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스포츠에서, 특히 상금이 걸려 있는 프로 스포츠에서 테니스처럼 다양한 지표면을 가진 운동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프로 축구라면 거의 예외 없이 잔디에서 경기가 진행되죠. 프로 야구는 잔디 구역과 흙 구역이 딱 규격에 맞춰 나눠져 있습니다. 프로 농구나 배구는 실내 플로어에서 경기를 합니다.

하지만 테니스는 '공식' 구장만 넉넉히 잡아 4개 종류 정도가 되죠. 15일 노박 조코비치 선수의 우승으로 끝난 윔블던은 잔디 테니스 대회를 대표합니다. 그런가 하면 라파엘 나달 선수가 다수 우승한 프렌치 오픈은 흙 코트의 대명사입니다. 나머지 다른 2개의 메이저 대회, 즉 유에스 오픈과 호주 오픈은 이른바 하드 코트 대회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랜드 슬램 대회들은 이처럼 잔디, 흙, 하드 등 3개 종류의 코트에서 치러지지만, 또 하나 주요한 테니스 표면이 있습니다. 실내 즉 주로 카펫이 바닥에 깔리는 대회가 적지 않은 것입니다. 그랜드슬램 대회 다음으로 우승 포인트가 많은 연말 총결산 대회, 즉 제5의 메이저라고도 불리는 ATP 파이널 대회가 카펫에서 치러지는 대표적인 경기입니다.

카펫 경기, 즉 실내 경기는 북반구가 늦가을에 접어드는 시점에 주로 치러집니다. 이른바 아시아 스윙, 즉 중국과 일본 등에서 치러지는 대회는 거의 모두 카펫이고 유럽에서도 늦가을 대회는 실내에서 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카펫 대회는 실내이고 바닥이 딱딱해서 구태여 분류한다면, 하드 코드에 가까운 표면 특성이 있습니다.   

선수는 똑같은데 경기가 열리는 구장 표면이 이처럼 최소 4종류나 되다 보니, 결과는 사뭇 다르죠. '흙신'으로 불리는 나달의 경우 프렌치 오픈에서만 11번을 우승했고, 잔디인 윔블던에서는 로저 페더러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8회 우승의 금자탑을 쌓아 올렸습니다.

하드와 카펫도 특성으로 본다면, 흙보다는 조금이라도 잔디와 더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른바 패스트 코트, 즉 공이 닿으면 빠르게 깔려 나가는 쪽인 것입니다. 공이 느리고 상대적으로 위로 많이 솟구치는 클레이 구장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정현이 지난 18일 호주 멜버른에서 열른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남자단식 2회전에서 공을 받아치고 있다.

정현이 지난 1월 18일 호주 멜버른에서 열른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남자단식 2회전에서 공을 받아치고 있다. ⓒ 연합뉴스


정리하자면, 테니스의 대표적인 4개 유형 코트는 느린 코트 1종류(흙)와 나머지 빠른 코트 3종류로 나눌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나달이 17차례의 그랜드 슬램 대회 즉 메이저 우승 가운데 11번을 프렌치에서 일군 반면, 호주 오픈 윔블던 유에스 오픈 등 3개 대회에서는 모두 합쳐봐야 6번밖에 챔피언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이 같은 코트 특성에서 우선 찾아야 합니다.

페더러는 그랜드 슬램대회에서 20번 우승했는데 프렌치 오픈은 단 한 차례, 그것도 나달이 결승에 오르지 못했을 때 차지했습니다. 그는 윔블던을 제외해도 호주 오픈 6차례, 유에스 오픈 5차례 등으로 확실히 빠른 코트에서 좋은 성적을 올렸습니다. 특히 잔디에 버금가게 빠른 카펫 대회인 연말 결산 파이널에서는 6차례나 우승컵을 들어 올렸죠.

메이저 대회 13개의 타이틀로 페더러와 나달을 쫓고 있는 노박 조코비치도 분류하자면, 느린 코트보다는 빠른 코트에서 우수한 기량을 발휘하는 선수입니다. 페더러와 마찬가지로 조코비치도 흙코트인 프렌치 오픈에서는 단 한 차례 우승밖에 없습니다. 호주 오픈 6차례, 윔블던 4번을 포함해 나머지는 다 빠른 코트에서 나왔죠.

조코비치는 카펫 대회의 최고봉인 연말 파이널 대회에서도 현역선수론 페더러 다음으로 많은 5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카펫 실내 구장은 잔디 구장에 버금갈 정도로 공이 빠르게 움직이는데요. 흥미롭게도 나달은 단 한 차례도 이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현역 선수 3명, 즉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는 겉으로 보면 자신들의 영역이 확실해 보입니다. 즉 페더러와 조코비치는 빠른 코트를 분점하고, 흙코트를 위시한 느린 코트에서는 나달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양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일 뿐, 속내는 꼭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부연하자면, 페더러와 조코비치는 나달의 그늘에 가려서 그렇지 전성기 때 흙코트에서도 세계 최고의 기량을 자랑했다는 점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나달 다음으로 흙 코트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둔 선수들이었습니다. 반면 빠른 코트에서 나달은 페더러와 조코비치 바로 다음으로 공을 잘 치는 선수는 아닙니다. 앤디 머레이나 스탠 바브링카, 후안 마틴 델 포트로, 마린 칠리치 등 메이저 대회 우승 기록이 있는 선수들을 비롯해 상당수가 빠른 코트에서는 나달보다 실력이나 성적이 아래라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테니스 코트의 종류가 크게 4가지나 되고, 걸출한 현역 선수들이 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다 보니 얘깃거리가 많습니다. 테니스에 평소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라는 세 선수의 이름쯤은 들어봤을 텐데요. 이들은 테니스에서만 유명한 게 아니라 세계 유명 스포츠 선수들 가운데서도 앞자리에 드는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페더러의 경우 모든 스포츠 선수를 통해 가장 유명하고, 또 수입이 많은 걸로도 널리 알려졌지요. 최근에는 한 의류회사와 우리 돈 3360억 원 가량의 스폰서쉽 계약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페더러는 선수로서 걸출한 기량은 물론 사생활과 매너 등에서 유사한 예를 찾기 힘들 정도로 훌륭한 스포츠인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페더러를 위시한 나달 조코비치의 유명세는 단순히 그들 개인의 자질이나 노력에서만 비롯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서로 표면이 다른 4개의 구장을 활용하는 테니스라는 운동의 본질적 특성에서 상당 부분 이들의 인기가 비롯됐다는 것이죠.

테니스는 재미있는 운동임이 틀림없지만 테니스보다 더 인기 있는 운동, 특히 프로 스포츠는 차고 넘칩니다. 예를 들어 가장 프로 스포츠 시장이 큰 미국에서 테니스는 미식축구, 야구, 농구, 골프 등에 저만치 밀려 있습니다. 유럽에서도 역시 축구 등에 아예 비할 바가 되지 못하죠. 아시아권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인구 대국인 인도 등에서는 크리켓 등에 한참 쳐집니다.

한국에서도 최근 정현 선수의 활약 덕분에 테니스가 조명을 받고는 있지만 다른 구기에 크게 밀려 있는 상황이라고 해야죠. 중국에서도 선수는 많지만 시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사랑을 받는 운동은 아닙니다. 일본에서는 상황이 다소 나은 편이긴 한데, 그래도 야구나 축구에 비해서는 쳐지는 편입니다.

한마디로 테니스는 세계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스포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 등이 세계 유명 스포츠인들 사이에 최고의 반열에 우르르 올라있는 것은 왜 일까요. 물론 단체 경기가 아니고 개인 경기라는 점이 큰 역할을 하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전에도 테니스는 단식 경기가 주를 이뤘습니다. 그리고 매번 톱랭커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인기는 페더러나 나달 조코비치 수준에는 한참 못 미쳤습니다. 인기가 별로인 테니스라는 운동 종목에서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 등 3명씩이나 세계적 스포츠 선수를 배출한 것은 한국으로 치면 시골 중소도시에서 서울의 유명대학 수석을 휩쓴 것과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세계남자프로테니스협회(ATP)와 메이저대회 주최 측의 뛰어난 경영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경영 측면 즉 관중 끌어 모으기와 테니스 시장 확대에서 ATP와 메이저 대회 경영진은 남다른 수완을 발휘해오고 있는데, 이들은 4종류나 되는 테니스 구장 표면을 십분 활용해 스타들을 배출한 것입니다.

핵심은 구장을 활용한 라이벌리, 즉 경쟁 구도를 만들어낸 데 있는 거죠. 역설적이지만 세계 테니스 판은 나달과 조코비치 등장 이전 페더러의 독무대였는데, 페더러의 수입이나 인기는 독무대였을 때보다는 나달 조코비치 등과 경쟁 구도를 형성한 뒤에 가파르게 치솟았습니다.

페더러와 나달은 나이 차이가 만 5살에 가깝습니다. 당대의 라이벌리를 형성하기에는 다소 차이가 있는 거지요. 스포츠에서 5살 차이는 결코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축구 같은 단체 스포츠라도 또 기량이 엇비슷하더라도 평균 나이가 5살 정도 적으면 일단 체력면에서 젊은 쪽이 유리합니다. 또 페더러와 조코비치는 만 6살 정도 나이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당당한 라이벌 관계이지요.

전대미문의 테니스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데 결정적인 선수를 하나 꼽으라면 페더러가 아니라 나달일 것입니다. ATP와 메이저 대회 운영진은 아주 일찍 나달의 시장 잠재력을 간파했습니다. 흙 코트에서 100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할 정도로 특화된 나달을 십분 활용한 거지요.

ATP 대회 숫자로 봐도 그렇고 4개인 메이저 대회를 감안해도 그런데, 나달이 오로지 흙코트에서만 잘한다면, 건강한 라이벌 관계는 만들어지기 어렵습니다. 빠른 코트 대회의 숫자가 느린 흙 코트 대회보다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묘수가 등장합니다. 4개 종류의 테니스 구장 가운데 사실상 흙 코트는 빠르기 조절이 불가능한 반면, 나머지는 얼마든지 빠르기를 조절할 수 있는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잔디 대회는 잔디를 깎는 정도, 또 서너 개의 층 즉 레이어로 만들어지는 하드 코트는 표면을 구성하는 물질을 조절해 빠르기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카펫 대회는 카펫 자체의 특성을 달리할 수는 있는데, 실내라는 점은 변화시킬 수 없고 바닥 자체도 변화를 주기 어렵습니다.

하드 코트 대명사 즉 유에스 오픈과 호주 오픈, 그리고 잔디 대회인 윔블던에서 과거보다 코트가 느려졌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시점이 흥미롭게도 나달의 전성기와 일치합니다. 나달은 프렌치 오픈을 제외한 나머지 6번의 그랜드슬램 대회 우승 가운데 4번을 2008~2010년 일궈냅니다. 또 하드 코트로써 속도가 느려진 정도가 가장 심하다는 평을 들은 유에스 오픈에서는 총 3번 우승합니다. 빠른 코트에서 6번의 메이저 우승 가운데 3번이 '느려진' 유에스 오픈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달이 오로지 프렌치 오픈에서만 우승컵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면 페더러와 나이 차 등을 감안할 때 강력한 라이벌 관계 형성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페더러와 조코비치의 영역으로 간주됐던 빠른 코트에서 우승을 몇 개라도 해내야 라이벌 관계가 고조됐을 것이기 때문이죠.

특히 페더러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던 윔블던에서 2차례 우승은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를 공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면에서는 운도 나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잔디는 4종류의 주요 테니스 구장 표면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 있는' 구장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흙 코트나 하드 코트나 카펫 코트는 대회 기간 내내 표면 상태가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잔디 코트의 경우 대회 초반과 중반 종반이 확연히 달라집니다. 특히 2주 동안 선수들이 뛰어 다니는 윔블던 대회 같은 경우는 극명하게 코트가 달라집니다.

주말 추위에도 테니스 열정 정현의 호주 오픈 남자 단식 4강 진출로 테니스에 대한 관심과 관련 용품 수요가 늘어나는 등 테니스 붐이 일고 있다. 지난 1월 2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양재 시민의 숲 테니스장에서 테니스 동호인들이 테니스를 즐기고 있다.

지난 1월 2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양재 시민의 숲 테니스장에서 테니스 동호인들이 테니스를 즐기고 있다. ⓒ 연합뉴스


윔블던의 경우 대회 초반에는 확실히 미끌미끌한 잔디인 반면, 10여일쯤 지나면 구장의 상당 부분이 흙 코트 성격을 갖게 됩니다. 잔디가 문드러지고 공에 맞아서 제대로 클 수 없기 때문이죠. 당연히 이런 상황은 나달에게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나달의 윔블던 초반 공의 궤적(특히 톱스핀)과 후반 공의 궤적이 다르다는 걸 알아챌 정도입니다. 나달이 윔블던을 두 차례 우승했지만 1회전 탈락을 포함해, 대회 1주차에 여러 차례 윔블던에서 고배를 든 것은 살아있는 구장이라는 잔디 코트의 특성이 단단히 한 몫을 한 것입니다.   

테니스가 축구나 야구 같은 오로지 한 종류의 구장에서만 벌어지는 운동이었다면, 페더러와 나달 가운데 한 사람은 몰락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특성이 전적으로 다른 4종류의 코트를 활용하는 까닭에, 게다가 흙 코트 외에 나머지 3개 코트는 얼마간 속도 조절이 가능한 탓에 라이벌 관계가 한층 심화된 거지요. 그리고 이러한 라이벌 구도가 테니스와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 3인의 흥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덧붙이는 글 마이공주 닷컴(mygongju.com)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윔블던 조코비치 페더러 나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