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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정해놓은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그게 곧 '실패'라고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지나고 보면 오히려 더 좋은 결과였다고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시민기자들의 아름다운 실패기를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예언자를 만났다. 무소속 구의원 예비후보자인 나를 앞에 둔 그는 낙선을 확신했다. 확률은 99.9999%.

2018년 봄의 일이다. 서울 금천구 다 선거구(시흥 1동, 4동) 출마 후 지인의 소개로 그를 만났다. 선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소개답게 그는 과학적 데이터를 근거로 나의 실패를 예언했다.

먼저 동네를 보자. 이곳은 지난 대선 당시 2, 3번 후보에게 표를 준 유권자가 비교적 많았다. 전통적으로 지방 선거 구의원은 제1, 2당에서 한 명씩 당선됐다. 무소속이나 진보 정당에 대한 관심은 낮은 동네였다.

객관적인 후보의 상태는 어떨까? 지역 유지나 그 가족이 아닌 평범한 동네 주민, 모아둔 돈은 물론 조직도 없는 30대, 심지어 정당과 상관없는 무소속 구의원 후보. 당선 확률 0.0001%였다. 여기서 1은 의미 없는 숫자다. 세상 일은 혹시 모르니까, 정도의 뉘앙스.

공룡탈을 쓴 구의원 예비후보 2018년 3월 금천구청 앞마당에서 열린 벚꽃축제에서 공룡탈을 쓴 채 선거운동에 나섰다. 아이에겐 즐거움을, 부모들에겐 선거 명함을 건넸다.
▲ 공룡탈을 쓴 구의원 예비후보 2018년 3월 금천구청 앞마당에서 열린 벚꽃축제에서 공룡탈을 쓴 채 선거운동에 나섰다. 아이에겐 즐거움을, 부모들에겐 선거 명함을 건넸다.
ⓒ 곽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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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와의 미팅 후 당황스러웠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막연히 알던 사실. 누군가가 말로 지적했을 뿐이다.

당선은 출마자의 의지와 별개로 이뤄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사는 동네 유권자는 5만여 명, 가구 유형이나 라이프스타일이 제각각인 서울 끝자락 동네의 유권자를 선거 기간에 모두 만나기란 불가능했다. 만나지 못한 다수 유권자가 당선 여부를 결정한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낙선 확률에 흔들려선 안 된다. 99.9999%나 99.99999%이든 심지어 100%라고 해도 상관없다.

정말 중요한 일에 집중해야 한다. 매 순간 '왜 출마했는지'를 잊지 않고 깨어 있는 것. 그리고 그 의미를 선거운동에 반영하는 것.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면 성공 가능성이 높아지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 것. 낙선은 곧 실패라는 두려움에 갇히지 않는 것이다.

"대통령도 바꿨는데, 내 동네라고 못 바꿀쏘냐?"

출마 결심 후 홍보용 SNS의 섬네일로 광화문 사진을 택했다. 2016년 겨울, 혹은 2017년 봄 촛불로 뒤덮인 광화문 광경. 출마 이유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난 이미지였다. 그 사진 위에 '대통령도 끌어내렸는데 내 동네라고 못 바꿀쏘냐'라고 적었다.

2016년~2017년 광화문 촛불집회는 권력을 사유화한 '적폐 정권'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시민들의 시간이었다. 이 시대 사람들이 공유한 역사적 경험이 다가오는 생활정치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러올 것이라 믿었다.

일상을 둘러싼 관습과 문제에 주목하고, 투표할 기회만 온다면 누가 가장 그 문제 해결에 적합한지 고민하고 선택하지 않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2018년 6.13 지방선거가 그 기회였다.

선거 6개월 전부터 온라인에서 구의원 출마를 결심한 사람들과 모였다. 출마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현재 정치 시스템에 여러 문제가 있고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는 지점에는 모두 동의했다. 우리는 그 대안이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구의원 출마를 위한 스터디 중  2018년 초봄, 구의원 출마자와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정보를 공유하고 향후 일정을 의논했다.
▲ 구의원 출마를 위한 스터디 중 2018년 초봄, 구의원 출마자와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정보를 공유하고 향후 일정을 의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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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재능기부자들이 선생으로 나섰다. 국회의원 보좌진들이 퇴사하고 만든 스타트업 폴리시브릿지, 정치를 주제로 놀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소셜벤처 칠리펀트, 마포구 전 구의원 오진아(정의당)님 등이 주말마다 필수 정보를 알려줬다.

▲ 일 잘하는 구의원은 구청장의 역할도 할 수 있다. 전대 구청장이 졸속으로 가결한 지하 주차장 사업건을 철회하는 일, 유휴공간을 어린이 도서관으로 만드는 일, 노는 땅을 찾아 텃밭으로 만드는 일을 구의원이 시작할 수 있다. 무소속이나 진보정당 소속 소수 구의원은 캐스팅보트 역할도 가능하다.

▲ 공약을 만들기 위해선 일단 '나'에 대해 알아야 한다. 스스로의 삶과 출마한 지역을 분석하고, 지역의 현안이나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면 공약을 만들 수 있다.

▲ 무소속 구의원 후보인 우리들은 주민의 추천 서명을 최소 50개 받아야 한다. 서명은 후보 등록 직전인 5월 중, 단 5일 동안만 받을 수 있다.

▲ 선거 운동을 하려면 3월부터 예비 후보로 등록 후 가능하다. 이때 40만 원을 출마 지역구 선관위 계좌에 입금해야 한다. 나머지 기탁금 160만 원은 5월 후보등록 기간인 이틀(24, 25일) 안에 납부해야 후보로서 끝까지 선거 운동을 할 수 있다.


무소속 구의원 출마가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알려주는 구의회 관계자도 만났다. 정당 공천 없이 구의원 당선되기 불가능한 현실에서, 정당 소속 구의원 후보는 공천권을 가진 지역위원장(대부분은 그 지역 국회의원)의 을이 된다.

자연스럽게 위계 구조가 형성되며 구의원은 구정보단 국회의원의 '몸종'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일에 대해선 여러 번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관련 기사: 전직 도(道)의원의 고백 "나는 국회의원 몸종이었다").

출마 전까지 나 역시 몰랐다. 구의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 왜 우리는 그 효능감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지, 일 잘하는 구의원보다 공천권자 말 잘 듣는 구의원 뽑을 가능성이 왜 높은지. 왜 정당은 국회에서 벌어지는 여의도 정치가 아닌, 일상생활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지.

대통령도 끌어내렸는데, 내 동네라고 못 바꿀쏘냐 출마 결심 후 만든 이미지
▲ 대통령도 끌어내렸는데, 내 동네라고 못 바꿀쏘냐 출마 결심 후 만든 이미지
ⓒ 곽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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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정권의 시대, 구의원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적 사건 이후의 구의원이라면 '동네 적폐청산'이란 시대적 과제를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유권자에게 기대했다. 이런 취지로 나온 구의원 후보에게 표를 주기를. 효능감 적은 정당 대신 지역 주민과 더 잘 소통할 인물을 뽑아주기를.

기존 데이터에 근거한 실패 확률 99.9999%보다 중요한 것은 동네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취지를 잊지 않고 공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았다. 출마 취지를 선거운동에 반영하고자, 관습적인 선거 운동 방식을 버렸다.

로고송을 만들지 않았다. 선거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앰프 싣고 달리는 선거 트럭을 빌리지 않았다. 걷고 눈 마주치며 목소리만 사용했다. 내 말을 줄이는 대신 사람들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다녔다.

그 자리 중 하나가 '우리 동네 정치 살롱'이었다. 교육과 노동, 생태 이슈 등을 두러싼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마을 신문 주관 행사에 나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모두 출석했다. 그 모습에 동갑내기 동네 친구의 마음을 얻었다. 그는 퇴사 후 선거사무장으로 일을 도왔다.

여성 후보-여성 사무장의 흔치 않은 조합이 캠프 모습을 다르게 만들었다. 우리는 선거 기간 첫날, 예비 후보 때부터 사용한 선거 자금 내역을 공개했다. 최저임금법 개정('복지 혜택'에 가까운 식비와 교통비 등을 최저임금에 넣음)에 항의하며 노동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고자, 선거 사무원 시급을 일만 원으로 계산했다. 선거사무원분들 이름 뒤에 '님'자를 붙이며 존대했다. 사무원 간 관계가 수평적으로 이뤄지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

선거사무원 분들과 함께 2018년 6월 6일, 함께 선거운동에 나선 가족과 사무원들.
▲ 선거사무원 분들과 함께 2018년 6월 6일, 함께 선거운동에 나선 가족과 사무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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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투표 기간 이후 만난 주민들 중 어떤 이는 '다른 후보들은 다 1번 찍었지만, 구의원만큼은 6번을 찍었다, 이런 구의원이 필요하다는 아내의 설득에 넘어갔다'고 응원했다. 또 다른 이는 '제대로 하지 않으면 준 표를 뺏을 테니, 잘해야 한다'라며 경고했다.

아이와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했던 한 아이 엄마는 '좋은 정치인이 되어 달라'라며, 사진을 보내주기도 했다. 또 다른 이는 '당신을 찍었지만, 변화를 원하는 더 큰 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당선에는 실패할 것이다'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선거 당일, 2246명이 소중한, 정말 소중한 한 표를 나에게 주었다.

성공과 실패 대신 숙제만 남았다

개표 후 동네 주민들은 깜짝 놀랐다. 당선 여부가 아니라, 표 수 때문이었다. 아무런 정치적 자산 없는 무소속 청년 구의원 후보가 받기엔 상당히 많은 표라는 것이다.

실제 평균적인(?) 무소속 구의원의 득표수는 300~900표 사이라고 한다. 2246표는 약 두 배, 득표율은 8.3%. 누군가는 사회과학 연구에서 의미있는 결과로 인정되는 퍼센트이며, 성공적인 결과라고 평가했다.

이 결과를 만들기 위해 받은 도움이 너무나도 많다. 혼자였다면 완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함께 용기를 북돋우며 출마한 '굽시스터즈'(4명 모두 여자인지라, '구의원 출마 프로젝트 시스터즈'란 이름을 만들어 음으로 양으로 연대했다), 후원금을 받지 못하는 구의원을 위한 선거 펀드에 투자한 개인들, SNS로 보내온 응원들.

그 덕에 '이상한' 구의원 후보는 선거를 완주할 수 있었다. 무소속인데, 정당 공천 떨어진 후 탈당해 나온 무소속은 아니란다. 전 재산 천만 원인 청년인데, 부모가 경제적으로 넉넉한 동네 유지는 아니란다. 여자 후보들이 흔히 내세우는 엄마 경력은 없는, 미혼이란다. 정당 정치인보다 회사원으로서 성실히 일한 경력으로 정치를 잘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단다.

기존 구의원 프로필에 맞지 않은 이 후보에게 2246명이나 표를 줬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동네 청년도 유권자를 대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해준 분들이다. 정치인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상식과 이성과 책임의식을 지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어준 것이다. 현재 정당과 정치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굽시스터즈 제대로 된 구의원이 필요하다며 무소속 구의원 출마 프로젝트에 끝까지 남은 네 사람. 왼쪽부터 우정이, 김정은, 곽승희, 차윤주 후보. 나를 뺀 3명은 모두 마포구에 출마했다.
▲ 굽시스터즈 제대로 된 구의원이 필요하다며 무소속 구의원 출마 프로젝트에 끝까지 남은 네 사람. 왼쪽부터 우정이, 김정은, 곽승희, 차윤주 후보. 나를 뺀 3명은 모두 마포구에 출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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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출마 초기,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을 떠올리며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출마하지 않았다면,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목소리다. 정치가 바뀌어야 하고 대안이 필요하다며 무작정 대표로 나선 이들과 이를 지지해 함께 대안을 만든 사람들. 만약 내가 봄에 만난 선거 전문가의 예언에 흔들렸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결과다.

우리가 함께 만든 대안을 어떤 모습으로 더 키울지, 숙제가 남았다. 나의 낙선을 실패가 아닌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드는 밑거름으로 사용하고 싶다. 정당 공천을 거쳐야만 당선되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에게 한 표를 행사해준 2246명의 마음이 돈 대신 양심 있는 평범한 사람도 정치인으로 성공하는 사회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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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