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 포스터.

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 포스터. ⓒ 달컴퍼니


사람이 지닌 수많은 감정들 중 가장 나약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감정이라 함은, '사랑'일 것이다. 상대적으로 단순 명백한 감정인 희로애락과는 달리, 도저히 그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오묘한 이 감정은 인간에게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주기도 하며,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이처럼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인 사랑에 대한 연구는 인류의 출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 과학, 인문학, 사회학 등 학문의 분야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되풀이 되어 왔다.

허나, 무엇도 사랑을 '이렇다할' 감정이라고 증명하지는 못 하였다. 그 중 과학은 '사랑에 빠지는 이유'에 대해 '호르몬의 작용' 때문임을 밝혀냈지만, '왜 특정 사람에 대해서만 호르몬이 분비되는 것인지'까지는 밝혀내진 못했다. 이처럼 사랑은 인간이 소유한 감정 중 가장 '비논리적'인 것을 보인다. 그럼, '증명'과 '논리'를 무기로 삼는 천재 수학자가 사랑에 빠진 이야기는 어떨까.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는 싱글맘 야스코와 그녀의 딸 미사토 모녀의 옆집에 산다. 여느 때와 같이 수학 문제를 풀던 이시가미는 벽을 넘어 들려오는 소란에 옆집의 초인종을 누른다. 문을 열자, 벌어진 광경은 야스코의 전 남편 토가시가 살해된 현장. 이시가미는 야스코 모녀를 돕기로 결정하고, 수식과도 같은 알리바이를 만든다. 살인을 덮기 위해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고 최악의 경우에는 자신이 모든 죄를 덮어쓰도록.

사건을 담당한 쿠사나기 형사는 야스코를 강력한 용의자로 의심하고, 그를 통해 사건을 접한 천재 물리학자 유카와는 사건에 흥미를 느낀다. 결국 사건에 개입한 유카와는 대학 동기였던 이시가미를 만나 알리바이를 풀어나간다. 유카와의 추리는 사건의 진실에 근접해가지만, 그는 이 전제가 맞지 않기를 바란다. 허나, 그의 추리와 맞아떨어지게끔 이시가미는 자수를 하고 모든 죄를 뒤집어쓴다. 그리고 유카와는 이시가미의 선택이 야스코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동명 소설과 영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뮤지컬 <용의자X의 헌신>은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을 쫓는' 기존 추리물 서사를 전복시켜, 우리에게 '범인이 누구인가'란 화두를 던진 뒤 시작한다. 대신 극 중 추리의 과정은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가 어떤 트릭을 사용했는가'라는 의문을 풀어가는 서사에 주어진다. 문제를 푸는 것은 유카와의 몫. 허나, 그는 논리적으로 사건을 파헤치기보다, 직감으로써 해답을 찾는다. 때문에 기존 추리물처럼 박진감 넘치는 전개를 기대했다면, <용의자X의 헌신>은 시시껄렁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극은 미스터리함이 빠진 톱니에 한 여자를 끔찍이 사랑한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의 헌신을 절절하게 담아냈다. 추리물의 외피를 뒤집어썼지만, <용의자X의 헌신>은 사실 로맨스물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용의자X의 헌신'은 '아름다운 헌신'이었을까.

지시하는 '남성', 따르는 '여성'

 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의 한 장면.

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의 한 장면. ⓒ 달컴퍼니


소설인 원작을 넘어 영화, 뮤지컬로 되풀이되며 눈에 띄게 변화를 겪은 부분은 <용의자X의 헌신> 속 '형사' 역의 성별일 것이다. 소설에서는 '쿠사나기'라는 남성이었고, 영화에서는 '우츠미 카오루'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는데, 뮤지컬에서는 소설 원작과 동일한 이름으로 남성을 캐스팅하였다. 이는 마치 뮤지컬 <용의자X의 헌신>이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음을 주장하는 대목처럼 보인다. 무엇을 따랐든 간에 좋다. 그러나 공연계 전반적으로 여성 캐릭터를 소비해왔던 방식을 반성하고, 이를 재고하는 현 시점에서 이와 같은 캐스팅에는 다소 실망감이 든다.

단지 형사 역에 여성 배우를 캐스팅 하지 않은 점이 '여성 배우의 일자리 하나가 또 줄었다'는 문제에 불과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로 인해 극 중에 여성 캐릭터는 야스코, 미사토 둘 뿐인데, 이들은 '보호'를 받는 '연약한' 여성상으로 표현될 뿐 아니라 '지시'를 따르는 수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 때문에 뮤지컬 <용의자X의 헌신>에서 여성 인물과 남성 인물은 명확히 두 그룹으로 나뉘게 되었다. 목적의식을 갖고 '주체적으로' 사건에 참여하는 남성 그룹과 (사건의 진범임에도) 타자의 지시만을 따르며 '소극적으로' 사건에 참여하게 되는 여성 그룹으로 말이다. 간단하게 형사 역의 성별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위와 같은 문제는 해소할 수 있었을 텐데, 각색 과정에서 이를 섬세하게 고려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뮤지컬'이라는 해답은 아름답지 않았다

 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의 한 장면.

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의 한 장면. ⓒ 달컴퍼니


뮤지컬 <용의자X의 헌신>이 '뮤지컬로서' 독자성을 갖지 못 한 점 또한 아쉽다.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는 방법을 따른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각색이라 함은, 현재에 무대에서 볼 만큼의 잠재적 가치를 '재발견'하고자 함이거나 원작을 뛰어넘는, 혹은 그와 견줄 법한 재미를 추구해야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는 <용의자X의 헌신>이라는 작품이 원작 소설을 토대로 일본, 한국에서 각각 한 번 씩 영화로 두 편이나 재현되었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허나 뮤지컬 <용의자X의 헌신>은 이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되지 않았다. 재발견이라고 하기엔 작품 속 이시가미의 사랑은 현재 관객들의 눈에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으며(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 소제목에서 자세하게 다룬다), 또 원작 소설의 전개를 따라가기에 급급했으니 말이다.

해당 작품이 '뮤지컬'로 각색되었단 점에서 '뮤지컬적 어법'을 따르지 못 한 점은 곧 관객들의 실망으로 돌아간다. 같은 무대 예술 중 연극이 인물의 내면 심리를 '독백'으로 말한다면, 뮤지컬에서 이를 표현하는 수단은 주로 '음악'이다. 뮤지컬 속 음악은 단순하게 주인공이 부르는 아리아의 의미를 넘어, 인물의 감정을 객석에 전달하기 위한 주요 수단이다. 즉, 주 서사가 존재하더라도 작품 속 인물의 감정을 '리드'하는 역할은 음악에게 주어지는 셈이다.

허나, 이 작품에선 거의 모든 인물의 생각과 감정이 음악보다 문자로 구구절절 설명됐다. 주인공의 내면을 노래하는 곡들도 단조로운 선율 위에 반복적인 가사가 입혀져 있는 수준이라, 관객들은 공감대를 형성하기는커녕 인물의 심리를 쫓아가기도 버겁다.

제 구실을 하는 음악의 부재가 가장 아쉬웠던 장면은 단연 이시가미가 자수를 하며 극 중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이 연출될 때였다. 이 장면에서 이시가미 역의 배우(최재웅, 조성윤)의 열연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배우의 연기력에 비하여 '가장 극적이었어야 할' 장면의 넘버조차, 이시가미의 정서를 다 표출하기에는 부족한 느낌이었다. 이 때문에 카타르시스를 느껴야 할 장면에서 관객들은 그렇지 못했다. 

<용의자X의 헌신>, 누구를 위한 '헌신'이었나

 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의 한 장면.

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의 한 장면. ⓒ 달컴퍼니


알리바이를 조작하기 위한 소설에서 이시가미가 첫 번째로 행하는 바는 '죽더라도 아무도 모를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선택은 사건이 최악의 경우에 직면한다면, 이시가미, 자신이 자백하기 위함이었다. 야스코 모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런데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악행도 서슴지 않는' 그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극은 진솔하게 이시가미의 '헌신'을 담아낸다.

그러나 야스코 시점에서 이시가미의 헌신을 바라본다면 그 헌신은 전혀 아름답지 않으며 조금은 가학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완벽한 알리바이 조작을 위하여 실제 스토킹까지 서슴지 않는 이시가미의 행동은 야스코에게 공포스럽게 다가간다. 상황이 이런데도 마지막에서야 '짠, 이것은 연기였습니다!'라고 한다고 야스코가 그간 겪었을 정신적 충격이 씻은 듯이 나아질까? 의문이다.

또 이시가미는 마지막 편지에서 "당신은 행복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제 노력은 물거품이 되니까요"라고 말한다. 이시가미는 진정, 야스코가 이 '끔찍한 과정'으로 자신이 보호받았다는 사실을 알고도 행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걸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희생'을 어떤 눈으로 바라봐야 하겠나. 그가 야스코를 위해 애꿎은 노숙자를 죽이고, 스토킹을 연기한 것은 대의를 위했기에 용서받아 마땅할까? 이런 질문조차 '답은 이미 정해져있다'고 느껴질 만큼, 이시가미의 로맨스는 2018년 관객에게 너무 낡은 것이다.

뮤지컬 마지막 즈음, 이시가미는 야스코 모녀를 처음 만난 날을 회상한다. 집에서 목을 매달기 전, 야스코 모녀는 그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세상이 외면했던 그에게 야스코 모녀는 따뜻하게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이에 이시가미는 "당신이 아니었다면 진작 죽었을 목숨"이라며 자신의 희생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야스코 모녀는 남성 인물에 의해 '성녀화'되었으며, 이시가미의 영웅적 행동을 위해 '도구화'되었다.

명실 여자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극의 초반부 50분 동안 제대로 된 대사 한 줄 말할 기회조차 못 가졌던 야스코는 끝까지 이시가미의 천재적인 지시를 수행하기 위한 대상으로, 그의 헌신을 설명하기 위한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혹자는 공연계 여성 캐릭터가 변화했다고 말한다. 허나, <용의자X의 헌신>이라는 변수가 있는 한 위 말은 일반화하기에 힘든 명제가 될 것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뮤지컬 <용의자X의 헌신> 작가 정영은 지난 5월 대명문화공장에서 진행된 프레스콜 간담회 자리에서 "원작 소설과 동명 영화를 봤을 때 저에게 강렬하게 와 닿았던 건 인간의 고독이었다. 이시가미의 사랑은 지극한 인간애를 보여준다. 그것을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사회와 견주어 볼 때 작품 속 남녀의 모습은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시가미의 휴머니즘에 대한 대중의 공감의 얻으려면, 이 작품 속 오래된 젠더 감성을 먼저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만일, <용의자X의 헌신>이 훗날 다시 공연 된다면, 그 때는 아름다운 해답을 찾길 바란다. 

뮤지컬 용의자X의헌신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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