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허스토리' 포스터

영화 '허스토리' 포스터 ⓒ SOOFILM


드디어 <허스토리>를 봤다. 혼자 보기에도 아까운 영화이고 한 번만 보기에도 아까운 영화인데 가장 안타까운 것은 상영관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 개봉 3주차밖에 되지 않았는데 <허스토리>를 보려면 아트영화관을 찾아가야 할 정도다. <허스토리>는 분명히 상업영화에도 불구하고 포털사이트에 '허스토리 상영관'을 검색하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한국상업영화들에 비해 현저히 적은 빈도로 상영되고 있음을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CGV의 경우, 2018년 7월 15일을 기준으로 <허스토리>를 볼 수 있는 상영관은 전국에 단 38곳이며, 그중 13곳이 서울경기 지역에 있다. 따라서, 비수도권 거주자가 <허스토리>를 관람할 수 있는 기회는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나 역시 내가 볼 수 있는 시간대의 상영관을 찾지 못해서 SNS를 통해 모인 사람들과 단관(단체관람)을 다녀왔다. 영화를 다 보고나니, '여성주연 영화라서 돈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주연 영화가 돈을 벌 수 없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허스토리>를 입소문 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지금부터 영화의 반전이나 구체적인 장면이나 설정에 대한 언급 없이, 짧고 굵게, 세 가지 관포(관전포인트)를 중심으로 '스포 없는 후기 겸 영업글'를 써보려한다.

첫 번째 관전포인트 : '나이든 여성'의 생존기

<허스토리>의 포스터를 가득 메운 얼굴들에는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하다. '12월 25일이 지나면 필요가 없어지는 크리스마스 케이크처럼 여자도 25살이 넘으면 쓸모가 없어진다'따위의 말이 '농담'으로 인정되는 한국사회에서 '나이든 여성'들의 이야기가 스크린에 펼쳐진다는 사실이 얼마나 벅찬 일인지 모르겠다.

작년에 화제를 모았던 <아이캔 스피크> 역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상업영화로서 <허스토리>와 마찬가지로 '나이든 여성'의 삶과 투쟁이 중심이 된다. 한편, <아이캔 스피크>가 던지는 메시지가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면, <허스토리>의 핵심은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Together, Stronger)"는 한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두 영화가 던지는 핵심적인 메시지들이 어느 한쪽에만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각 영화의 서사구조가 어떻게 짜였느냐에 따라서 부각되는 측면이 다르다고 느꼈다. 특히, <허스토리>는 '과연 이 영화의 주인공이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다르다.

<아이캔 스피크>가 나문희와 이제훈이라는 두 주연배우의 관계성과 성장에 주목한 것과 달리, <허스토리>는 여러 명의 캐릭터별로 각각의 서사를 부여했다는 점이 매력이다. 2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은(모든 캐릭터의 이야기가 완결된 서사로 구현되기엔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각각의 캐릭터들이 어떻게 서로의 일상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만들어나갔는지 관찰하기엔 충분했다.

아마, 이 영화를 다 보고나면 '누가 여우주연상(혹은 여우조연상)을 수상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 중에 본인이 누구에게 가장 마음이 끌렸으며 누구의 말에 가장 설득되었는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보는 것도 영화를 감상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되지 않을까.

두 번째 관전포인트 : '재현'의 윤리

 영화 <허스토리> 스틸 컷.

영화 <허스토리> 스틸 컷. ⓒ (주)수필름


<아이캔 스피크>와 <허스토리> 모두 역사적 사건을 재현(Re-present;다시-보여주기)하는 과정에서 고통에 과잉의미부여하거나 상처를 전시하지 않는 등 상당히 섬세한 감수성이 느껴지는 영화다.

영화상영이 끝나고 감독과 피디, 배우들과 함께 GV를 진행했는데, 민규동 감독은 이 재현의 과정을 "극적 재구성"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극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현실의 요소들을 그대로 설정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상황과 인물에 따라 재구성을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물론, '극적 재구성'에 대한 제작자의 고민과 배우의 고민이 같지 않듯, 평론가의 시선과 현장에서 활동하는 여성주의 활동가의 시선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 중에 위안부 피해생존여성들을 '불쌍한 소녀들'이라는 프레임으로 납작하게 만들고, '민족의 희생양'으로 묘사하는 기존의 관습에 문제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민규동 감독 역시 이러한 관습에 문제를 느껴온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아무리 '극적 재구성'을 잘 하려해도 연출이나 자료조사 과정에서 한계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데, <허스토리>의 경우 역사적 사실관계와 어긋나는 정보를 전달하는 부분이 있었고, 실제로 이 지점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영화가 완성된 이후에 발견된 문제라서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피디님에 의하면 해당 문제와 관련된 대해 당사자분들께 사과의 말씀을 전하셨다고 한다. 작품을 평가할 때 결과물의 완성도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작품의 사회적 영향력'과 '제작자의 정치적 올바름'을 평가기준에 넣는다면 '좋은 영화'의 기준은 분명 지금과  달라질 것 같다(관련기사 : 큰 울림과 감동 준 '허스토리', 이런 장면은 좀 아쉽다).

세 번째 관전포인트 : 슬픔의 힘

 영화 <허스토리> 포스터.

영화 <허스토리> 포스터. ⓒ (주)수필름


나는 영화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감정은 분명 슬픔이라고 느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관람 전에 영화 예고편에 나오는 "기회를 줄게, 인간이 되어라"는 대사만 들었는데도 울컥한 적이 있다. 흔히 '여성의 눈물(특히 '어머니의 눈물')'은 종종 나약함이나 무력함, 후회를 상징하는 장치로 활용되곤 하지만, <허스토리>의 눈물이 가지는 의미는 오히려 정반대였다.

할머니들의 눈물에 '한의 정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물 흘린 자는 약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눈물 흘린 자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투쟁과 싸움의 언어를 만들어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기만 하면 '자연적으로' 평화가 찾아온다는 오래된 착각을 고발하는, 용기 있는 여성들이었다.

투쟁과 싸움의 언어 뒤에 놓인 본질적인 감정이 분노가 아니라 슬픔이라는 점. 이것이 관객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 실제로 재판단이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긴 시간 동안 오고갈 수 있었던 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마침내 허물게 하는 힘. 나는 그 힘이 슬픔이 갖고 있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다. 미래의 절망을 피할 방법은 없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살아가는 방법, <허스토리>는 바로 이 방법에 대한 지혜를 관객들에게 알려주는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즉, '분노의 페미니즘'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지혜가 '할머니들'의 입에서 전달되었다는 점이 영화가 주는 가장 큰 감동 중 하나이고 우리에게 더 많은 '할머니들'의 지혜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할머니가 '가부장제의 편견'을 딛고 역사의 폭력을 증언하는 시민으로서 재기입되었던 그 순간들에 대해서 기억해야 한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운동을 촉발시켰던 그 에너지, "나는 부끄럽지 않다. 이 순간을 평생 기다려왔다"던 김학순 할머니의 말, "법정에서는 졌지만,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던 송신도 할머니의 말에 스며들어 있는 그 결기에 대해서 지치지 말고 이야기해야 한다. 할머니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세계에 꺼내어 놓음으로써 이 세계의 보편의 기억에 틈입해 들어왔다. 그랬기 때문에 잠재적으로서만 존재하던 그 기억들은 드디어 정치적 운동의 힘이 되었다. 우리의 세계는 이미 할머니들의 기억과 접속되어 형성된 '새로운 공통의 기억'위에 서 있다.(손희정, <할머니들>, 페미니스트 모먼트, 2017, 그린비)"

덧붙이는 글 덧붙이는 말: ‘관부(関釜)재판’이란, 한국의 원고 10명(3명의 위안부 피해생존여성과 7명의 근로정신대피해여성)으로 구성된 재판단이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시모노세키(下関:하관)와 부산(釜山)을 오고가며 일본정부(피고)에 대해 공식사죄를 요구했던 사건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김문숙 회장(김희애 역)은 당시 재판단을 이끌었던 실존인물이며, 해당 재판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진행되었던 소송 중 최초로 1심에서 ‘일부승소’를 하며 역사적인 판례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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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사람 / 여성주의공부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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