은 생각 많은 언니 장혜영이 발달장애 여동생 혜정이와 함께한 400일의 '지지고 볶고 부대끼는' 일상 이야기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그냥 흔한 서사적 기술이 아니다. 그 속에는 저자인 '생각 많은 언니'의 인간(동생)에 대한 연민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생각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생명력이 없다. 생각이 철저하면 철학이 되고, 그 철학은 삶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 장혜영은 메타프락시스(meta-praxis 초실천)의 전형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인다. 감히 넘볼 수 없는 실천이다.

흔히 발달장애나 지적장애인의 경우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이 턱없이 부족하므로 부모들은 장애자녀보다 단 하루라도 더 사는 게 절실한 바람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족들은 특수학교를 졸업한 발달장애인을 더 이상 가정에서 감당하기 어려워 수용시설에 보내기 십상이다. <어른이 되면>의 주인공 혜정이도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본래 장애는 '치료' 가능한 게 아니라, 부단한 경험에 의해 조금씩 좋아질 뿐이다. 하지만 발달장애 자녀를 둔 혜정 어머니는 혜정이가 '어른이 되면' 정상으로 회복 될 것으로 믿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일 뿐, 혜정의 발달장애는 오롯이 현실문제로 그냥 남겨진다.

장애는 질병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당사자 개인의 비극으로 환원될 문제가 아니다. 장애는 당사자와 그 가족들이, 그리고 우리 사회가 함께 수용(포용)하고 감당해야 할 실존적 문제이자 당대사회의 문제다. 그래서 장애학(disability studies)에서는 장애당사자가 '장애를 장애로 느끼지 않는 사회'를 말한다. 이른바 '장애의 벽이 없는'(barrier free) 사회를 제기한다.

저자는 어린 시절 세상에서 자기만큼 혜정이를 잘 돌보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생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시설로 보내진 후, 그 결과를 온몸으로 감당해야 할 책임은 동생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격리는 사라진 혜영이와 남아 있는 우리가 질적으로 '다른 인간'이라는 증거가 되고 말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저자의 마음속에 어둠이 밀려왔다. 이제는 그 어둠이 자신의 그림자처럼 다정하게 느껴지게 된다.

그 즈음 저자는 '혜정이에게 다시 돌아가야 해'라는 내면의 부름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마침내 생각 많은 언니는 "혜정이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져버린 나의 일부를 되찾기 위해 나는 시설로 향했다"고 고백한다. 성찰하지 않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생각 많은 언니의 성찰은 이렇게 이어진 게다.

가족으로부터 소외당해 시설에 온 혜정이는 시설 안에서도 한없이 소외되었다. 혜정이라는 한 인간의 삶은 늘 혜정이를 돌보는 사람들의 삶보다 무게가 덜 나갔다. 시설에서 혜정이와 같은 발달장애인은 아무 생각도 없고 아무 느낌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물' 같은 존재처럼 간주되었다. …(중략) 그렇게 격리된 혜정이의 삶을 '그 또한 하나의 삶'이라고 수긍해버린다면, 이 사회는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합법적으로' 사회 밖으로 추방해버릴 수 있는 곳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 <어른이 되면>, 37쪽.

모든 인간에게 '자유'는 자기존재 이유다. 저자는 동생의 자유를 그냥 운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하여 혜정의 자유는 스스로 관리되고 쟁취해야 할 인권의 문제다. 생각 많은 언니에게 혜정의 탈시설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이자 삶의 문제로 다가왔다. 시설은 집단적 통제와 순육(順育)을 제공하는 격리된 공간이다. 하여 바깥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시설문화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18년 만에 다시 함께 살기로 한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혜은과 혜정 자매는 월세를 얻어 이사를 한다. 비로소 혜정은 자기만의 방을 가지게 되고, 마침내 자립생활을 위한 긴 여정이 시작된다. 삶은 관계의 연결이다. 이제 두 자매는 서로간의 관계망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삶의 망을 짜나가야 한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다. 생각 많은 언니, 저자에게 '연약하다는 것'은 발달장애인 동생과 삶을 이어가는 데에 섬세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에게 연약한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세상을 늘 섬세하게 바라보는 연습이다. 하여 저자는 연약한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언젠가 내가 연약해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랬다.

'발달장애'(developmental disability)는 인간발달이 다양하고 섬세하며 끊임없는 과정(현재진행형)임을 상기 시킨다. 원래 '발달장애'는 의학적으로는 뇌 발달의 문제이지만, 교육적으로는 독특한 학습스타일과 학습속도의 문제이다. 저자가 지적했듯이 "인간의 발달 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되므로 발달장애인은 멈춰선 사람이 아니라 더디긴 하지만 변화(발달)하는 사람"이다.

<중용>에 이르기를 "남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며,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하리라"(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했다. 하여 이렇게만 하게 되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현명해지며, 비록 유약한 자라도 반드시 강건하게 될 것"이라 했다. 필자가 보기에 <중용>의 이 말은 바로 발달장애인을 향한 경구처럼 들린다. '우리 아이는 안 된다'는 부모의 조급증, 그리고 참고 기다려주는 교사들의 인내와 관용 부족이 발달장애아의 학습장애를 재생산한다.

동생 혜정에 대한 연민과 체험에서 우러난 저자의 목소리는 당당하다. 그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일단 함께 살아가기'라고 대답하고 싶다"고 했다.

"혜정이와의 삶에서 나를 정말로 어렵게 하는 것은 혜정이와 살아가는 것 그 자체보다 혜정이와 함께 살아갈 준비가 안(덜) 된 이 세상과 마주하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살면 살아진다."

모든 장애인은 우리가 함께 살면, 살아진다. 인간은 네가 있음에 내가 있는 연기적(緣起的) 존재다. 생각 많은 언니는 혜정과 함께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실천하는 쾌감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 속에 삶의 자유가 숨 쉰다. 저자는 동생 혜정과 함께 사는 길을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평생을 걸어도 다 걸을 수 없을 만큼의 길이 있다. 모든 길을 다 걸을 수는 없지만, 정말로 원한다면 우리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중략) 나는 혜정이를 향해 걸었고, 이제 우리는 함께 걷고 있다. 나는 혜정이의 몇 걸음 뒤에서 걷고 있다. 나란히 걸으면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혜정이를 끌고 가게 될 것 같아서 그렇다. - <어른이 되면>, 195쪽

길은 닦아야 길이 된다. 우리가 서로에게 진정어린 연민을 품는다면 우리네 삶은 더 많은 신비로움을 드러낼 게다. 생각 많은 언니에게 혜정이는 짜증나는 동생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키지 않으면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으면서 해달라는 것은 끝없이 많은 동생이다. 하지만 언니는 열 받게 하는 동생의 연약함을 사랑한다.

혜정이의 '자유로운 영혼'은 그의 존재이유이자 삶의 성역(聖域)이다. '성역'은 성스러운 곳이기에 그 누구도 함부로 범할 수 없다. 우리에게 삶은 신비다. 함께 살면, 살아진다. 생각 많은 언니는 발달장애 동생 혜정과 그 삶을 당대사회에서 목하 체현해 가고 있다.


어른이 되면 - 발달장애인 동생과 함께 보낸 시설 밖 400일의 일상

장혜영 지음, 우드스톡(2018)


나, 함께 산다 - 시설 밖으로 나온 장애인들의 이야기

서중원 구술, 정택용 사진,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기획, 오월의봄(2018)


태그:#탈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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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로 태어나 지금은 명예교수로 그냥 읽고 쓰기와 산책을 즐긴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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